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7화 (267/306)

267. 전환점 (2)

***

서이수는 그대로 학교로 가 버렸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이미 떠난 그의 자취를 보며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리둥절하니 깨어난 아빠도 뭔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나도 서이수가 왜 이렇게 화내는지 잘 이해가 안 가 고개를 저었다.

반휘혈의 문제로 인해 나는 우선 아빠를 체육관에 보냈다. 최근엔 같이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던 터라 아빠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와 따로 할 얘기가 있다며 대충 둘러대고 쫓아냈다. 엄마와만 상의한다니 퍽 서운한 눈치였으나 아빠는 더 말꼬리를 잡지 않고 떠났다.

그렇게 엄마와 남게 되자 나는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를 붙잡고 우다다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제 왜 안 깨웠냐고, 일어나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냐며 따지자 엄마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 안 깨우긴? 내가 널 얼마나 깨웠는데.”

“어?”

“휘혈이는 눈가가 붉은 게 울다 잠든 것 같아서 깨우긴 뭐해서 내버려 두긴 했다만. 두드리고 흔들어 봐도 네가 안 일어나길래 그냥 뒀지. 보니까 둘이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둘 다 지쳐서 잠든 것 같아서 내버려 뒀어.”

“…….”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무안해진 나는 눈을 굴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에 엄마가 피식 웃으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그 반응을 보니 진짜 아무것도 없었나 보네? 어유, 우리 딸 너무 고지식하다. 요즘 애들 되게 개방적이라고 하던데 우리 애들 보면 또 그런 건 아니란 말이지~?”

후후, 짓궂게 웃음을 흘리며 놀리는데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곧장 반박했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긴 뭘 해?”

“어머? 성인이라면 괜찮고?”

“그 뜻이 아니잖아…!”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딱 봐도 놀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괜히 달아오르는 기분에 얼굴을 화끈거리고 있자 엄마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현관에 섰다.

“우리 집 남정네들은 모르니까 걱정 마~. 알아봤자 좋을 건 없어 보여서 그냥 너 자니까 내버려 두라 했고.”

“아, 그건 그래.”

실제로 아침부터 대판 난리가 날 뻔한 걸 겨우 막았던 게 떠올랐다. 중간에 내용이 다른 쪽으로 빠지면서 서이수가 토라져 버리긴 했으나… 우선 아빠 귀에 이 일이 들어가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아, 이나야.”

감사를 전하며 엄마를 배웅해 주기 위해 나도 같이 현관에 서 있자 엄마가 불현듯 내게 할 말이 생각난 것처럼 나를 돌아봤다.

“휘혈이는 요즘도 가족 문제로 많이 힘들대?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또 자고 가도 된다고 해 줘. 이나야.”

“아, 응. …음?”

어, 잠깐만. 나는 멀뚱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곤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내가 당황스러움에 눈을 방황하고 있자 엄마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명쾌히 답안을 내놓았다.

“휘혈이가 작년에 집에 자고 간 적 있잖아. 그때 말해 줬지.”

“아.”

그런 거였구나. 하긴, 그게 더 일리 있네. 생각해 보니 작년에 봤던 두 사람이 꽤 친밀했음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에 친해져 있어서 깜짝 놀랐었지. 반휘혈이 먼저 그 얘기를 꺼낸 건 신기하긴 했지만…, 뭐, 엄마라면 그럴 수 있다. 나는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엄마도 무언가 떠올린 모양인지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휘혈이가 널 여전히 참 좋아하나 봐? 그때도 그러더니만. 말은 많지 않은데 딱 티가 난다, 얘.”

“……뭐, 그렇지.”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만 쟤가 날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난…! 난, 누나가 정말 좋단…, 말이야.’

…이런 고백도 듣기도 했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웬만한 사랑 고백보다 더 열정적인 고백이지 않을까 싶다, 정말. 나도 어제만큼은 순간 진짜 고백인 줄 착각할 뻔했다. 어차피 이번에도 이성적인 관점보다는 가족애 같은 거겠지만.

‘뭐, 그것을 알지만서도…’

역시 오해하기 쉽단 말이지. 다시금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어, 어서 가 봐. 엄마.”

“네, 네. 그럼 이따 보자.”

“응, 다녀와.”

엄마를 배웅하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그런 날 잠깐 물끄러미 보더니 씩 웃으며 인사를 하곤 나갔다.

“오늘은 좀 평소랑 같아 보여서 엄마도 마음에 놓이네. 그럼 운동 열심히 해~.”

“어?”

훅 들어오는 말에 벙찌고 있자 그사이에 엄마는 쇽, 하고 순식간에 나가 버렸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랑 같다고?”

언젠 내가 평소랑 달랐나?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을 돌렸다. 이제 반휘혈을 깨울 차례였다.

“음.”

방에 다시 들어선 나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반휘혈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진짜 쓸데없이 겁나 잘생겼네.’

아까는 당황해서 제대로 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정말 더럽게 잘생겼다. 그동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체육관에 있는 남자들로 인해 내 안구가 테러당하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여성 선수들이 고찬영 올 때마다 열광을 하며 더 열심히 운동을 한다 싶었다. 고찬영도 내 안구 정화에 힘써 주긴 했지만, 역시 다다익선이 최고였다.

나는 아침부터 맞이하는 훌륭한 눈요기에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반휘혈을 깨우기 위해 그의 어깨를 짚었다.

“휘혈아, 일어나.”

“…….”

살살 흔들며 깨우자 그가 눈썹을 살짝 모았지만 눈이 떠지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반휘혈~ 학교 가야지~.”

얘한텐 딱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 같다만, 우선 말은 해 보았다. 흔들흔들. 툭, 툭. 몸을 흔들고 두드려 주자 그도 점점 정신이 드는지 눈살 찌푸려지는 게 짙어졌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었다.

“…….”

깜빡. 잠에서 막 깨어난 반휘혈이 멍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눈을 한 번 깊게 깜빡였다. 그러곤 스륵 눈동자만 굴려 깨운 사람을 쳐다봤다.

깜빡깜빡.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나갈 준비하라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반휘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당황한 듯 방을 두리번거리는 게 이 녀석도 설마 자신이 여기서 잠든 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파악하곤 방문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 말고. 나 나가 있을 테니까 대충 준비 끝나면 나와. 아, 옷은 이수 옷으로 준비했는데 입기 싫음 안 입어도 돼. 나 체육관 가야 하니까 되도록 빨리 준비하고.”

“…….”

그 말을 내뱉곤 나는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을 챙기곤 방을 나왔다. 나갈 때까지 반휘혈의 시선이 어딘가 멍해 보였지만 금방 정신 차릴 거라 믿으며 난 부모님 방으로 향했다.

스트레칭까지 마치고 나오자 서이수의 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준비를 마친 듯한 반휘혈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 정신이 어딘가 뺏긴 것처럼 멍해 보였다. 나는 그 반응이 참 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의 등을 툭 두드렸다.

“너 아침에 약한 편이야? 되게 멍하다. 그만 정신 차리고 나가자.”

반휘혈은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침밥.”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뒤늦게 그의 밥을 챙기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요즘 아침은 단백질 셰이크로 때우고 있어서인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편의점이라도 들려 먹일까 싶어 그에게 묻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원래 안 먹어.”

“아, 그래.”

그럼 억지로 먹일 필요는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후 아파트 정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조심히 가고. 난 간다.”

대충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되도록 학교를 가길 바랐지만, 남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는 못 되었기에 나는 조용히 말을 삼켜 냈다.

그런데,

저벅저벅.

저벅저벅.

“…….”

“…….”

왜 저 자식은 자기 갈 길 안 가고 날 따라오는 걸까.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무시할 수 없는 인기척을 느끼며 얼굴을 떫게 구겼다. 처음엔 대충 가는 길이 같나 하고 외면도 해 보았지만 체육관이 다 다가왔음에도 멀어지지 않으니 이젠 진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반휘혈을 홱, 노려봤다.

“그만 쫓아와.”

“싫어.”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너 학교 안 가?!”

“안 가도 돼.”

그 대답에서 하루 이틀이 아니란 짬밥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 말은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은 했다만, 직접 들으니 새삼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나는 어이없단 눈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골이 아파 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경고했다.

“나 너 못 챙겨 줘.”

“알아.”

“구경만 하다 가는 거라니까?”

“상관없어.”

반휘혈은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어차피 누나만 볼 생각이었으니까.”

“…….”

훅 들어오는 한마디에 나는 바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오, 아 자식, 이거. 이럴 때만 말을 잘하지…!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어차피 구경꾼이 한 놈에서 두 놈으로 늘었다고 바뀌는 건 그리 없으니 말이다. 이왕 오는 거 고찬영처럼 훈련에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생각해 보면 반휘혈이 요즘 잠잠해서 그렇지, 얘도 길거리 휩쓸고 다니던 시절이 있지 않던가. 나는 대강 눈을 흐리며 더 이상 실랑이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는 반휘혈을 체육관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몰랐다. 반휘혈을 이 이른 아침부터 데려간다는 것과 그가 온 목적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를 말이다.

“안녕하세요.”

“어, 이나, 안…?”

그리고 그것은 이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나를 반기며 인사하던 서연 언니가 멈칫하며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단순히 반휘혈을 보고 그랬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주하면 이렇게 놀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난 놀란 그녀에게 내가 훈련하는 거 구경하러 왔다고 설명해 주자 서연 언니는 더 경악한 것처럼 입을 벌리며 뒤늦게 소리쳤다.

“…이나, 너…?!”

“응?”

그런데 그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반휘혈이 아니라 내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리자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야, 내 말 맞지? 개랑 안 사귄다니까. 야, 돈 내놔.”

“아, 닥쳐. 아직 사귄다는 말 안 나왔거든?”

“……?”

잠깐. 저게 무슨 내용이야. …근데 왠지 모르게 본능적으로 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또 뭐지? 어쩐지 느낌이 싸해 내 얼굴도 굳어지는데 정신을 차린 듯한 김서연이 소리쳤다.

“찬영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

왜 사람은 불길한 느낌이 틀리지 않는 걸까. 나는 역시나 싶은 말에 이마를 텁,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버럭 외쳤다.

“사귀는 사람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나는 잠시간 그들의 오해를 풀어내는 웃기고도 어이없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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