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패왕 VS 조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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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누군지 모를 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새끼 잃은 어미 곰을 마주한 것같이 숨 막히는 공기가 창고 전체를 압도했다. 잔뜩 벌게진 눈. 그리고 선명히 드러난 핏대. 고요했지만 날카로웠다. 잔잔한 듯하지만 거칠었다. 맹수의 숨겨진 발톱이 드러나 당장이라도 자신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위협이 공간을 장악했다.
“…….”
백장미는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자칫 잘못 움직이면 바로 끝이라고.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인물에 대한 위험성을 그녀의 이성이 빠르게 경고하고 있었다. 닿지는 않았지만 볼 끝이 저릿했다. 힐끗 뒤를 보자 벽 한쪽에 헬멧이 깊게 박혀 있었다. 현대 예술로도 저렇게 만들기 힘들겠지. 백장미는 생각 이상으로 가공할 눈앞의 저력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중 돌연 박장대소가 커다란 창고의 내부를 시원하게 울리었다.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 중심에 향하자 거기엔 이마를 붙잡고 머리를 젖히며 유쾌한 웃음을 크게 그리고 있는 정태이가 있었다.
“이거 참 골 때리는 자슥 아이가!”
그녀는 웃음을 흘리며 터벅터벅 발을 움직였다.
“이야아-, 니 정말 이름값 지대로 하지 않나. 정말 종잡을 수 없다, 없어.”
짝, 짝-. 느릿하지만 묵직한 박수 소리가 그녀의 손에서 울렸다. 그러곤 깨진 창과 헬멧이 박힌 벽을 차례대로 바라보곤 히죽, 웃었다.
“그런데 말이다-.”
정태이가 슬며시 허리를 숙였다. 그에 반사적으로 서이나의 손이 살짝 움찔거렸다. 하나 정태이의 손에 잡힌 것을 보고 그녀의 눈이 더 싸늘히 가라앉았다.
“맞힐 거면 겁을 줄 게 아니라….”
휘릭-!
“이래 단디 노려야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잭나이프의 예리한 끝이 서이수를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첨예한 칼의 말미가 서이수의 눈을 찌를 듯 가까이 있었다. 서이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눈도 쉬이 깜빡이지 못하고 굳었다. 그에 어디선가 빠득, 이가 강하게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정태이는 백장미에서 자신으로 옮겨 오는 살의에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단순하군. 하지만 그만큼 위협적이다. 제가 아닌 타인을 향한 살기는 어디로 튈지 추측하기 어렵다. 반면 서이나는 역시 이런 곳엔 발을 많이 담아 보질 않아서 그런지 그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 참으로 올곧았다.
분노에 잡아먹혀도 그 성정은 참 순수하기 짝이 없군.
정태이는 가벼이 손을 굴려 잭나이프를 옆으로 바로 잡았다. 그리고 그 칼끝을 서이수의 목에 향하게 만들었다.
“!”
그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정태이는 그 반응을 하나하나 예리한 눈으로 살피며 발을 움직였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강압적인 경고에 서이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날카롭게 선 눈이 정태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정태이는 그 시선을 비웃듯 맞받아치며 서이수의 등 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풀썩 주저앉아 서이수의 머리를 잡아채 목을 겨눈 칼끝을 똑바로 했다.
“읏…!”
“!”
번뜩이는 칼끝이 서이수의 목을 얕게 파고들었다. 진심으로 찌를 것같이 닿아 오는 그것에 서이수는 신음을 내뱉었고, 서이나는 눈을 부릅떴다.
“눈 풀어라. 내 실수로 찌르면 우짤라고 그러나.”
그에 히죽, 정태이가 잔인한 비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장난처럼 구는 모습에서 그녀가 진심으로 죽일 수도 있을 거란 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느꼈다.
쿵, 쿵, 쿵-.
까딱 잘못하면 서이수가 죽는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에 서이나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려 하자 정태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만족스레 피식, 웃었다.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런데 가장 먼저 그런 정태이에게 반응한 건 놀랍게도 백장미였다.
“흐음?”
“난 죽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텐데!”
정태이가 난데없는 외침에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자 그에 백장미가 버럭 화를 냈다. 게다가 그 내용도 예상치 못하였기에 정태이는 이상한 걸 들은 것마냥 낯을 살풋 구겼다.
“당장 그 칼 내려놔.”
백장미는 한 음절, 한 음절 똑바로 입을 열었다. 거절은 없다는 것 같은 위압적인 자세에 정태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망가트려도 되는데 죽이는 건 안 된다, 라.
“…니, 너무 이상한 데서 무른 거 아이가.”
어이가 없어서 황당하게 쳐다보자 백장미의 낯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지 이를 악물며 조용히 정태이를 노려봤다. 이에 정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잭나이프의 칼을 접고 주머니에 넣었다.
“예, 예~. 공주 나으리 말 들어야죠~”
이래서 온실 속 화초란 것들은…. 정태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 그라믄 우짤 수 없지.”
정태이는 하나의 패가 사라졌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도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저 앞에 있는 맹수에게 일말의 이성을 찾아오게 할 장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그녀는 히죽, 웃으며 서이수에게 붙었다. 그리고 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뭐, 좋은 누나 아이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
“어? …크읏?!!”
콰당-! 서이수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당황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이내 눈을 똑바로 뜬 채 정태이를 올려다봤다. 그것은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아니면 종잡을 수 없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그러한 눈빛이었다. 정태이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주고는 터벅터벅 앞으로 향했다.
“율.”
“네.”
정태이가 김율을 불렀다. 김율이 즉각 화답하자 정태이는 차분한 어조로 담담히 말했다.
“지켜라.”
“알겠습니다.”
그는 가슴에 한 손을 얹으며 배웅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정태이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눈앞에 있는 이를 똑바로 보았다.
터벅터벅. 적막한 내부에서 단 하나의 발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
“…….”
말없이 시선이 서로를 오갔다. 기실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눈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예리한 기색이 1초의 틈도 없이 서로의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탁-. 정태이가 무리에서 떨어졌다. 홀로 중앙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태는 고고하고도 강인하게 닿아 왔다. 정태이는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날카로운 미소를 덧그렸다.
“여, 오랜만이네.”
“…….”
그녀의 인사에 서이나는 침묵했다. 정태이는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뭐,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내도 이래 만날 생각은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의는 아니었다고 말했으나 서이나의 얼굴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까부터 너무 말이 없다. 마치 반응을 아끼는 듯한 모습은 분노를 삭이는 듯 보였지만 정태이는 그렇게 생각하질 않았다.
정말 툭, 치면 터지겠군.
저것은 폭탄이다. 건드리면 바로 즉각 터지는 폭탄. 정태이는 그 고요한 모습을 그렇게 판단했다.
자, 그럼…,
그녀가 싸늘히 눈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동시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터트려 볼까.
생각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난 빠른 도약에 지켜보던 이들이 쉬이 반응하지 못하고 눈을 키웠다.
우선 한 방.
정태이는 땅을 박찼다. 그대로 살짝 몸을 비튼 후 다리를 날렸다.
펑-!!!
묵직한 타격음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하나 공격을 날린 정태이는 차분히 눈을 뜨며 제 다리를 보았다.
“…오.”
나직한 감탄사가 정태이의 입에서 흘렀다. 반글러브를 낀 서이나의 손과 팔이 그녀의 다리를 방어하듯 몸을 막는 것과 동시에 꽉 잡고 있었다.
이건 또….
히죽, 그녀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전보다 쓸 만해졌다 이건가. 정태이는 다리가 잡혔음에도 그리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띄웠다. 그런 정태이를 놓치지 않고 보던 서이나는 조용히 그녀의 다리를 놓았다.
“음?”
여기서 다리를 놓는다고? 정태이는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나 서이나는 정태이와 차분히 거리를 벌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정태이에게 건넸다.
“…이건?”
정태이의 눈이 이상한 걸 목격한 것처럼 가늘어졌다. 하나 서이나는 뻗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내밀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껴.”
그것의 정체는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반글러브였다.
“…….”
정태이는 그 의문스러운 태도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이내 웃음을 가볍게 흘리며 툭, 손을 치워 냈다.
“필요 없다.”
그러자 서이나의 손이 옆으로 밀쳐졌다. 하나 그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정태이는 그 살의를 똑바로 마주하며 한껏 조소를 날렸다.
“그딴 건 동등한 사람이나 끼는 거 아이겠나.”
게다가,
“니가 내 발끝에나 미치는지부터가 더 중요하지 않나, 조커.”
그 말에 서이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들고 있던 글러브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맞는 말이야.”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널 사람 새끼로 본 내가 병신이었지.”
더 이상의 망설임은 보이질 않았다.
팡-!!!!
거센 울림이 한순간에 울렸다. 일순 치고 들어온 주먹을 반사적으로 막은 정태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정태이는 그 막은 손을 부술 듯 꽉 쥐었다.
“정답이다-!!”
그러곤 억세게 치워 내며 다른 손을 그녀에게 날렸다.
훙-!! 위협적인 주먹이 공기를 찢을 듯 가로질렀다. 서이나는 그것을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어 피해 냈다. 하지만 정태이는 멈추지 않고 바로 무릎을 날렸다. 서이나는 그것을 팔로 막아 충격을 흘려 냈다. 그리고 곧장 반격하듯 주먹을 휘두르자 정태이는 아래로 몸을 숙여,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오는 주먹의 궤도를 재빠르게 피해 냈다. 그런 후 바닥을 박차 다리를 날쌔게 사선으로 올려 쳤다.
탕-!! 가볍지만 묵직한 울림이 막은 두 팔에서 전해졌다. 서이나는 이를 악물며 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정태이가 착지할 사이 곧장 그의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강하게 내질렀다.
빡-!! 억센 울림이 창고를 울리었다. 하나 정태이의 안색은 일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것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호오. 굉장한 아, 아이가.”
“…….”
“그래 화가 났는데도…,”
꽈아악. 어느새 옆구리를 막아 낸 손이 서이나의 주먹을 으스러트릴 듯 쥐었다.
“그래 냉정할 수 있나?”
히죽, 웃고 있는 입가와 달리 정태이의 눈은 더없이 차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