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79화 (279/306)

279. 히로인, 대위기! (3)

오싹-.

주연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천사가 아니었다. 천사의 얼굴을 가장한 악마였다. 자신과 서이수를 이곳으로 끌고 오게 한 주범은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임을 방금의 말로서 깨달았다.

‘왜?’

일면식도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여성은 이런 짓을 꾸민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녀는 질문도 던지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호오. 내가 때리는 것만으론 성의 안 찬다, 뭐 이 말이가.”

정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주먹질 하나는 나름 이름 좀 날린다 싶었는데- 눈이 더럽게 높구만, 공주 나으리.”

훗. 백장미는 그 말에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그러곤 애처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곤 미소를 유지한 채 정태우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짚었다.

“순진한 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순진한 건가.”

백장미는 살짝 뒷발을 들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싸움만 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정태이 양.”

“…….”

싸늘한 시선이 백장미를 내려다봤다. 백장미는 지지 않고 마주하며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정태우, 아니 정태이는 어째서 이 상황에 개입된 걸까. 왜 백장미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건가. 그것은 약 한 달 전의 일이었다.

***

“뭐? 누가 찾아왔다고?”

“백화 재단의 아가씨가 찾아왔습니다.”

사무실 사장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채 책상에 발을 올리며 까닥이고 있던 정태이는 눈썹을 휘었다.

“금마가 내 여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지차용 이사의 연줄이니 찾아보려면 금방 알 수 있겠죠.”

“흠, 그건 그래.”

정태이는 김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 사무실을 점거한 지 며칠이나 됐고, 이곳은 지차용 똘마니들의 사무실이었으니 말이다.

이왕 서울에 온 김에 그냥 가긴 심심해서 이 일대의 깡패들을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며칠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러면서 지차용을 골려 주기 위해 사무소를 일부러 장악하고 있던 와중에 난데없는 손님이 방문했다.

“내 없다 하지 그랬냐. 난 그 아 존나 보기 싫은데.”

“그래도 나중엔 보셔야 할 인물입니다. 너무 척을 지진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냉혹한 현실을 지적하는 김율의 말에 정태이는 얼굴을 구기며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아-아. 존나 싫다-.”

정태이는 몸을 뒤로 쭈욱 넘기며 상대하기 싫다는 태도를 여과 없이 보였다.

“내 대신 상대할 김율 구한데이-,”

“도련님.”

“니 그런 거 잘하잖아. 말로 사람 골 때리게 하는 거.”

“전 누군가를 놀린 적이 없습니다만.”

“그래, 그런 점. 그게 사람 존나 빡치게 만들어.”

“이해하기 힘들군요.”

김율의 시선이 점차 가늘어졌다. 그에 정태이는 뚱하니 입매를 구기더니 이내 대충 손을 휘저으며 성가시단 어투로 툭, 내뱉었다.

“마, 됐다. 불러라, 불러. 후딱 끝내 버리자.”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지시에 김율은 자리를 벗어났다. 곧 그는 백장미와 함께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어- 공주 나으리.”

정태이는 까딱 손을 들며 성의 없이 인사했다. 책상에서 발도 내리지 않은 시건방진 태도에 백장미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손님이 왔는데 여전히 무례하군요.”

“새삼스럽게시리.”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자 백장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나 그것은 찰나였고 그녀는 성큼 정태이에게 다가갔다.

“뭐, 됐습니다. 피차 얼굴 오래 보고 싶지도 않을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정태이는 그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난번에도 일방적인 용무만 보고 사라진 그녀였다. 그것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기색 없이 조커의 정보가 담긴 서류 봉투만 던지고 갔던 터라 영 마뜩잖았다. 이번엔 대체 무슨 꿍꿍이지. 정태이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제가 최근에 아주 재밌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녀의 불길한 감은 들어맞았다.

“정태이 양?”

“!”

정태이와 김율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둘 다 그리 크지 않은 변화였지만 싸늘한 정적이 그 뜻을 반증했다.

“설마 오빠분이랑 이름을 바꾸며 생활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네요.”

피식, 백장미의 입꼬리가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남자로서의 생활은 어떻게, 만족스러우셨나요?”

“니 아까부터 무슨 개소릴 지껄이나.”

백장미의 이죽거림에 정태이는 싸늘히 말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대번에 기죽을 압박이 흘렀으나 백장미는 오히려 반갑다는 듯 조소를 더 깊게 그렸다. 그러곤 품 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

책상 위에 사진들이 산란히 던져졌다. 그 사진의 내용물을 확인한 정태이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그것은 정태이가 도방 고등학교의 체육 대회 날, 가발을 쓰고 돌아다닌 사진과 그 상태로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 그리고 현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환복하고 도로 나오는 사진이었다.

‘뒤가 밟혔다고? …아니, 그럴 리가.’

그런 낌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제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제 곁엔 상시 김율이 있었다. 그가 이런 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정태이는 다시 사진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체육 대회는 몰라도 호텔에서 찍힌 것은 화질이나 각도로 보건대 호텔의 CCTV를 캡처한 걸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화질이 학교 내에서 찍힌 것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럼 내 뒤를 파 본 건가.’

그렇다면 앞뒤가 맞았다. 이 여자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다닌 게 아니라 그저 관망한 거였다. 그렇다면 왜인가. 왜 뜬금없이 자신의 뒤를 캔 건가.

마치 약점을 잡아 제 손안에서 휘두르려는 것처럼.

“아니면, 정태우란 인간은 여장이 취미인 걸까요? 그것도 재밌겠네.”

비웃는 듯한 그녀의 몸짓에 정태이는 지지 않고 가소롭단 듯 웃었다.

“하, 있다면 우짤 낀데.”

파지직-!!!

살벌한 스파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화려하게 튀었다. 어느 누구도 양보할 기세가 없는 눈싸움으로 인해 방 안엔 숨 막히는 공기가 오갔다.

“…그래요. 물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설마 그 정태우가 여장이란 취미가 있을 줄이야, 하면서 말이죠.”

하나 그 공기는 백장미가 한 수 물러나면서 잠시 와해됐다. 백장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녹음기 하나를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런데 두고두고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잖아요? 그런 낌새 따윈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아, 아가씨? 푸하하! 그까짓 게 후계자가 된답시고 깝쳐도 그리 될 것 같나! 지가 사내아처럼 굴어도 계집년이란 건 변하지 않제. 어쩌겠나. 계집으로 태어난 걸 원망해야지. 그게 지 팔자 아이가.]

재생된 녹음기에선 불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사 좀 해 봤죠.”

뚝. 기다란 손톱이 정지를 눌렀다. 그러곤 입매를 양쪽으로 길게 그리며 눈을 접었다.

“이건 어떻죠, 아가씨?”

뚜두둑. 정태이의 주먹에서 서슬 퍼런 뼈 소리가 울렸다.

‘지차용, 이 호로 잡놈의 새끼가.’

그녀의 어금니가 빠득 갈리며 이마에 핏대가 불거졌다. 고주망태가 다름없는 목소리. 술에 잔뜩 전 소리로 보아 간부 사이에서나 오갈 이야기들을 얼마나 주절거렸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분명 저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뒷목이 뻐근하게 당겨 왔다.

대다수의 간부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나 지차용 그 새끼는 독보적이었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모살하려 들고 함정을 파 싸움에서 지게 만들려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놈은 10에 2할 정도라면, 지차용 이 떨거지 새끼는 10에 8할은 차지할 정도로 집요한 쓰레기였다. 백화 재단과 손을 잡으면서 기세등등해지는가 싶었는데 이런 개소리마저 뒤에서 오갔다니. 제삼자에게까지 제 비밀을 떠벌릴 정도면 얼마나 많은 정보가 누설되었을까. 이딴 새끼도 간부랍시고 둔 아비를 병신이라고 직접 욕을 싸질러 줘야 할 지경이었다.

‘젠장.’

앞으로 반년이었다. 반년만 더 버티면 조직은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 여자의 손에 조직이 휘둘리게 만들어선 안 되었다. 당장은 그 조짐이 보이지 않더라도 눈앞에 있는 여자는 독뱀 같은 이였다. 방심을 해선 안 되었다. 정태이는 싸늘하게 시선을 가라앉히곤 다리를 책상에서 내렸다. 그러곤 책상을 빙 돌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볼일이 뭐지.”

용건을 묻는 그의 태도에 백장미는 마음에 든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흩뿌렸다. 하나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그녀의 낯에 어렸던 미소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내 손과 발이 돼, 정태이.”

말투도 표정도 바뀌었다. 진심을 내포한 백장미의 태도에 정태이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공짜로 말하진 않아. 조건은 내가 너의 뒷배가 되어 주는 것, 어때.”

맹수를 갖기 위해선 조련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먹이는 필수였다.

“어째서 나지.”

움직이려면 뒷배라곤 제 몸뚱어리와 저기 멍청히 서 있는 김율, 그리고 이빨 빠진 아비와 극소수의 간부뿐. 차라리 다른 간부진을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란 걸 그녀도 가장 잘 알 터였다.

“귀찮은 새끼가 엮였거든.”

한도훈의 눈을 속여야 한다. 안 그래도 체육 대회 사고의 주동자를 찾는 낌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미 그 자식은 자신이 범인임을 알고 있었고, 지난 왕따 가해자 사건으로 인해 지차용과 그 외의 간부진이 자신과 엮여 있음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그쪽을 움직이는 건 피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난 오히려 네가 여자여서 마음에 들어.”

백장미는 히죽 웃으며 정태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장이라도 하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그녀의 손끝이 세워지고 백장미는 손가락을 그대로 어깨에 짚은 채 춤을 추듯 사뿐한 걸음으로 빙 돌았다.

“네가 남장을 한 이유는-,”

슥, 어깨를 짚던 손가락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 누구도 여자라고 무시하지 못하게-,”

툭, 툭. 백장미의 손이 대견하단 것처럼 가벼운 두드림을 선사했다.

“-철저히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니야?”

후훗. 그녀는 기특하단 것처럼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뒷짐을 지곤 우아한 발걸음으로 살짝 떨어지더니 눈을 휘며 정태이를 돌아봤다.

“난 그 발버둥, 싫지 않아.”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 정태이.”

백장미가 손을 내밀었다. 정태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그 손을 쳐 냈다.

짝-. 가벼운 마찰음에 백장미의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니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협박부터 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는가.

“하지만, 덜미가 잡힌 것도 맞으니 존나 사람 귀찮게 만들고 자빠졌지.”

그러니 마음에 들진 않을지라도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정태이는 성가시게 되었단 것처럼 머리를 헝클이더니 코웃음을 잘게 흘리며 책상에 툭, 기대며 말했다.

“말해 봐라. 내가 뭘 해야 되는지.”

아, 그러고선 정태이는 막 떠오른 것처럼 탄성을 덧붙였다.

“내한테 힘 충분히 실어 준다 캤나?”

우드득-. 그가 짚고 있던 두터운 마호가니 책상의 한편이 바스러졌고, 그녀의 얼굴엔 사나운 미소가 덧그려졌다.

“시마이되는 날엔 그 예쁜 얼굴 평생 못 들고 다닐 줄 알아라.”

그 으름장에 백장미의 입가엔 다시금 냉소가 만족스럽게 덧그려졌다. 그러곤 그녀는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할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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