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89화 (289/306)

289. 반란 (3)

유리라는 소년이 김율이 되고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야, 근데 니 내보다 어린 거 맞나. …머? 나이도 모른다꼬? 그럼 내랑 동갑이나 해라. 생일은 그냥 1월 1일. 기억하기도 딱 좋지 않나. …어, 잠깐. 그라믄 내보다 성이 되나? 흠, 뭐, 상관없겠지.’

그 과정 속에서 소년이 받은 것은 비단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이 문디야-!!!! 와 빠가사리처럼 가만히 있나?! 니를 무시하면 내를 무시하는 기다!!!!’

도구에서 사람으로. 살육 기계에서 인간으로. 고아에서 가족으로. 그의 인생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

‘율아.’

‘니는 절대 배신하지 마라.’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그녀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율이, 니…!!!! 지금 내 배신하는 기가?!”

지차용은 다가오는 김율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배신이라니요. 지차용 이사.”

김율은 그런 그에게 고저 없는 투로 대꾸했다.

“저는 처음부터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뭐…?”

지차용이 그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하나 김율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다. 지차용이란 남자가 저를 데려온 순간엔 그에게 복종했고, 주인이 바뀌던 그때엔 그 주인에게만 복종을 맹세했다. 그렇기에 김율의 말은 지극히 단순했다.

“정말 곤란합니다.”

뚜둑, 그의 고개가 가볍게 꺾어지며 살풋 숙어졌다.

“제가 당신의 말을 간혹 따른 것은 당신이 순전히 ‘조직의 간부’이기 때문이온데….”

뚜두둑, 검은 장갑으로 뒤덮인 손에서 살벌한 뼈 소리가 울렸다.

“이리 착각하시면… 죽이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차분히 들어 올린 그 눈동자엔 전에 없이 강한 살의의 감정이 서슬 퍼렇게 지배하고 있었다.

“크윽…!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뭘 가만히 있나! 어서 저 새끼 족치라, 이 새끼들아!!”

지차용은 그에 옆에 있는 부하들의 머리를 후려치며 그들을 앞으로 떠밀었다. 그 신호와 함께 깡패들이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길 잠시 곧 자신들의 수를 헤아렸는지 몇몇이 연장을 다잡고 김율에게 돌진했다.

훅-!! 여러 개의 각목이 김율을 향해 쇄도했다. 하나 김율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듯 무감하니 그저 가벼이 손목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 아래서 단도 하나가 예리한 빛을 띠며 제 몸을 드러냈고,

“-?!”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형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어느새 그들의 등 뒤에 자리 잡은 김율은 문득 떠오른 것처럼 툭, 성의 없이 말을 내뱉었다.

“상처 난 부위는 잘 지혈하시길.”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여상히 덧붙였다.

“여기서 죽으면 곤란하거든요.”

어? 그 말에 그를 공격했던 이들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리고 잠시 후…,

“으, 아아아악-!!!”

“어, 손, 내 손…!!!”

“으, 어, 억….”

새빨간 물이 분수가 터지듯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끔찍한 비명이 그의 등 뒤에서 절망처럼 퍼져 갔다. 김율은 칼에 묻은 피를 가벼이 털어 내며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윽…!”

서늘한 한기가 등골에서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형용할 수 없는 괴물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김율을 목전에 둔 깡패들은 몇십 배나 많았으나 그 누구도 쉬이 움직이질 못했다. 숨통이 막힌 것처럼 숨도 잘 쉬어지질 않았다. 당장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그들을 짓눌렀다.

“헤드라이트, 헤드라이트 켜!!”

그럴 때 지차용의 벼락같은 노성이 그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의 명령과 동시에 터질 듯한 빛이 창고의 내부를 환히 밝혔다.

어둑해져 가는 밖과 상반되는 강한 빛이 그를 정면으로 노리자 김율은 그에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는 곧장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챙-!!!

그러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부딪힌 것처럼 강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김율은 빠르게 뒤로 무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히, 히힛…. 마, 막았네?”

서이나에게 다가가던 정태이는 그 목소리에 옮기던 발을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흠. 그래도 쓸 만한 놈 하나는 데려왔나 보군. 정태이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

히히, 히히히. 김율은 늘어트린 팔 아래로 역광 속에서 낫을 들고 눈을 희번덕거리게 뜨며 미친 사람처럼 웃는 자를 보았다. 그는 숨을 작게 내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제이. 당신도 오셨나요.”

“히히힛…. 여, 역시, 역시 유리. 히히힛.”

제이라고 불린 이는 김율의 오랜 이름을 부르며 히죽이죽 웃어 보였다.

“설마 내가 평범한 놈들만 데려왔을까.”

지차용은 비소를 그리며 눈썹을 기울였다. 아무리 정태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지차용이었지만 정태이의 무력을 완전히 얕보진 않았다. 실제로 얕봤다가 깨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간의 경험을 학습하지 않았다면 그것 나름대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저 녀석은?”

그런 낯선 이의 등장에 고찬영이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딱 보아도 심상찮게 미친놈이었다. 그는 경계를 풀지 않고 주연희의 고개를 더 낮추며 경고했다.

“절대 고개 들지 마.”

“네, 네!”

김율이 나서기 전, 불길한 기운에 주연희를 재빠르게 오토바이 뒤로 숨겨 놨던 그의 판단은 옳았다. 하마터면 엄청난 트라우마를 생기게 할 뻔했다. …이래서 조폭들이란. 정말 별의별 미친놈들이 다 나오는군. 고찬영은 혀를 차다가 이런 일에 주연희보단 낫겠지만 그리 익숙지 않을 제 친구의 안부를 확인했다.

“친구님. 괜찮아?”

“……어.”

강한 조명 탓인지 몰라도 낯이 살짝 창백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찬영은 이제야 안경희가 왜 제 친구님이 위험하다고 난리를 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게 용조라, 이건가.’

용조(龍爪). 이른바 용의 발톱. 흑룡파의 비밀 병기이자 살인 전문가들. 안경희의 말에 따르자면 흑룡파에서 비밀리에 어릴 때부터 육성한 위험한 놈들이라고 했다. 설마 김율도 저들과 관련이 됐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지만 방금 본 위용만으로 그간 왜 그리 자신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참. 난 완전 어린애나 따로 없었겠는데. …이봐! 정태, …정태이!”

그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리다 버릇처럼 정태우라 부를 뻔한 것을 정정하며 정태이를 불렀다.

“어떻게 할래. 지금 상태론 제대로 대결이 안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

정태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고찬영이 빠르게 말했다. 그에 정태이의 시선이 가늘어지자 고찬영은 저 너머의 낫을 든 미치광이를 가리켜 보았다.

“저거 용조, 맞지?”

“…용조?”

서이나는 낯선 단어에 짧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와 상반되게도 정태이는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이내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호오. 니, 알고 있나.”

“듬직한 정보통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말에 서이나는 어리둥절한 낯을 했으나 곧 이어진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때, 지금은 잠시 휴전하고 한 팀이 되는 게.”

고찬영은 그런 서이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저건 너무 사람이 많지 않아? 너도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질 않는데.”

분명 정태이는 방금 머리를 잘못 맞았다. 아까부터 안색도 창백하고 동공의 초점이 맞질 않고 있다. 용조의 개입으로 김율은 한순간 발이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녀석들이 정태이와 저희를 향해 돌격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저희들뿐이면 괜찮았으나 여기엔 싸움이라곤 일절 모르는 여자애 한 명과 손과 발이 묶인 채 아직 구해 내지 못한 인질 한 명이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정태이가 견제하고 있어 선뜻 움직일 수 없었던 터라 지금이 서이수를 구해 낼 찬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태이도 저 상태론 확실히 저 수의 무리를 상대하긴 버거울 터였다. 그러니 고찬영은 그녀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하.”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정태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그녀는 별 웃기는 소릴 다 들었다는 것처럼 낯을 찌푸리며 조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그 태도에 고찬영은 몸을 멈칫했다.

“왜?”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그는 얼굴을 굳혔다. 헬멧 뒤로 보이진 않으나 그 얼굴을 어림짐작한 정태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고찬영이, 니 내가 왜 남장 따위를 했는지 아나.”

그 소리에 김율을 제외한 창고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하, 그야 남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 아입니까.”

질문을 받은 것은 고찬영이었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지차용의 이죽거림을 들은 백장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다가 다시 정태이에게로 향했다.

“뭐, 꿈이라도 실컷 꾸시는 것도…,”

“오. 남자가 되고 싶다, 라?”

한심스럽게 말을 잇는 그 말을 그녀가 단조롭게 잘라 냈다.

“큭, 크크.”

그리고 그녀는 작게 실소를 터트리더니,

“아하하하하하!!!!!”

곧 유쾌한 폭소로 창고의 내부를 흔들었다. 허리를 가볍게 젖히며 시원스럽게 터트린 웃음이 울리길 잠시.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단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별 소릴 다 듣는다 아이가. 점마도 니도 겨우 그따위밖에 생각 안 하나.”

정태이의 턱 끝이 백장미를 향했다가 지차용 쪽을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하는 게 다 그따위인지. 그녀는 고찬영과 서이나를 향해 재차 눈짓했다.

“어이, 니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정태이의 물음에 두 사람은 말이 없다가 곧 입을 열었다.

“…설마.”

“아니.”

고찬영은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고, 서이나는 덤덤히 부정했다. 그 소리에 정태이는 흥미롭게 눈을 접었다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오래 본 니보다 저 아들이 더 내를 잘 아는 것 같다? 지차용이.”

“…그게 무슨.”

지차용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정태이는 그를 향한 조소를 거두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와 이 짓거리를 하냐고?”

정태이는 낮게 실소를 흘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곤 턱을 치켜들며 지차용을 내리깔 듯 바라보았다.

“당연히 니를, 그리고 다른 간부 새끼들을 놀리기 위함, 아이겠나.”

뭐. 그 말에 지차용은 눈을 부릅떴다. 놀리기, 위함이라고?

“그게 무슨…!”

“아직도 눈치를 못 챈 니 머리는 을매나 병신인지 알겠다.”

정태이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다시금 잘라먹고 아주 당연한 투로 말을 이었다.

“느그들이 말했제. 여자라고 봐준다? 하, 웃기고 자빠졌네. 그따위 소리 안 하게끔 하려는 것도 쪼매 있기야 했다만… 역시 마지막엔 짜잔- 하고, 정체를 밝혀야 억수로 재미나지 않겠나.”

서열 1위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고. 말이다. 아마 전국이 충격에 휩싸이겠지. 그리고 그녀는 당당히 조직에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었다.

“이까짓 거로 쓰러지면 패왕이란 이름이 참으로 우습지 않겠나.”

그렇기에 자신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정태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듯 당당히 웃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고찬영은 그런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안경희는 그녀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글쎄. 그간 정태이라는 사람을 봐 왔던 고찬영의 입장은 달랐다. 그의 눈엔 그녀가 그 상황을 굉장히 즐기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었으니 말이다.

“이… 이…!!!”

그러나 그 사실을 꿰뚫지 못했던 지차용의 낯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그 면상에 정태이는 다시금 유쾌히 웃음을 흘렸다.

“너, 이 망할 년이…!!!”

그에 인내의 한계가 찾아온 지차용이 제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얼핏 보이는 것에 김율이 즉각 반응하려던 찰나였다.

퍽-!!!

“억?!”

지차용의 몸이 돌연 거센 힘에 의해 앞으로 요란하게 넘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어떤 새끼가 감히-!!!”

그리고 공격을 당한 지차용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를 갈며 몸을 돌렸으나,

“어…?”

그 정체를 확인하곤 아연한 낯이 되었다.

“야.”

강한 빛에 반사된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역광이 졌음에도 빛을 잃지 않는 진홍빛의 눈동자.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시끄러.”

최강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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