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Final Round (1)
***
여기 한 선수가 있다.
벼락같이 등장한 초신성. 프로의 발에 딛자마자 주목을 이끈 세기의 천재의 등장이었다.
불변의 왕좌를 향해 빠르게 추격하는 새로운 선수에 대해 격투계의 유명 인사들은 조용히 그녀를 주시했다.
피지컬을 극복한 선수. 그 재능을 가늠할 수 없는 선수. 격투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선수. 실력 앞에선 성별은 무의미한 선수. 작은 몸에서 나올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기량, 린치. 그것을 지켜본 이들이 약을 사용한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꿋꿋이 나아갔다.
단지 목표는 하나.
챔피언.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당도하기 위해 아시아를 제패했다.
네가 선 위치에 당도한다면 나도 너처럼 링 위에서 웃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며.
***
“…….”
이건 대체 뭐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선뜻 와닿지가 않았다. 주저앉아 있는 서이수를 보았다가 다시 정태이로 고개를 돌렸다.
“점마는 지차용이 안 잡고 와 저래 빡이 쳤노.”
정태이는 김율의 쪽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듣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김율의 쪽으로 시선이 향해졌다. 얼굴만 봐선 화가 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세가 방금보다 날카로워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금세 끊어지고 다시 정태이에게로 돌아왔다.
“? 와 그래 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눈이 마주친 정태이가 한쪽 눈썹을 샐쭉 휘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져 입매를 강하게 다물었다가 그녀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백장미와 손을 잡은 건가 싶다가도 아니라고 한다. 동생을 저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놨으면서 도와줬다고 한다. 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백장미도 정태이의 배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걸 보면 굉장히 즉흥적인 배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선 차라리 백장미와 편을 먹고 있는 게 더 이득일 텐데도. 정태이는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목표를 위해 모든 걸 저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왜 내 앞에 다시 선 거야?”
정태이는 왜 내 앞에 있는 것인가. 차라리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지차용이란 자를 잡으러 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정태이는 다시 내 앞에 섰다. 이 난장판 속에서도 마치 나와의 싸움만을 바란 것처럼.
“아직 결판 안 나지 않았나.”
그리고 정태이는 아주 당연하단 듯 그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지금이라면 난 당신을 무시하고 동생들만 데리고 떠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반발하듯 그 말에 대꾸했다. 서이수의 무사를 확인했다. 정태이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으며 김율의 발은 묶여 있다. 게다가 한도훈이 도착한 걸로 보아 다른 애들도 이 주위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조폭들이 수가 많을지라도 전력은 충분했다.
피식, 정태이가 내 말에 잘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안 갔지.”
움찔. 나는 그 말에 손을 잘게 떨었다.
“니도 아직 내 앞에 있다 아이가.”
정태이는 그런 나를 향해 웃음을 더 깊게 그렸다.
“그럼 내도 질문 하나 할까. 니는 왜 내를 기다렸나.”
그 질문에 숨이 짧게 들이켜졌다. 머뭇거리듯 입이 살짝 달싹여졌고 의식지 못한 말이 입 밖으로 속삭이듯 튀어나왔다.
“…그러게.”
그러게. 나는 왜 움직이지 않고 여기에 있었을까. …어째서일까.
“그렇네.”
사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결판, 내야지.”
눈앞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임을. 나는 다시금 상기해 냈다. 정태이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짙게 그렸다.
“이참에 다시 소개한다.”
그녀는 자세를 올곧게 펴며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내 이름은 정태이. 정태우가 아니라 정태이다.”
문 너머에서 강렬히 비치는 역광으로 인해 머리칼에서 푸른빛이 발했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엔 총기가 있었다. 몸이 흔들릴지라도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와 같았다. 우연에 의한 부상이긴 하나 그녀는 여전히 강인하게 멀쩡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하게 비치는 빛이 일순 눈이 부셔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굳센 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한순간에 이성을 잠식시킨 분노마저 잊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하건대 당신이 어느 세계든 정태이, 당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글러브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곧장 그녀의 발치에 던졌다.
“음?”
정태이의 시선이 바닥을 구르는 글러브에 향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똑바로 말했다.
“난, 여자고 남자고 상관없어.”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바닥에서 다시 나를 향했다.
“너라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게 중요해.”
설령 네가 내가 아는 사람과 판이하게 다를지라도, 그 본질만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니 나는 그걸로 되었다.
“글러브를 껴. 정태이.”
나는 집업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 던졌다.
“나는 너라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겠어.”
툭, 바닥에 집업이 떨어지며 내 몸은 한층 홀가분해졌다. 더운 열기로 습했던 집업 안에서 몸이 해방되자 다시금 활기가 돋기 시작했다.
“사람, 이라….”
큭, 정태이는 내 말과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그러고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니도 참 웃기는 아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곧 허리를 숙여 글러브를 주웠다. 가볍게 집어 든 그것을 가볍게 허공으로 띄우길 몇 번, 그녀는 그것은 떠오른 공중에서 돌연 탁, 낚아챘다.
“하지만 그 집요함, 나쁘지 않아.”
정태이는 웃음을 짙게 그리며 글러브를 착용했다.
“이번만은 어울려 주지.”
붉은색인 내 반 글러브의 색과 다른 검은색의 반 글러브가 그녀의 손에 감겼다. 그러고선 그녀는 익숙하게 자세를 잡으며 그 낯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패도 고등학교 3학년. 정태이. 도전자의 이름을 묻겠다.”
두근.
익숙하고도 그리운 형상이 안막에 새겨졌다. 피부에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서서히 크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커다래진 박동에 심장께로 손을 대길 잠시, 곧 나는 그 손을 앞으로 내밀어 다시금 주먹을 강하게 쥐며 자세를 잡았다.
“서이나. 도방 고등학교 2학년.”
나의 소개에 정태이의 입가에 미소가 얄궂게 돌았다. 그리고,
탕-!!!!
한순간에 서로의 주먹이 작렬하며 최종 라운드의 시작을 알렸다.
맛보기처럼 부딪힌 주먹이 반작용으로 튕겨 나가며 내 몸이 뒤로 휘청였다. 글러브로 완충 작용이 됐을 터인데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흔들리고 있을 텐데도 이런 힘이라니. 정태이는 힘으로 밀어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곧장 다른 주먹을 날렸다.
펑-!!!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 올려 막은 팔에 직격했다.
“크윽…!!”
이전보다 더 예리하고도 묵직한 공격이었다. 맞은 팔이 아닌 반대 팔마저 아려 올 정도에 내 얼굴이 자연히 구겨졌다. 그녀는 그대로 다른 주먹과 함께 더 연타를 날렸다. 하나하나가 뼈를 저밀 것같이 묵직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다섯 대쯤 버텨 내다가 다시 주먹이 들어올 즈음 재빠르게 몸을 하단으로 숙이곤 스텝을 뒤로 뺐다. 그리고 찰나의 공백이 생기는 틈을 노리며 나는 그대로 뒤로 뺏던 몸을 다시 앞으로 내밀어 그녀에게 레프트를 날렸다.
“!”
정태이가 다가오던 내 주먹이 닿던 찰나,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그러고선 그 팔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내던졌다.
“-!!”
나는 붕 뜬 몸에 당황하지 않고 바닥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러곤 곧장 다가오는 발길질을 옆으로 굴러 피했다.
쾅-!!!!
그녀의 발에 의해 짓밟힌 땅이 으스러졌다. 부서진 파편이 흩날리는 잠깐의 순간, 그녀는 멈추지 않고 옆으로 피한 내게 연이어 발을 내리꽂았다.
콰직-!!!
위협적인 울림이 땅에 퍼졌다. 하나라도 잘못 맞았다간 골로 가기 쉬웠다. 이 흐름을 끊기 위해 나는 곧바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그녀의 다리 쪽으로 내 다리를 날렸다.
훅-! 정태이가 점프로 내 공격을 가볍게 피한 틈을 타 나는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간격을 벌렸다. 하지만 정태이는 그 거리를 허가하지 않을 요량인 듯 곧장 나를 추격했다.
훙-! 훅, 후욱!!!
그녀의 주먹과 다리, 무릎이 내 쪽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빨라…!’
채 반응하기 쉽지 않아 반격하기가 어려운 공격들이 이어졌다. 아까보다 확연히 달라진 스피드와 일격들뿐이었다. 더 이상 봐주는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은 공격. 일부러 맞아서 틈을 노리기도 쉽지 않았다. 나는 손과 팔, 그리고 다리를 이용해 그것을 빗맞히고 뒤로 스텝 하며 피했다.
툭.
“!”
그러다 등이 벽에 닿았다. 어느새 여기까지…! 아차 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정면으로 꽂히는 주먹을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다. 하지만 정태이는 쉴 틈 따위 만들어 주지 않을 생각인지 그녀의 주먹이 내 자취를 연이어 쫓아왔다.
쾅-!!! 빡!! 콰직!!!
벽이 부서지고 근처에 있던 나무 상자가 파괴되며 나와 그녀가 지나간 모든 것이 허물없이 무너져 내렸다.
‘뭐 이런 무식한…!’
거칠어도 너무 거칠었다.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의 틈 따윈 주지 않을 것처럼 속사포와 같은 공격이 쏟아졌다. 위협적인 맹수의 발톱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스칠 것만 같은 공포감까지 아찔하게 전해져 오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수차례, 나는 이내 발에 차이는 묵직한 것에 몸이 주춤거렸다.
아뿔싸.
시야가 좁아졌었나…! 예상치 못한 방해물에 나는 재빨리 가드를 올렸다. 정태이는 그보다 더 위로 주먹을 치켜들어 내리꽂아 그것을 파훼시켰다.
탕--!!!!
“크…읏!!”
꽂힌 힘의 반동에 팔이 한순간에 마비되었다.
“끝이다.”
그리고 무너진 가드를 틈타 그녀는 주먹을 강하게 내질렀다.
‘너무 정직해.’
“-!!”
그 순간 누군가의 어드바이스가 내 귓가를 스쳤다. 나는 정신을 차리며 곧장 손에 잡히는 것을 잡아 그녀의 앞으로 내던졌다.
“!”
정태이는 그 기습에 뻗던 주먹을 멈추며 몸을 뒤로 물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 나뭇조각은 그녀의 앞을 스치곤 닿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를 벌리는 데는 성공했다.
“호오- 돌아 버렸을 때도 정직하게만 공격하더니, 니 그런 것도 할 줄 아나.”
피식, 그에 정태이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꺾었다.
“…누가 조언해 준 게 떠올라서.”
처음이다시피 한 치사한 수법에 손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어 그것을 해소시켰다.
“널 상대할 땐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된다고, 어떤 애들이 말해 줬거든.”
상대방이 살수뿐인 공격을 한다면 나도 응당 그렇게 맞서야 한다고. 그런 말을 한 녀석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