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전환점 (4)
***
나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모든 선수들이 퇴근하고 나는 홀로 남아 체육관 링 위에 누워 있었다. 훈련을 마친 몸이 무거워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쉬는 게 나았으나, 어딘가 둔해진 머리 탓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고찬영과의 대화 이후 왠지 모르게 정신이 빠진 듯싶어졌다. 내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보같이 바라보고 있자 고찬영은 웃으며 오늘은 빨리 가 주겠다면서 선심 쓰듯 말하고 내게 쇼핑백 하나를 내밀곤 떠났다.
쇼핑백 안에는 닭 가슴살 크랜베리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간식으로 먹으라고 가져온 마카롱을 훈련 핑계를 대며 거절했더니만, 이번에 가져온 게 나름 선수에게 맞춘 식단이라니. 참 그다운 배려가 엿보이는 선택이었다.
‘아, 그리고 친구님.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리고 그는 당부하듯 한마디를 더 남겼다.
‘이전에… 나한테 왜 최강혁에게 리매치를 하지 않느냐고 했던 적 있지?’
선물을 얼떨떨히 내려다보던 내 시선이 올려졌다. 고찬영은 그런 내게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사실 친구님 덕이야.’
뭐?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고 굳어 버렸다. 고찬영은 내게 무슨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후후, 하고 의뭉스러운 웃음을 흘려 댔다.
‘친구님 아니었으면 나도 친구님이랑 별반 다를 바 없이 행동했을 거란 걸 알고 있달까. 뭐, 이런 거 보면 나랑 친구님은 꽤 닮았을지도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나도 친구님처럼 군 적이 있단 소리지. 그럼 내일 또 보자고. 친구님?’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 낸 것처럼 그렇게 홀가분하게.
“…….”
나는 슬며시 시선을 움직여 벤치 위에 올려 둔 쇼핑백을 보았다. 아직 샌드위치는 먹지 않은 채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와 허기짐을 느꼈지만 선뜻 그것에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왜 나 때문이지.’
그가 떠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그는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일이기도 했고. 이제 그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현재의 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이전에 고찬영은 정태이에게 진 적이 있다고 했다. 리벤지도 수차례 시도했고 전부 졌다고도 했다. 아마 그가 말한 경험은 이걸 말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와 그와의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현재 나와 그의 현 모습이 그러하다. 그는 현재를 바라보며 미래를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내 앞길을 결정하지 못했다.
과거에 이미 걸어온 길인 만큼 이번에도 내 행동은 명확하다. 익숙한 길을 걸어가는 만큼 내가 이렇게 혼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자꾸만 혼자 두려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자아낸 현상이라고 한다.
그럼 이 상황을 뭐라고 불러야만 좋을까. 고찬영의 말대로라면 뿌린 대로 거둔다, 라든가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와 비슷한 말이 또 있었을 텐데. 나는 곰곰이 생각을 뒤지다가 불현듯 떠오른 단어를 중얼거렸다.
“…업보.”
그래, 업보다. 이것은 내 업보였다. 아이들이 나를 버리지 않은 의리에 웃어야 될지 아니면 내 앞을 막아서는 그 행위를 보며 안타까움에 울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나야, 슬슬 집에 가자꾸나.”
“아.”
멍한 시선 속에서 방황하던 중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 무슨 일 있니?”
평소보다 둔한 반응 탓일까, 아빠가 의아해하며 잡고 있던 문을 놓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다가오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고 있으면 분명 걱정하고 의심할 텐데. 알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복잡한 것은 머리일까 가슴일까, 이젠 모르겠다. 나는 짙은 피로감에 이내 눈을 꾹 감았다.
“이나야, 어디 몸이 안 좋니? 속이 안 좋은 거면 말하렴. 아니면 뼈나 근육에 이상이 생겼나?”
아빠가 털썩 내 곁에 앉아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게 전해졌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입이 무거워 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요 몇 년간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훈련을 한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2주 동안 강도를 높이는 건 당연히 몸에 과부하가 찾아올 수밖에 없어. 이제껏 버틴 게 용할 정도야. …역시 내 딸이구나.”
내 건강을 염려하는 와중 들려온 마지막 말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은… 나를 향한 자랑스러움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빠 스스로를 향한 자긍심이 내재된 말이었다. 그것은 전생에서도 익히 들어왔던 말인 만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어느새 내 옆에 앉아서 내 팔을 들어 뭉친 근육을 마사지를 해 주고 있었다. 아릿하고도 익숙한 통증이었다. 그리고 이 광경도 내겐 참으로 익숙한, 익숙했던 광경이었다.
“…아빠.”
“응? 아, 여기 아프지? 그래도 조금만 더 참…,”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멈칫. 꾹꾹 누르던 손길이 멈추었다. 아빠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아빠와 잠시 시선을 맞추다가 곧 눈을 굴려 천장을 보며 여상히 물었다.
“안 궁금해요? 제가 갑자기 이러는 거.”
체육 대회, 그리고 정태이에게서 패배하고 돌아온 그날.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저 훈련 시켜 주세요.’
이 말을 꺼내기까지 나는 많은 각오를 다졌다. 무슨 연유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부터 앞으로의 미래가 더는 평범한 일상이 될 수 없다는 것까지. 나는 이번에도 아빠의 바람대로 살 각오를 말이다. 내 목표인 정태이를 꺾게 되면… 그때면 나도 이 길에 대해 무언가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그 말을 꺼낸 거였다.
‘…이유는?’
예상대로 아빠는 내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에 나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이기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는 말이 바로 잇따를 줄 알았다. 그러면 그냥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강한 상대를 만났고, 그리고 졌다. 그것이 분했기에 나는 다시 도전하고 싶다. 아빠가 싫어하는 길거리 싸움에 연루되었음을, 프로의 의식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빠에게 호되게 혼날 것도 알고 있었고, 무인으로서 프라이드가 높은 아빠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빠는 그런 날 잠시 동안 물끄러미 보았다. 곧장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긴 침묵이 흘렀다. 혹시 이유조차 듣기 싫었던 걸까. 불현듯 초조함이 들려 할 때 아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거절당한 건가.
그리 생각했다. 설마 이유조차 듣지 않고 까일 줄이야. 그렇지만 훈련을 하려면 아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허락을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며 자조 섞인 웃음을 그리던 중, 머리에 건조한 수건이 턱 얹어졌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아빠는 젖은 내 머리를 닦아 주고 있었다. 그러곤 덤덤히 말했다.
‘상처, 다 낫고 바로 체육관에 나오렴.’
그것은 승낙이었다. 아빠는 어떤 이유도, 변명도 듣지 않고 내 말을 들어준 거였다.
“왜 그러셨어요?”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나는 뒷말을 삼켜 내곤 말을 이었다.
“저 재능 있는 것도 아시잖아요.”
내가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아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부분과 교정할 부분을 트레이닝해 줄 뿐이었다. 그로써 나는 아빠가 오래전부터 내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가만히 있었어요. 아빠.”
“…….”
“또 제가 누구와 싸우려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아빠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딘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네 재능을 알고 있던 것도 맞고, 도대체 누가 널 자극했는지도 궁금하단다.”
“그럼 왜….”
“그런데 이나야. 가끔 사람 마음이란 게, 스스로도 알기 힘들 때가 있어.”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그런 날 물끄러미 보며 끊어졌던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네 재능을 보고 욕심을 내지 않은 게 아니야.”
어딘가 복잡한 시선이 내 얼굴이 닿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쩐지 내 욕심보단 네 마음이 우선이 되길 바랐어.”
나는 그 말에 눈을 천천히 크게 떴다. 그사이 아빠는 나와 시선을 맞추며 어딘가 아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만, 그러지 않으면 정말 후회를 할 것 같았거든.”
그냥 네 말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찬찬히 쓸었다.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이 이마를 훑어 내 까슬한 감촉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따뜻한 손임은 변치 않았다.
“내 말을….”
들어준다고.
나는 아빠의 말을 아연하게 되뇌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전 생에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달라.’
다르다. 이건… 다르다.
어디서부터 달랐던 걸까. 나의 시작은, 이 세계의 시작은 이전의 삶과 어디서부터 어긋났던 거지.
“나는… 난,”
시야가 일렁인다. 초점이 분리된 것처럼 어지러운 고통이 느껴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이 시작이었지. 지난 삶과 지금 삶의 차이가 뭐였지. 어째서 현재 나는 혼자가 아닌 거지. 수많은 번민이 머릿속으로 몰아쳤다.
이 세계에서 보았던 3년간의 기억이 뇌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정태이와의 해후, 체육 대회, 주연희의 왕따 사건, 수많은 인연과 조우한 입학식, 도방중 아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경찰서에서 반휘혈과의 만남.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연결 고리를 가져다준 건 누구였더라.
“아.”
결정적인 차이. 이전 삶과의 명확한 차별점이 하나 있었다.
‘…누나!’
이 세계에서 오고 처음 마주했던 사람. 서이수였다. 나는 머리를 관통한 깨달음에 눈을 떴다. 그래, 맞다. 서이수는 내 동생이, 아니, 다른 세계에서의 내겐 동생이 없었다. 서이수는 이곳에서 생긴 이 세계의 서이나의 동생이었다.
이미 처음부터, 이 세계는 달랐던 거다.
여기에서의 삶은 지난 삶과 다르다. 아빠의 관점도 달라졌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든 것이 전부 달라졌다.
나는 문득 시야가 선명해졌음을 느꼈다. 천장을 밝히는 조명이 오늘따라 더 환히 비춰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무언가 잘못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 생각과 동시에 속이 술렁였다. 무언가 안쪽에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강하게 감았다.
울렁거려. 어지러워.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감정이, 머리가 그것을 인지했다. 나는 그 사실을 깨우치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굳게 감긴 눈꺼풀이 찬찬히 떴다.
‘만일, 이 삶이 지난 삶과 다르다면,’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바라볼 삶의 방향 또한 달라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시 뜬 눈 사이로 내다본 시야는 환하게 탁 트인 길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