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인소의 사건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4)
그때 눈앞에 있던 이가 중후한 목소리를 내며 침착히 입을 열었다.
“…김율.”
서이수는 얼굴을 굳히며 그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나름 변장한다고 가발도 썼는데 소용이 없나 봅니다. 안타깝군요.”
그는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슬쩍 비비며, 안타깝다는 말치곤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음성을 흘렸다.
서이수는 그 발언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저 얼굴을 모르는가. 머리 색이 달라졌다고 쉬이 몰라볼 얼굴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생김새의 이목구비 뚜렷한 미남에 커다란 풍채. 그리고 머리 색만 다를 뿐 그의 아이덴티티나 마찬가지인 목부터 발끝까지 전부 감싼 차림새는 이 더운 날씨에 흔히 볼 차림이 아니었다.
“…네가 여긴 무슨 볼일이야. 왜 아직도 부산으로 안 꺼진 건데. 설마 정태우도 여기 있어?”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 그가 왜 제 앞에 나타났냐는 문제다. 정태우가 서이나에게 볼일이 있던 것도 한 달 전에 끝난 일 아니던가. 서열 1위면 1위답게 얌전히 고고히 그 자리에 앉아 리벤지를 할 때를 기다릴 것이지, 왜 또 나타난 건가.
무엇보다 그의 말이 가장 이상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나 서이수는 자신의 이름이 그리 유명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서열 오짱이란 위치는 굉장히 어중간하고 돋보일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온갖 무시는 다 당했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건만 김율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했다. 그 사실이 서이수로 하여금 짙은 위화감을 가져다주었다.
‘…불길해.’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무언가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만 같았다. 서이수는 주연희의 팔을 꽉 붙잡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나 김율은 그런 그를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유리 같은 회색의 눈동자로 그를 보며 덤덤히 말했다.
“무언가 착각을 하시고 계시는군요. 제가 여기 있는 것은 그분에게 용건이 있음이 아닙니다.”
그러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여상히 입에 담았다.
“전 당신과 그쪽에 있는 여성분을 데려가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
서이수와 주연희는 눈을 크게 뜨며 반사적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의 목적이 저희들 모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주춤거리고 있자 뒤에서 헐레벌떡 다가오는 무리가 들려왔다.
“헉, 허억. 이 새끼들. 이제 둘 다 뒈졌어, 씨발.”
…젠장. 앞도 뒤도 다 막혀 버렸다. 서이수는 더 물러서지 못하고 발을 멈추었다. 어쩌지. 자신의 실력으론 강태석이면 몰라도 김율의 상대가 안 될 터였다.
‘그래도….’
힐끗, 서이수는 옆에 선 주연희를 보았다. 겁에 질린 듯 낯을 창백히 굳힌 그녀의 모습에 서이수는 눈썹을 모으며 의지를 다잡았다.
‘얘라도 체육관에 가게 하면….’
그렇게 되면 주연희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과 동시에 이 상황이 누나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면, 아주 잠시면 돼.’
틈을 내주는 아주 잠깐의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서이수는 김율을 경계하며 그가 허점을 내보이길 바랐다. 주연희가 이 자리를 벗어날 정도의 발목만 잡으면 충분했다. 서이수는 앞과 뒤를 한껏 경계하며 주연희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런 도중, 서이수와 주연희를 물끄러미 보던 김율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뒤에 있던 강태석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여성분은 당신들이 잡기로 예정했을 테지요.”
“그, 그건…!”
갑작스러운 지적에 강태석의 일행 중 한 명이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 김율은 낮게 숨을 내쉬며 무감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실망스럽군요.”
싸늘한 압박이 공기를 지배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으나 커다란 체구와 낮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위압은 컸다. 덩치로는 쉽게 밀리지 않는 강태석도 움찔거릴 정도였다.
190cm는 되는 걸까. 서이수는 장대한 키와 슈트로도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골격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꽤나 키가 큰 축에 속한 편이기도 하고 실제로 몇 센티미터 차이는 나지 않겠지만 어딘가 바라보기만 해도 위축이 드는 이였다.
‘강한 놈들은 다 이런 분위기인가.’
몸에서 배어 나오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다. 반휘혈이나 최강혁, 그리고 늘 웃고 다니지만 고찬영도 그렇고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백설 정도인가. 하지만 그에게도 한순간에 보이는 임팩트가 있어서인지 그리 평범하진 않았던 것도 같다. 아, 이건 누나도 이 부분은 비슷하려나.
“하, 이런 연약한 여자애 하나를 상대로 이렇게 우르르 달려들다니, 다들 미쳤구만? 존나 한심하다, 진짜.”
하지만 그렇다고 쫄았다는 걸 티 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겁을 먹고 움츠러들면 정말 끝이었다. 이들의 손에 끌려가서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냥 일진들도 아니고 조폭이다. 그 이후에 있을 일은 상상도 되지 않았고 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되레 도발하듯 빈정거렸다.
“흠. 맞는 말입니다.”
하나 서이수의 빈정거림에도 김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상상 이상으로 무능한 이들이 있어서 말이지요.”
울컥. 뒤편에 있던 깡패들이 김율의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나 강태석의 낯이 좋지 않았고 이내 그가 얼굴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야, 고삐리. 작작 해라. 너 이 새끼 줄 잘 타서 존나 기어오르는 모양인데, 뒤지고 싶냐?”
살벌한 으름장이었으나 김율은 여전히 무감한 낯으로 대꾸했다.
“왜 그리 화가 나셨는지요. 전 그저 여러분의 무능함에 감탄을 했을 뿐, 별다른 사감은 없습니다.”
……? 있는 거 같은데. 서이수와 주연희는 직설적인 앞담에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 그, 근데 저 사람 고등학생이었어…?”
그런 와중에 주연희는 뒤늦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고등학생임을 알게 되어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적어도 20대 중반일 거라 여겼는데, 고등학생이라니. 당혹스러운 마음에 동공이 흔들렸다.
“그야 당연히… 야, 잠깐. 너 김율 몰라?”
“? 모르는데.”
“…….”
이번엔 그가 기함할 차례였다. 어떻게 이렇게 절망적인 정보력을 가질 수 있을 수가. 아니, 전부터 그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쪽에 그리 관심이 없던 서이나도 알 법한 정보를 모른다니. 오죽하면 학생들 사이에선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게 사대천왕이라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모르려면 도대체 얼마나 무관심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너는… 세상에 좀 관심을 가져라.”
어쩐지 할 말이 많아진 기분이었지만 내리누르며 서이수는 깊은 충고를 했다. 하나 주연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만 연신 갸웃거렸다.
“하, 들었냐, 개새끼? 하기야 도련님 밑에서 병풍같이 서 있는 것밖에 안 하는 새낀데 남들이 알아주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져선 씨발.”
카악, 퉤! 강태석이 도발하듯 침을 바닥에 뱉었다.
‘아니, 얜 그냥 다 모르는 건데.’
딱히 김율만 모르는 게 아닐 거다. 혹시 고찬영이 전 사대천왕이라거나 최강혁이 현 사대천왕 중 한 명이란 건 알까 모르겠다. 왠지 모를 것 같다는 게 더 두려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흠. 틀린 말이 아니군요.”
남들 눈에 그렇게도 보이겠네요. 김율은 대놓고 하는 악담에도 그리 타격이 없는지 틀린 말이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강태석이 더 열이 뻗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나 놀리냐?!”
“놀린 적 없습니다만. 사실대로 말한 걸로 흥분하다니, 인격마저 유감인 모양입니다.”
“저 씨발 새끼가 진짜-!!!”
“왜 흥분하는 거죠.”
진심으로 모르겠는 건지 알면서 놀리는 건지 모를 의미 없는 공방전이 이어 갔다. 서이수와 주연희는 그 황당한 광경에 잠시간 얼이 빠져 버렸다.
핫. 그러다 현 상황을 다시 상기하며 정신을 차린 서이수는 지금이 도망칠 적기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주연희의 팔을 성급히 끌며 발을 박찼다.
“어?!”
“앗!”
뒤에서 깜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당겨진 주연희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김율이 한눈을 판 사이 그 곁을 돌파하려는데,
“-!!”
머리 위로 순식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순간, 모든 순간이 느릿하게 보이며 그의 눈이 위를 향했다.
“-그렇군요.”
빛이 바랜 듯한 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무감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조커의 동생. 나쁘지 않은 몸놀림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빡-!
경추에 강한 타격이 전해지고 서이수의 시선이 한순간에 점멸됐다.
아, 망했다.
꺼져 가는 시야 속에서 서이수는 저 골목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털썩, 힘을 잃은 육체가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주연희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두 손으로 감싸며 주춤주춤 그에게서 물러섰다. 두려움에 잔뜩 질려 물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는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김율은 쓰러진 서이수에게 시선을 한번 준 후 그녀를 돌아봤다.
“주연희 양. 얌전히 따라오시겠습니까.”
심장이 서늘해지는 마지막 경고가 전해졌고, 주연희는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김율은 반항할 의지를 모두 상실한 주연희의 모습을 잠시 본 뒤, 쓰러진 서이수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러곤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앞을 향하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의 낯을 발견했다.
“아.”
김율은 그들의 낯을 무심히 바라보다 돌연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그들을 지나치며 고저 없이 말했다.
“당신들의 귀책사유에 대한 문책은 추후에 하도록 하지요.”
터벅, 터벅. 구두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김율은 떠나갔다. 강태석은 벙찌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얼굴을 확 구기더니 곁에 있던 동료의 머리를 내려치며 윽박을 질렀다.
“뭘 멍청히 서 있어, 새꺄! 저 여자애나 끌고 와!”
뒤늦게 화풀이하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주연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주연희의 팔이 강압적으로 잡히며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고, 주연희는 어딘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앞서가는 김율의 어깨에 축 처져 있는 서이수를 멍하니 보았다.
“…….”
그녀는 자비 없는 힘 앞에 무력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