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8화 (268/306)

268. 전환점 (3)

***

“짜잔~!! 친구님 베프 등…, 음? 친구님 표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살벌해?”

“너 때문이잖아, 이 자식아.”

퍽! 오후가 되고 오늘도 여지없이 고찬영은 들이닥쳤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게 다가오자마자 훈련하는 것도 멈추고 그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고찬영은 반사적으로 그 주먹을 막으며 얼떨떨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으음?? 이 격한 환영은 또 무슨 일이려나~? 나야 반갑긴 한데~.”

고찬영은 막아 낸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더니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맞은 것과는 별개로 그는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좀체 예민해진 내 신경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어 나는 으르렁거리듯 인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치곤 링 위를 가리켰다.

“올라와, 짜샤. 진짜 오늘로서 널 이 체육관에 발도 못 디디게 만들어 주마.”

“뭐어…?!”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듯 소리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 듯싶은 낯짝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봐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나 이제 막 왔는데 나 혹시 뭐 잘못했어?! 말로 해, 말로! 아, 혹시 훈련이라면 그렇게 살벌하게 말하지 않아도 도와줄 테니까~.”

자, 자. 하고 고찬영은 나를 타이르듯 내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씩씩거리는 날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처럼 그가 내게 시야를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매몰차게 손을 치우려 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성질이 한풀 꺾여 버려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얼마나 이상한 오해를 받았는지 알긴 해?”

말없이 시선이 오갔고 결국 내가 먼저 솟구치던 전의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뚱하니 얼굴을 찌푸리며 오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고찬영은 체육관에 흘렀던 나와 그와의 소문을 듣게 된 경위를 잠자코 듣더니,

“으하하하하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으하, 으하핰, 아, 큭, 크흡, 으하하하하!!!”

“…….”

얼마나 웃긴지 그는 바닥에 쓰러지는 와중에 배를 감싸며 바닥을 쾅쾅 두드렸다. 그의 폭소로 인해 체육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미치겠, 으하하하!!! 쿨럭, 쿨럭!!”

“웃겨? 넌 이게 웃겨? 어??”

아니, 근데 웃어도 너무 웃는 거 아니야? 웃다가 사레까지 들린 놈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나도 어이없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쩐지 놀림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를 툭툭 발로 차며 성질을 내보였다.

“으핰, 미안, 미안. 아~ 진짜 오랜만에 엄청 웃었네. 너무 황당해서 그만.”

“넌 황당하면 웃냐?”

헛웃음을 흘리며 되레 더 황당하단 것처럼 보자 고찬영은 엎드린 상체를 일으켜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너무 말도 안 되잖아.”

“…….”

“내가 친구님이랑? 말도 안 되지~”

진짜. 그는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마지막 말 속에서 뼈가 있음을 느껴져 이건 욕인가 싶어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데,

“그러기엔 친구님이 너무 아까운걸?”

“…음?”

툭 내뱉는 그의 말에 나는 멈칫 굳었다.

“애시당초 말이지~. 그런 관계를 원했다면 이렇게 어물쩍거리고 있을 리가 없잖아?”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사이, 고찬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찡긋 윙크했다.

“꼬실 거면 제대로 꼬셔야지. 난 애매하게 구는 거 안 좋아해.”

장난스러운 몸짓치고는 꽤 단호한 말이었다. 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묘하게 어렸던 짜증은 이미 증발된 지 오래였다. 왠지 전의까지 상실된 기분에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앞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너한텐 애매한 태도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남들이 보기엔 수상했나 보지.”

이렇게 매일 찾아오는 게 말이야.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하…. 이 박정한 세상 같으니. 나처럼 순수한 우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지?”

그는 억울한 걸 표현하기 위함인지 과장되게 말하며 손으로 입을 가려 가련한 척을 했다. 아주 남우 주연상이 따로 없었다.

“뭐, 아무튼 그건 남들 기준이고. 친구님 기준은 어떤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처구니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금세 가련한 모습 따위 집어던진 고찬영이 싱긋, 웃으며 물어 왔다. 나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고찬영은 내 대답을 듣고 싶은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눈치 빠른 그가 내 대답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치 저 다 안다는 듯한 태도가 가끔씩 짜증이 났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면서 알맹이는 왜 이렇게 일찍 철이 든 건지. 정말 좋지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끝내 뚱하니 입을 열었다.

“…아, 그래! 별로 싫지 않았다, 됐지!”

요 2주간 고찬영이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것, 사실은 기뻤다. 이젠 그가 찾아오지 않을 걸 생각하면 불안해질 정도로. 그걸 인정하면 고찬영이 정말 날 포기했을 때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더 매몰차게 굴었다. 분명 고찬영도 상처를 받았을 거다. 반드시 그럴진대 고찬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안도를 느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응, 그걸로 됐어.”

고찬영은 내 말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는지 참 예쁘게도 웃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굴 수가 없어 괜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고찬영은 그런 날 보며 하하, 하고 다 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게 괜히 신경에 거슬려 난 툭, 하고 짜증을 내보였다.

“너흰 왜 대체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못해 안달인 거야?”

“너희?”

“너랑 반휘혈.”

“음? 반휘혈도 왔다 갔어?”

아, 내가 이 이야기를 안 했나. 생각해 보니 그 녀석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반휘혈이 방금까지 같이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음? 그런데 왜 지금은 없어?”

“형한테 연락 오길래 쫓아냈어.”

오전에 상황을 겨우 수습하고 난 이후 점심시간 때 반휘혈의 핸드폰이 자꾸 울리길래 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니 형이란다. 아주 당연하게 무시하고 있길래 어서 받으라 재촉하니 반휘혈은 못마땅하니 겨우 받았고, 통화 건너에선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딨어.]

다시 떠올려도 섬뜩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로 사람 기죽이게 만드는 건 유전인가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무단 외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형이 걱정하는 것도 만무했다. 반휘혈은 그 질문에 태연하게 체육관이라고 답했고, 형님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며 어딘가 피로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돌아와서 얘기해. 누나한테 폐 끼치지 말고.]

…대체 어떤 사고를 거쳐야 내게 폐 끼친다는 생각까지 미치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반휘혈의 형님이 이 청개구리 같은 녀석을 굉장히 잘 안다는 것이었다. 곧 뚝, 하고 타협은 없다는 것처럼 통화가 단호히 끊겼고, 나는 떠나지 않으려는 반휘혈의 등을 꾹꾹 밀어내며 쫓아냈다.

“어휴, 그 자식, 그거. 집착이 아주? 어, 아주 사람 피 말리게 한다니까. 어? 너나 반휘혈이나 나한테 무슨 빚이라도 있어? 왜 이렇게 사람을 가만두질 못해.”

그냥 연락이 안 되면 바쁘나 보다. 그리고 대화하기 싫고 인연 끊고 싶다고 하면 뭐 이딴 놈이 다 있나, 하고 그냥 기분 나빠서 끊어 버리면 될 거 아닌가. 그럼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고, 또 운동에 집중도 하게 되고… 그냥, 이전처럼 친구가 없는 거뿐이고.

‘…아, 왜 속상하고 지랄이야!’

혼자 생각하다가 스스로 상처 입어 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꼬인 사람처럼 느껴져 괜히 머리를 헝클였다. 이래서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방치하며 훈련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선 잡념만 섞이고 정태이를 따라잡기 힘들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잘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이전과 달리 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아빠가 알면 정말 한탄하겠군. 나는 나약해 빠진 자신을 욕하며 얼굴을 깊게 쓸었다.

“음, 있잖아, 친구님?”

그런데 잠자코 내 말을 듣던 고찬영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님이 뭔가 굉~장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단 말이지?”

“?”

착각? 그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들자 고찬영이 어딘가 마뜩잖은 낯으로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지랖은 나나 그 자식보단 친구님이 먼저 부렸잖아?”

“…내가?”

내가 언제? 나는 바로 생각나지 않는 기억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고찬영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숨을 깊게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 원. 순서를 착각하면 정말 곤란해. 친구님.”

마치 어쩔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대하는 말에 왠지 발끈할 것 같았지만 고찬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나랑 처음 만난 날, 친구님은 내게 뭘 했지?”

“뭘 했냐니…. 그야… 그야…….”

아. 나는 그간 완전히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생면부지의 학생, 그것도 타 학교에 난입해 싸움을 거는 것도 모자라 내게 쓸데없이 조커냐고 단도직입적으로 집적거려 날 귀찮게 만들었던 인간을 도와줬던 일을 말이다.

“그리고 또 뭐야. 그 얼마 만나지 않은 나한테 부탁했던 일이 뭐였지? 응?”

“……그, 그건….”

그리고 그런 녀석에게 반휘혈과 한도훈과의 일을 주절주절 떠들며 어떻게 하면 다시 대화를 나눌지 한탄을 나눈 것도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고찬영이 밀고 들어왔으며, 그때 한창 심란했던 나는 터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벽에 대고 얘기한다는 심정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설마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전학까지 오면서 말이다. 물론 도와준 건 그냥 전학 온 김에 따라온 부차적인 일인 듯싶어지만.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나 어물어물하며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 고찬영은 팔꿈치를 다리에 댄 채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런 말을 여기서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슬쩍 눈을 내리자 마주한 것은 어딘가 못 말리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걸 보고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아, 인과응보가 나으려나. 고찬영은 뒷말을 중얼거리곤 내게 싱긋, 하고 상큼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니까 이번엔 친구님이 당할 차례인 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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