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반란 (2)
1980년대. 당시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이른바 <3저 현상>에 의해 우리나라의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을 3저 호황이라 일컫는다.
그러한 경제 발전에 같이 발달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흥 문화였다.
하지만 유흥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력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즉, 유흥업에 종사할 여종업원이 부족해진 것이다. 그 부족분을 충원하는 방법으로 많은 부랑배와 조폭들이 여성을 납치하고 인신매매를 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그로 인해 민심은 흉흉해졌고, 정부는 그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강압적인 수색, 그리고 사형.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힌 조폭만 약 300여 개의 조직과 1000여 명에 달하게 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잡히지 않았던 조폭은 현저히 많았다. 하나 그 조직들이 무너지게 된 큰 원인이 된 것은 다름 아닌 1997년 경제 외환 위기 IMF가 터지고 나서부터였다.
많은 조직이 붕괴되었다. 금융업 기업으로 전환하였음에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업과 은행, 외국계 자본, 언론의 활성화로 인해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그 이름과 입지를 굳건히 새긴 단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흑룡파’. 현재는 ‘B&D’라고 업체명을 변경해 암흑계의 가장 큰 손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바로 흑룡파의 두목 정호랑이란 사내였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압도적인 무력으로 불황 속에서 조직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 싸움은 치열했으며 혈흔이 낭자한 처절하고도 비정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그는 살아 있는 전설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많은 피를 흘려 냄으로써 지켜 낸 흑룡파였건만 그에게 하나의 고비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건강 악화.
아무리 카리스마와 무력이 강할지라도 갑작스레 닥쳐온 병만큼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현재의 간부진들은 그의 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정호랑이 무너지게 되면 흑룡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말은 불 보듯 뻔히 알 수 있었다. 조직은 그가 무너지는 그 순간부터 분열이 될 것이며 이 나라엔 또 다른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정호랑은 생각했다. 조직을 굳건히, 새로이 다질 강한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저와 비견되는, 혹은 뛰어넘는 압도적인 재능을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계자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오래지 않아 가장 큰 문제에 부딪혔다.
‘차기 두목이 여자라니요!’
‘멀쩡히 도련님이 있건만 무슨 소립니까!’
‘지는 반댑니다, 두목!’
그 문제는 바로 그가 내정한 후계자가 여자아이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정호랑은 탄식했다. 자신이 세운 자들이 이리도 멍청한 자들일 거라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당장 눈앞의 편견 때문에 먼 곳을 바라보질 못했다. 건강이 조금이라도 괜찮았다면 그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처단을 했을 버러지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제가 직접 손을 쓰기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조직에는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제 머리끝까지 오르려 하는 저 멍청한 간부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새로운 세력이.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지켜 줄, 그만한 위협이 되어 줄 새로운 이름들이. 그의 후계자에게 충성을 바칠 이들이 말이다.
그리하여 흑룡파엔 이른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된다. 그의 수발이 되어 이행한 인물은 그의 최측근인 고위 간부 김도형, 그리고 당시 행동 대장이었던 지차용이었다.
이 조직엔 새바람이 불어야만 했다. 시대는 발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 윗대가리란 것들은 과거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현재와 미래를 보질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새 시대에 발맞춰 이 조직 또한 개선되기를 바랐다. 그의 딸인 정태이는 그가 바라 마지않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후계자였다. 그러니 차기 두목에게 충성을 바칠 부하들까지도 모든 것이 새로워야만 했다.
그런데 정호랑은 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지차용의 배신이었다.
당시 조직의 신진이었던 지차용이 간부 중 그 누구보다 고리타분하며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란 것을 정호랑은 미처 파악하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했고 지차용은 그것을 이용했다.
지차용은 그렇게 다수의 간부진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의 나날을 이어 갔다. 김도형의 필두로 치러졌던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지차용이 가져가는 것은 필연이었으며, 혹시 모를 배신을 막고자 김도형이 육성했던 아이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난생처음 눈 뜨고 코가 베이는 경험을 하게 된 정호랑은 쇠한 자신의 육신에 이렇게 분통하고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 다시금 희망이 찾아왔다.
어느 날 그의 한탄을 듣던 자신의 딸이 말했다.
‘뭐, 다시 가져오면 되는 거 아입니까.’
겨우 일곱 살 남짓한 아이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은 그 말을 똑같이 이행했다. 바로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 이뤄지는 장소. 새월동 그 본거지를 찾아간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이 중에 가장 강한 놈이 누꼬?’
인재 육성 프로그램. 지차용이 가져가게 되면서 더 악독해진 프로젝트. 일명 살인 병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창가와 빈민의 거리, 또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수많은 아이들을 비합리적이고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강화하는 살육의 집단.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 찾아간 그녀는 당당히 승부를 신청했다.
작은 아이가 당차게 문을 열고 등장하자 그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당황스럽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지었다. 그중에 지차용이 가장 어이없단 낯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이고, 여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꺼. 어서 가이…,’
‘됐고, 강한 놈이나 나온나.’
정태이는 지차용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그에 지차용이 혈압이 오른 듯 목에 핏줄이 불거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당당한 태도에 거기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저 아이가 지차용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일은 하나였다.
그녀가 바라던 것. 가장 강한 사람.
‘…….’
그러나 열댓 명의 아이들 가운데 앞으로 나온 것은 가장 작고 초라한 회색 머리의 한 소년이었다. 잿빛과도 같은 머리와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공허함만이 잔재하고 있었다. 가장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이였으나, 그 자리에 서 있던 누구도 그 소년을 무시하는 태도는 없었다.
대다수가 두려움에 잠식된 얼굴. 그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녀석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도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태이는 이 소년이 이 중 가장 강한 녀석이란 게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정태이는 지차용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점마를 이기면 점마는 내 거다. 어떻나.’
지차용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호랭이 새끼라고 해서 자기도 호랭이인 줄 아나. 그는 그리 조소하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명확했다.
‘내 승리다.’
그녀는 입가에 흘린 피를 거칠게 닦아 내며 지차용을 돌아봤다.
‘약속은 지켜라. 지차용이.’
‘크…윽…!!!’
그렇게 지차용은 가장 강한 병기를 정태이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정호랑은 크게 웃었다. 가장 강한 병기, 즉 살인 병기들의 우두머리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꽤나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그들의 주인이 바로 정태이, 그녀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정태이는 그 어린 나이에 그들에게 확실한 각인을 새기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계자의 이름에 걸맞은 행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니 이름이 뭐꼬?’
정태이는 자신이 데려온 남자아이를 보았다. 남자아이는 그녀에게 맞아 얻어터진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채 무감한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유리.’
‘유리? 아, 율이?’
‘유리’라고 자신을 지칭한 소년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주인이 잘못 호명했음을 인지했지만 굳이 수정하지 않았다. 이름 따위야 그저 수식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이름 따윈 다 소용없었다. 자신은 그런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니까,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성은?’
‘없습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그렇기에 성도 없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그 곁에 있는 어른은 창부들과 그녀들을 관리하는 깡패뿐. 나라에 기록되지 않은 소년의 이름을 불러 주고, 길거리에 나앉아 굶주릴 뻔한 그에게 유일하게 안온한 손길을 뻗은 것은 피 흘려 죽어 가는 여인들이었다. 소년은 이미 기억이 있던 그 순간부터 죽음에 익숙해 있었다.
‘없어? 그럼… 어이! 김도형이!’
‘…아가씨. 아직은 삼촌이라고 불러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슬픕니다.’
‘어, 그래. 삼촌.’
‘예.’
정태이의 부름에 짐짓 서글픈 얼굴로 대꾸한 김도형은 정정된 호칭에 그제야 얼굴을 풀며 대답했다. 새월동에 오기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 그는 지차용과 다르게 제 아가씨를 깍듯이 모셨다. 그렇기에 지차용의 높은 콧대를 꺾는 그 순간이 얼마나 유쾌했을지 모른다. 그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제 보스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마음속에 이 순간을 흑룡파 제2의 전성기의 서막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렇게 감격에 젖어 있던 그때 그에게 때아닌 청천벽력이 내려졌다.
‘니 아들 없제? 야, 니 호적에 넣어라.’
‘……예?’
예?! 김도형은 갑작스러운 명령에 입을 벌리며 기함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으나 결혼도 하지 않은 그였다. 상사의 딸이 내린 난데없는 명령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닌 이제부터 그냥 율이 아니라 김율이다. 알았나?’
툭, 정태이는 저보다 작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 율.’
유리. 아니 이제부터 김율이 된 소년은 멍하니 그 이름을 되뇌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인형 같은 목소리였다. 하나 정태이는 그런 건 상관없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김율이다. 니는 이제부터 내 부하고, 내 동생이며 가족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씩, 하고 크게 웃음 지었다.
‘배신하면 내 손에 뒤진다?’
그것은 강직하고도 또렷한, 그에게 있어서 다신 잊지 못할 ‘삶’의 시작을 알리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