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히로인, 대위기! (4)
*이번 회차의 일부 문장에서 추행과 관련한 묘사가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
“네가 할 일은 이 둘을 철저히 망가트리는 거였지.”
한 달 전 통보했던 내용이 현재 백장미의 입에서 다시 이어졌다. 그 말에 주연희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망가트린다고? 우리를?
“왜…?”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작은 소리였으나 백장미는 그 소리를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점점 일그러져 가는 주연희의 얼굴이 보였다.
“왜, 왜,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납득하기 힘든 부조리에 주연희가 절박히 외쳤다. 반면 백장미는 그에 반가운 말을 들은 것처럼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야- 거슬리니까요?”
“뭐?”
만개한 꽃처럼 당장이라도 매혹적인 향기를 뿌릴 것 같은 외모와 달리 그 입에서 나온 건 날카로운 가시였다.
“자꾸만 어슬렁어슬렁 눈앞에 벌레가 날아다니는데… 짓눌러 죽이든 쫓아내든 해야 하지 않겠어요?”
후훗. 선율처럼 아름다운 그 웃음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주연희는 낯을 창백하게 굳히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아아- 걱정은 마세요.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저도 그렇게 냉혹한 사람은 못 된답니다.”
백장미는 두려움에 떨며 물러나는 주연희의 앞으로 다가가 안심하란 듯 말했다. 그러곤 그녀의 턱을 슬며시 붙잡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사람 구실은 할 수 있을진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이 질문의 답을 들어선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당신이 안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자, 준비하세요.”
짝-. 청아한 박수 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남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징그러운 미소를 단 채 주연희의 몸을 훑었다.
“이거 참, 우리도 일이라 어쩔 수 없어.”
“그래, 윗사람이 시켜서인걸.”
“휘익-. 근데 진짜 고등학생 맞아? 요즘 학생들 몸매 죽이는데? 킥킥. 오빠가 좋은 거 알려 줄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는 것만 같았다. 주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물리다가 그들 중 한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음을 발견했다.
“어, 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당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그녀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반사적으로 도움 상대를 찾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녀의 눈에 밟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태우란 이였다.
“…….”
하나 정태우는 그녀를 외면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그녀는 정말 자신이 도망갈 곳 하나 없음을 깨달았다.
철컥.
“보자-, 어디부터 좋으려나.”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며 히죽 웃은 채 다가왔다. 주연희는 몸을 벌벌 떨며 연신 고개만 저었다. 그에 남자의 얼굴에 즐거움이 드리워지며 그녀의 몸에 닿던 찰나,
퍽-!!!
“억-!!”
그의 몸이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뒤엉키며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이, 씨발. 대체 뭔…!”
쾅-!!
“악-!!!”
“크윽…!”
남자는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이마에 둔탁한 통증이 연이어 찾아왔다. 그가 이마를 붙잡고 나뒹굴었고 그 이마에 머리를 박은 이도 같이 신음을 흘렸다. 그 광경을 마주한 주연희는 눈물을 왈칵 고였다.
“이, 이수야…!”
그녀를 구한 건 서이수였다. 딱 보기에도 만신창이인 몸이었다. 게다가 묶여서 거동도 힘들 터인데 그는 제 몸을 날려서 어떻게든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주연희는 이유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터져 나오며 그를 불렀다. 서이수는 입 안에 고인 침과 피를 주륵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얘 건들, 지 마. 나… 아직 안 쓰러졌, 어.”
하아, 하아. 그의 입에서 버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방금의 박치기로 인해 까진 이마에선 피까지 흘러나와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서이수는 어떻게든 눈을 뜨며 주연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머- 보기보다 훌륭한 기사님이네. 그렇지 않아?”
“…….”
백장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하나 정태이는 그저 눈을 가늘게만 뜰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약속, 지, 켜.”
그런 정태이의 눈을 서이수가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라고. 정태이는 그 말에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니…,”
“약속?”
그러나 정태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백장미가 그 사이에 끼어들며 의아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했나 보지?”
백장미의 시선이 일순 정태이에게 향했다. 정태이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도 서이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에서 대략의 상황을 파악한 백장미는 피식,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무슨 약속인진 몰라도 내가 더 망가트리고 싶은 건,”
툭, 그녀의 손이 서이수의 볼에 가볍게 닿았다.
“그쪽이거든.”
“…뭐?”
서이수는 그 말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소리에 당황한 건 그뿐만이 아닌지 뒤에 있던 조폭들도 수군거렸다.
“어, 뭐야. 저 새끼도 하는 거야?”
“난 남자는 좀….”
“야, 근데 얼굴 자세히 보니 꽤 봐 줄 만한 것 같,”
“닥치세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짜증 나는 소음에 백장미가 서슬 퍼렇게 경고했다. 그에 남자들은 입을 다물자 백장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일변하며 그의 볼을 툭툭 두드렸다.
“조폭이랑 한 약속을 믿었어요? 가여워라-.”
서이수의 시선이 정태우에게 향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그는 서이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고요히 서이수를 보고 있었다.
“…크읏.”
젠장! 서이수는 이를 악물며 시선을 돌려 제 뺨에 닿은 백장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누나랑 내 친구들이 올 거야. 분명 구하러 올 거라고…!”
한도훈이라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가 못 찾을 리 없었다.
“그거 참 재밌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의 말에 오히려 백장미는 아주 즐겁다는 것처럼 환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거야말로 제가 아주 바라던 바거든요.”
“!”
그 말에 서이수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
짝-!
그의 얼굴이 강한 파열음과 함께 돌아갔다. 고개를 다시 돌리고 보자 백장미는 때린 손을 든 채 못마땅하단 듯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어요.”
서이수는 그 말에 싸늘히 그녀를 노려봤다. 그는 이를 악물며 짓씹듯 말했다.
“웃기지, 마. 우리 누나라면 이딴 놈들 금방 처리할 수 있어.”
서이수는 턱짓을 하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강태석과 다른 깡패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백장미는 아주 우스운 걸 들었단 것처럼 쿡쿡 웃었다.
“어머, 설마 이거뿐이겠어요?”
그녀는 픽, 웃으며 아주 즐겁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현재 배치해 둔 인력만 해도 50명은 거뜬히 넘죠. 그런데 한도훈 그 또라이는 굉장히 신중한 녀석이라 경찰이나 자신의 경호들을 움직이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을걸?”
50명. 어딘가 막막한 숫자에 서이수는 멈칫했다. 하나 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그래 봤자 우리 누나랑 걔네들이면 50명 정도는 껌이거든!”
50명 정도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고 뚫을 수 있다. 만약 오더라도 제 누나 혼자만 올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시간을 벌면…!
“그래, 설령 뚫는다고 해도… 여기 창고가 몇 개인 줄 알아?”
멈칫, 서이수는 생각지 못한 것을 들은 것처럼 몸을 굳혔다.
“총 열일곱 개야.”
“……!!!”
절망적인 숫자에 서이수와 주연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가령 저 수의 무리를 뚫고 와도… 이 많은 창고 중 어떤 창고일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 저 문도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서 웬만한 힘으론 꿈쩍도 하지 않아. 부수고 싶어도 중장비 기계는 끌고 와야 하지.”
백장미는 아주 즐겁다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서이수는 아연해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것이 백장미는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깊게 그렸다.
“아, 참. 내가 깜빡했네?”
그러곤 막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능청스럽게 입을 벌렸다.
“백설이란 이름, 혹시 알아?”
“?!”
…백설? 주연희는 낯선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백장미의 여유 있는 그 태도와 눈에 띄게 굳어 버린 서이수의 낯을 보곤 그 이름이 굉장히 위험한 인물임을 눈치챘다. 백장미는 창백히 굳은 서이수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가증스럽게 말했다.
“설마 내가 이번에 고용한 게 정태우랑 김율, 두 사람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럼 정말 안타깝네.”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가면 이런 험한 세상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아, 그래서 이런 꼴을 당한 거려나?
백장미는 그를 조롱했다. 하나 서이수는 그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수야, 그, 그게 누군데 그래….”
제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줘. 절박한 물음이었으나, 대답은 절망적이기 짝이 없었다.
“……사대천왕.”
“…뭐.”
사대천왕. 그것을 말하는 서이수는 심정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인력 배치만 총 50명 이상에, 더불어 사대천왕 세 명. 그리고 설령 그 수를 뚫을지라도 열일곱 개의 창고 중 하나만이 자신들이 있는 장소. 분명 이곳이 찾기 쉬운 장소일 리 없었다.
‘설마….’
서이수는 깨달았다. 백장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무너지고 망가진 꼴을 서이나가 목격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와 같이 무너지기를. 그게 정말로 눈앞에 있는 이 악마가 바라는 일임을.
“그래, 그거야.”
백장미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제 턱에 손등을 가볍게 대었다.
“너희들에겐 희망 따윈 없다는 거, 이제 알겠어?”
그녀의 기다란 손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 신호에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기를 울렸다. 칼날이 번쩍이며 그것을 든 무리들이 그들에게 사신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백장미는 그들에게 맡기듯 몸을 돌리며 정태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영상을 다 찍고 나면… 아, 그래. 그땐 팔다리를 부러트려 볼까? 그런 건 잘할 수 있지? 정태…,”
…아아아-!!!
그때였다. 그들의 귓가에 이상한 소음이 잡힌 것은.
“…방금, 무슨 소리…”
부아아앙--!!!!!
난데없는 소음에 백장미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 소리는 줄어들긴커녕 점차 그 소리를 과시하듯 커져만 갔다.
…이, 소리는?
“뭐, 뭐야?!”
백장미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그리고…,
와장창-!!!!!!!
벽의 유리가 박살이 나며 오토바이 한 대가 허공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
“!!!!”
“!”
모두의 시선이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졌다. 유리 조각이 산란히 흩어지고 태양을 등진 채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그 광경은 서이수의 망막에 하나 하나 아로새겨졌다.
쾅-!!! 끼이이이익--!!!!!
오토바이가 한 번 바닥을 강하게 튕기며 그것을 제어하듯 핸들을 돌려 바닥에 강한 마찰이 생겼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기울인 오토바이는 이내 속도가 줄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몸체가 일으켜지면서 바닥을 짚는 발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헬멧을 쓴 2인조. 저것은 대체 누구인가. 하나 서이수의 심장은 이 순간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뒤에 앉아 있던 이가 앞에 앉아 있던 이의 몸을 손에서 서서히 떼어 냈다. 그리고 그 정체에 서이수의 눈이 커졌다.
“……!!”
그의 입이 쩍 벌어지며 그의 시야는 한순간에 아롱거렸다. 모든 것이 일그러질 때 그 속에 홀로 선명히 남아 있던 잔상이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외쳤다.
“이수야-!!!”
누군가 제게 말했었다. 자신의 위기에선 분명 누군가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그것은 분명-,
“누나-!!!!”
히어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