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반란 (1)
“……하.”
정태이는 헛웃음 터트렸다.
“어이, 공주 나으리.”
온기라곤 하나 없는 싸늘한 시선이 백장미에게 닿았다. 정태이는 지차용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지껄여 봐라.”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겠다는 경고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왜 저 자식이 이곳에 있는지 정태이는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을 받은 백장미 또한 굳은 낯을 풀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차용. 당신이 왜 여기 있죠.”
그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아가씨. 그간 안녕하셨심까! 어째 미모가 나날이 아리따워지심다?”
지차용은 그런 백장미에게 헤죽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백장미는 경박한 인사에 표정을 살풋 구겼으나 지차용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능청을 떨었다.
“그딴 거 물어본 적 없어요. 난 당신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죠?”
정태이를 이용하기 위해선 그를 한자리에 부르면 안 된다는 건 아주 당연한 상식이었다. 백장미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녀가 정태이를 마음에 들었다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별건 아입니다! 그저 아가씨께 도움도 드리고~ 또 저희 회사 문제도 있고~ 해서 이리 지가 찾아오게 됐심더!”
“회사?”
백장미의 눈이 가늘어지며 정태이를 향했다. 정태이는 백장미가 부른 것이 아님을 눈치챈 순간부터 지차용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지차용은 그런 정태이에게 미간을 들어 올리며 이죽거렸다.
“우리 아가씨도 참 꼴이 그게 뭡니까~. 상태가 아주 걸레짝이 됐네예. 그러게 그냥 포기하고 혼수나 알아보는 게 좋다고 그렇~게 얘기 했지 않슴니까.”
움찔. 그 말에 백장미가 손을 떨었다.
“미련하게 발버둥이나 치고, 그런다고 상황이 변한답니까? 여자가 뭘 할 수 있다고.”
울컥. 그 소리에 주연희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계집이 쌈질은 뭔 쌈질이라고. 그리고 또… 상대가 저 꼬마아? 참내. 아가씨 지금 장난하심까?”
빠직. 그 말에 서이나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하여간 이쯤에서 그만두고 그냥 태우 도련님께 후계자 자리나 양보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지예.”
“……하.”
그 모든 걸 들은 정태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저 씨발 새끼가 뭐라카노?”
전에 없이 활활 타오르는 빡침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너 이 씨발, 니 내가 주둥이 조심해라, 했나 안 했나. 입 찢어 버린다 캤나, 안 했나.”
정태이는 발을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시야가 살짝 흔들렸으나 그보단 저 망할 새끼의 입을 찢어 버리는 게 더 급선무였다. 저 새끼가 간부랍시고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아주 선을 서슴없이 넘네? 그녀의 눈이 험악하게 세워지며 얼굴엔 혈관이 잔뜩 불거졌다.
“니 내한테 처맞은 지 얼마나 됐제? 앙? 2년? 3년? 그사이에 대갈빡을 어데서 박아 가지고 왔나, 누구 앞에서 입을 터는지 다시 기억나게 해 줘?!”
흠칫. 점차 다가오는 위협에 지차용이 몸을 반사적으로 떨었다.
“그리고 뭐? 여자아가 어째? 시발, 점마 발가락도 제대로 못 건드릴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나불…. 닌 그냥 오늘 뒤졌다 생각해라.”
서이나는 그 말에 지차용에게 향했던 시선을 정태이에게로 옮겨졌다. 저거… 자신을 칭찬한 건가. 그녀의 눈이 멀거니 깜빡여졌다. 정태이의 뒤통수를 잠시 동안 보던 서이나는 자리를 슬며시 옮겼다.
“뭐, 확실히 아가씨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걸 보면… 아주 쓸모없는 것도 아닐지 모르겠네요.”
지차용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일이 아~주 수월해졌지 뭡니까! 하하하!!”
“뭐?”
난데없이 유쾌히 웃음을 터트리는 지차용의 말에 정태이가 발을 멈췄다. 그에 지차용이 손을 들어 작게 까딱였다.
쿠쿠쿵-.
그러자 커다란 철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었다.
드르르르-.
“!”
그러면서 그의 뒤로 보이는 것은 각목을 든 오토바이 몇 대, 그리고 수십, 아니 100명은 한참 넘어 보이는 깡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 뭐야, 난 저렇게 많이는 안 불렀는데…! 지차용 당신, 대체 이 많은 수를 어떻게…!!”
그 깡패들의 숫자에 가장 놀란 건 백장미였다. 언제 저렇게 많은 인원이 이 자리에 있던 거지, 그런 건 들은 적이 없었다. 한도훈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적당한 인원만 꾸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수가 많으면 당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텐데, 어째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음? 뭐야. 난 당연히 당신이 모아 둔 줄 알았는데.”
“뭐?”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고찬영이 불쑥 말했다. 그에 백장미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고찬영이 아닌 지차용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야 며칠 전부터 쭈우욱 이곳에서 숙박을 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꺼. 이야- 저 여자아랑 사내자슥이 들쑤시고 다녀서 을매나 당황했던지. 눈 좀 속이려고 고생 좀 했심더.”
아, 그런 거였나. 고찬영은 오토바이를 타고 이 안으로 들어설 즈음, 외곽에서 많은 무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친구님과 반휘혈이 저 가운데에 있나 싶었으나 좀 더 안쪽을 살펴보니 다른 곳에서도 무리가 모여 있었다.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흩어져 있나 했더니… 전혀 다른 무리였었군.
“그걸 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건지 묻고 있잖아!!”
백장미는 점점 상황이 자신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왜 자신에게 상의도 없이 이따위 짓을 벌인 건가. 그녀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야 간단하지 않습니까.”
지차용이 히죽 웃었다.
“불만 있다고예.”
불만. 지차용이 가지고 있는 불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니… 내를 치러 왔나.”
허, 그 뜻을 정확히 꿰뚫은 정태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 같은 저 태도. 그리고 저 수의 무리들과 무장 상태. 누가 봐도 이것은 백장미를 이용해 만든 교묘한 함정이었다. 자신을 완전히 후계에서 꺾어 버리고 다신 오르지 못할 구덩이를 파 놓은 것이었다.
“역시 아가씨. 이런 건 참 찰떡같이 알아듣는데 와 다른 말은 못 알아듣지 지는 이해가 참- 안 가지 말입니다?”
조소를 담은 그 태도에 정태이는 싸늘히 낯을 굳혔다.
“웃기지 마라. 겨우 그 정도로 내가 쓰러질 것 같나.”
확실히 쉽게 쓰러질 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3년간 꾸준히 그녀의 앞길을 막으려 온갖 훼방을 놨던 지차용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딱- 보니…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데 쉬엄쉬엄하셔야죠.”
예상치 못한 수확. 조커라고 했던가. 생각보다 더 작은 데다 여자라곤 생각 못 했지만 그 정태이를 저 지경까지 만들어 놓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뇌진탕이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아가씨라도 저 상태론 이 수를 이기긴 버거울 터였다.
“또 제가 언제 이것뿐이라 했나요. 안 그러냐, 율아.”
율? 그 소리에 서이수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김율은 그 말에 눈을 천천히 감더니 못 박히듯 서 있던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분한 걸음의 끝에 당도한 것은 정태이의 앞이었다.
“…….”
“…무슨 짓이지, 김율.”
정태이는 차분히 그에게 물었다. 왜 자신을 가로막는지. 지차용을 등지고 선 김율은 말없이 정태이를 보았다.
“보면 모르겠습니까? 김율, 아를 주워 온 게 누군지, 드디어 자각했다- 뭐 이거 아니겠습니까.”
주웠다. 그 말에 백장미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이제 주인을 알아보니 을매나 다행인지요. 그간 아가씨 모시느라 꽤나 굴렀을 거 아입니까. 그 친구가 겨우 아가씨 시다바리나 들… 그런 아는 아니지 않습니까.”
“…….”
김율은 그 말에 조용히 침묵했다. 정태이도 그런 김율을 물끄러미 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정태이는 힐끗 덩그러니 방치된 서이수를 곁눈질했다.
“내 말은 무시냐?”
“질책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그래.”
정태이는 한숨을 나지막하니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체념 어린 태도에 지차용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녀가 김율의 배신으로 인해 큰 충격이라도 먹었다 생각하며 비웃음을 그렸다.
“뭐, 그럼 최대한 깔끔히 끝내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가가 더없이 유쾌한 미소를 깊게 지었고,
“아가씨.”
조롱하듯 또박또박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동시에 그의 두 손가락이 까딱 움직이며 전방을 가리켰다.
부아아앙-!!!!
그러자 두 대의 오토바이가 거센 엔진 소리를 내며 빠르게 그녀의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 정태이는 그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김율을 보며 말했다.
“병신 같은 새끼.”
“…….”
훗. 그 말에 김율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러고선 그는 뒷짐을 쥐던 손을 풀어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부아아앙-!!! 오토바이는 순식간에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탄 한 명이 정태이를 향해 각목을 치켜든 그 순간, 그의 회색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콱.
“어?”
각목을 든 운전자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인 것 그때였다.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다름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
쾅-!!!!!!!!!
쿠당탕-!!! 콰직-!!!!!!
그 사실을 채 인지하기 전, 과격한 울림이 창고에 강하게 퍼졌다.
“지, 지금 이게 무슨….”
그리고 그 광경을 똑똑히 본 지차용이 허망한 소리를 내었다. 제가 방금 본 것은 뭐지?
한순간이었다.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각목이 치켜든 그 순간, 김율이 움직였다. 그의 손은 달리는 오토바이의 운전자의 목덜미를 잡아챘고, 그다음 순간 다른 오토바이를 향해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상에 지차용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잠시 후, 툭툭, 하고 가볍게 손을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어느 누구보다 침착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지차용 이사가 상상 이상으로 병신이라 저도 놀랐지 뭡니까.”
여상히 말하는 김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낯을 똑바로 바라보는 정태이는 그에게 덤덤히 경고했다.
“죽이진 마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참고하겠습니다.”
참고는 개뿔. 정태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그에 김율도 천천히 몸을 돌려 지차용을 돌아봤다. 그리고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율이, 니 뭐 하는…!”
지차용은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몸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바보 같긴.”
백장미는 그런 그를 보며 싸늘히 질책했다.
“조금만 살펴도 알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한 대가입니다. 지차용 이사.”
그를 주워 왔다고 호기롭게 말하기에 뭐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대충 조사만 해도 김율이 얼마나 정태이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지 알 수 있는데 저 아둔한 고집이 일을 그르쳤다. 앞으로의 전개 정도는 뻔하겠군. 그녀는 힐끗 바닥을 처참히 구른 오토바이의 잔해와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거짓말쟁이였네요.”
아까는 달리는 오토바이를 못 막는다니. 역시 되지도 않는 헛소리였다.
“살인 병기 주제에.”
백장미는 눈을 차분히 내리깔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