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90화 (290/306)

290. 반란 (4)

“-혁이?”

어째서 저 애가 여기에? 백장미는 갑작스러운 최강혁의 등장에 눈과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예기치 못하게 닥친 상황에 그녀의 낯은 당혹으로 물들어 갔다.

“…….”

최강혁은 싸늘히 얼굴을 굳힌 채 앞을 보았다. 말이 없는 그 낯은 고요했으나 어딘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주위를 차분히 훑었다. 신음을 흐느끼며 쓰러져 있는 깡패들과 여기저기 부서진 흔적. 그리고 안쪽에 있는 낯선 얼굴과 익숙한 얼굴들.

“읏…!”

그 가운데 붉은 머리칼의 소녀와 눈이 마주쳐 그의 눈이 살풋 좁혀졌다. 백장미는 마주친 시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최강혁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발을 떼어 냈다.

스릉-.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예리한 칼날이 있었다. 제 앞에 진로를 방해하는 이 때문에 최강혁의 분위기는 더욱 서늘해졌다.

“…넌 또 뭐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산히 울렸다. 하지만 그를 가로막은 자는 낫을 거두지 않은 채 제 일을 이어 갔다.

“히히, 히히힛. 고, 곤란해. 이 앞, 이 앞은, 도련님, 아, 안 돼. 히힛, 히히히.”

“…….”

도련님. 그 단어에 최강혁의 낯이 더 싸늘히 굳어지던 찰나 뒤에서 툭툭, 몸을 일으키는 인기척을 전해 왔다.

“그 말대로입니다. 최강혁 도련님. 당신 같은 분이 이런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면 저희가 쪼매 곤란-해진다 아입니까.”

지차용은 자신이 걷어차인 것 따윈 개의치 않는지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그는 최강혁의 어깨를 짚고선 발을 물릴 것을 다시 제안하려 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뒤로 빠지이-,”

뚜두둑. 하나 그 커다란 손을 한순간에 꺾이고 말았다.

“-!!!!!”

예기치 못하게 엄습한 통증에 지차용은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제 손을 붙잡았다. 그는 한순간에 기이하게 틀어진 제 손과 최강혁을 번갈아 보다 표정을 험악히 굳히며 이를 갈았다.

“크윽, 이게… 무슨 짓거리…!!!”

“누가,”

하나 최강혁은 그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그는 고요히 시선만을 돌려 지차용을 바라보았다.

“내 몸에 손대라 했지?”

선혈과도 같은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뿜어내며 그를 직시했다. 지차용은 그 진홍의 눈과 시선이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기묘한 압박이 전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지차용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소문대로, 로군.’

암암리에 도는 최강 그룹 후계자의 눈. 그것은 마주치는 것만으로 저주를 받는 듯한 오싹함이 있었다. 지차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틀어진 제 손목을 다시 맞추었다.

“이야- 이거 실례 많았지예.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이해 좀 부탁드리지 말입니더.”

뚜둑, 소름 돋는 울림과 다르게 지차용의 입가엔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강혁은 그 뻔뻔한 낯을 싸늘한 시선으로 무시하며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에 입가의 지차용의 미소가 살짝 비틀어졌다.

“이거 참- 겁 없는 도련님 아입니까.”

왁스로 잔뜩 올린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그가 안타까이 말을 이었다.

“뭐, 저는 말렸십니더. 우얀 일로 여까지 귀한 분이 오셨는진 모르겠십니다만 제 말을 무시한 건 게쪽, 이란 걸 잊으시면 안 됩니더.”

지차용은 제이에게 눈짓했다. 제이는 그 시선을 확인하곤 조용히 낫을 거두었다.

“! 지차용, 당신…!!!”

“제 말을 안 듣겠다는데 우짭니까. 힘없는 제가 물러서야지예. 아가씨.”

그에 백장미가 놀라 외치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신경은 써 보도록 하겠으니 너무 걱정일랑은 마시고-.”

풋.

그때 지차용의 말을 가로지르는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지차용의 눈매가 그 소리에 대번에 날카로워지며 그 진원지를 향해 빠르게 뻗어 갔다.

“언놈이, 웃음을 처흘려 쌓나. 당장 나온나!!”

그에게서 분노에 찬 노호가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애새끼들에게 연신 무시를 당하니 자신이 이젠 호구로 보이는 건가. 그는 당장이라도 그 입을 찢어발기려 했다.

“아- 이런. 들켜 버렸네.”

그런데 들려오는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부하 놈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의 노래와도 같은 맑은 미성이었다. 지차용의 미간이 살풋 좁혀졌다.

“하하,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탁, 탁. 일부러 소리를 낸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검게 물든 인영은 어둠을 뚫고 헤드라이트의 빛을 등지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고,

“지차용 이사님.”

번쩍이는 불빛을 등지고 나온 이는 한도훈이었다.

“!”

한도훈을 발견한 지차용은 얼굴을 대번에 굳혔다. 지차용은 최강 그룹에 이은 HD 그룹의 자제의 출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황했다. HD 그룹의 자제인 한도훈이야 원래 백장미와 사이가 안 좋으니 그렇다 치지만 어째서 최강혁이 그와 같이 나타나는가. 상황과 시기상으로 나타난 순서는 우연으로 치기엔 너무 기가 막혔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경직된 그 낯에 한도훈은 상큼히 웃으며 말했다.

“아, 당신의 꼴사나운 아첨, 아주 잘 봤어요?”

“뭣….”

거기에 난데없는 욕까지. 그러나 한도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무려 이사씩이나 돼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촌극에 이렇게까지 어울려 주다니, 당신 인생도 참 고달프네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야-,”

짐짓 안타깝다는 그 발언에 그의 낯은 수습이 되질 않았다. 한도훈은 그 되물음에 피식,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창고 안에 있는 백장미를 보며 크게 웃음 지었다.

“꼴사납게 남자에게 차이고 이런 화풀이에 어울려 준다는 게- 너무 우습잖아요?”

“-!!!”

까득. 조롱이 가득 담긴 그 낯에 백장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내부가 어두운데도 그녀의 낯이 수치로 강하게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차여?”

그 소리에 정태이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차여? 차였다고? 니 최강혁이한테 차였었나? 으하하하하!!!”

정태이는 그대로 배를 안으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백장미의 손이 수치로 강하게 떨려 왔다.

“차여, 차여서…?”

그리고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 주연희는 그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벙찌며 중얼거렸다. 지금 차여서, 라고 한 거야? 최강혁한테… 차여서 이렇게, 된 거라고?

“이게 무슨 억지야….”

주연희는 그 사실에 허망히 중얼거렸다. 고찬영은 그 소리에 그녀를 힐끗 봤으나 위로할 말은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기에 침묵하기를 택했다.

“하하하하! 정말 꼴이 말도 안 되게 우스워졌군, 안 그러나, 지차용이!”

정태이는 이 어처구니없는 발단을 알게 되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이 연애 놀음에 이용당하다니! 저 녀석은 얼마나 자신을 골 때리게 만들 생각인가. 게다가 옳다구나 하고 저 많은 수를, 무엇보다 용조까지 꼬드겨 데려온 지차용의 꼴을 떠올리니 이보다 더 개그일 수가 없었다.

“크윽… 흥, 무슨 착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십니다만, 저는 그따, …그런 일로 온 게 아입니다만?”

지차용은 그 사실을 용납하질 못하겠던지 이를 갈던 것도 잠시, 곧 의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한도훈의 말에 반박했다.

“아, 후계 문제?”

그렇지만 한도훈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그거야말로 더 병신 같지 않나?”

오히려 그는 코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싸늘한 비소를 날렸다.

“겨우 여자라는 이유로 저 괴물을 보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너무 멍청한 발상이라서 나도 놀라긴 했어요. 이사님. …아.”

그러고선 그는 돌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눈치챈 것처럼 과장되게 입을 벌리더니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그에게 말했다.

“설마 보스의 자리를 갖지 못할까 봐 그렇게 발악을 하시는 거였나?”

“-!!!”

“…오?”

그 소리에 지차용의 눈이 대번에 커졌고 정태이는 흥미로운 탄성을 내뱉었다.

“미국에 있는 정태이… 아니, 정태우라고 해야 되나? 그 사람을 자리에 앉혀 두자마자 바로 갈아치울 기회를 놓치는 걸 테니, 얼마나 아까웠겠어요. 나라도 너무 아쉽긴 하다.”

“그, 그게 무슨…!”

허를 찔린 듯 당황스러운 반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곧 능청스러운 말이 그의 말을 서슴없이 잘라 냈다.

“근데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한도훈은 짐짓 애처로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그런 생각을 당신만 했을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죠?”

“……!!!!!!”

지차용은 그 대답에 숨을 들이켰다. 한도훈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병신.’

애석한 듯 천연덕스럽게 바라보는 낯과 달리 그의 속내는 냉소가 가득 깔려 있었다. 흑룡파가 어째서 지금까지 굳건할 수 있었는지 모르다니. 다 죽어 가는 호랑이일지언정 정호랑은 여전히 맹수였다. 그렇기에 흑룡파라는 조직 내부에서 분쟁이 크게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뒤를 최고의 후계자는 명실공히 저기 있는 정태이였다.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지금이긴 했으나, 그따위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실 정태이가 지금까지 이룩해 낸 그 자취는 자신의 조직과 다른 파벌에게 알리는 경고와도 같았다. 차후 조직을 거머쥘 이의 위명에 걸맞은 행보를 그녀는 가감 없이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업에 발끝도 못 쫓아갈 녀석이 그녀를 내리고 허수아비를 세운다, 라.

이 뒤는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참 아량이 넓은 상관이랑… 현명한 부하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최강혁.”

한도훈이 안타까이 과장되게 중얼거리며 최강혁의 어깨에 친근히 팔을 기댔다. 그러자 최강혁은 싸늘히 미간을 찌푸리곤 그의 손을 차갑게 떨쳐 냈다. 한도훈도 오래 붙어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만 보이게끔 히죽 웃으며 거리를 벌리는데, 곧 이를 바짝 간 듯한 목소리가 창고 내부에 울렸다.

“뭐 하고 있어! 저 녀석 잡아!”

“예, 예?”

그 소리에 한도훈의 시선이 바짝 가늘어졌다. 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백장미가 곁에 있던 깡패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깡패는 얼떨떨히 굳어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서이수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한도훈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 백장미는 그런 한도훈을 죽일 듯 노려보며 외쳤다.

“한도훈! 네가 그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뻔하지! 너한테 이목을 모은 다음 이 녀석을 구할 셈이었겠지?!”

“…칫.”

한도훈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설마 이 타이밍에 제 생각이 탄로 나다니. 하여간 저 여자는 방심할 게 못 된다. 원래의 계획은 아무도 몰래 서이수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런데 방금 도착한 최강혁이 말릴 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나가 주목을 끌어 버렸다. 그래서 애매하게 끌 바엔 제대로 모으기 위해 제가 직접 움직인 후 다른 녀석들에게 서이수를 데려오라 지시했던 것이었는데… 역시 저 녀석을 속이기엔 허술했나.

‘아니… 그게 아니야.’

아마 제 등장으로 더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역시 잠이 부족하다. 그는 피로한 눈을 비비고 싶은 걸 참으며 백장미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이수야!”

“…윽.”

그 순간 깡패 한 명이 서이수의 목에 칼을 겨누자 서이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하, 이젠 나도 이판사판이야. 한도훈, 네가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엔 인질이 있다는 걸 잊으면 곤란해. 특히나- 그게 네 친구라면 더욱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백장미는 이를 바짝 갈며 스산히 경고했다. 이제 더 들킬 치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감히 최강혁까지 데려오다니. 그녀는 얌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