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Final Round (5)
“?”
나는 얼떨떨히 눈을 깜빡였다. 망연히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르고 뻐끔거리기만 하였다.
“어, 어….”
이, 이겼…? 내가, 어, 어? 쉽사리 믿기 힘든 사실에 몸을 굳힌 채 멍청히 눈만 깜빡였다. 고요한 정적이 내달리길 한차례, 곧 커다란 몸뚱어리 하나가 나를 급습했다.
“커헉!!”
격한 돌진에 이상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머리를 치고 오는 아찔한 통각에 눈이 뒤집혔다.
“굉-장하잖아!!! 친구님-!!!”
그러나 이런 내 상황을 모르는 모양인지 내게 격돌한 범인인 고찬영은 그 누구보다 기쁜 듯 얼굴을 반짝이며 내 머리에 제 얼굴을 비벼 댔다. 평소라면 잔뜩 상기된 낯이 참으로 보기 좋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찬영아. 기쁜 건 알겠지만, 제발, 제발 나를 놔줘…!!
“그, 윽, 어…!”
하지만 이 호소는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소리를 내뱉을 힘조차 고통 앞에선 무용했다. 나는 파들파들 떨며 그저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퍽!
“악-.”
그런데 그런 고찬영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거세게 후려쳤다. 고찬영이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아야야,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그 손, 놔.”
돌아보니 반휘혈이 고찬영을 죽일 듯 스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눈으로 죽일 수 있다면 백 번은 죽이고도 남을 살벌함이었다.
“맞아요, 형. 그러다 누나 진짜 죽겠어요.”
그리고 평소 내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이재현도 멀리서 한 수 거들었다.
“어? 헉. 친구님, 괜찮아?!”
그 말에 그제야 내 상태를 돌아본 고찬영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나는 털썩 몸을 바닥에 쓰러트리며 곡소리를 내었다.
“안, 괜찮아…. 이… 자식아….”
진심으로, 장난 아니고 존나 아팠다. 당장 기절 안 한 것만으로 대단한 거니 이런 나를 칭찬해 주길 바란다. 나는 바닥에 누운 채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 댔다.
고찬영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자 반휘혈이 그를 가차 없이 차 버렸다. 억, 하고 고찬영이 모양 빠지게 바닥을 구르고 있자 반휘혈은 그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선 내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선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많이, 다쳤네.”
솜털처럼 가벼운 스침이 조심스럽게 볼을 매만졌다.
“어….”
나는 멍청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반휘혈은 어딘가 개운치 못한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 주었다.
“다치지 말랬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어지는 그의 볼멘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난 그의 눈을 슬며시 피하며 투덜거렸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 이긴 것 자체가 기적인데. 하아….
“됐고, 아무나 나 좀 일으켜 줘. 나 진짜 몸이 안 움직…,”
“으, 으하하하하!!!!”
그래도 다 끝났다는 생각에 피로의 숨을 내쉬며 도움을 요청하던 찰나, 돌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만 굴려 그 진원지를 확인하자 지차용이 유쾌한 얼굴로 크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꼴 좋구나, 정태이!! 굉장하군, 굉장해!! 저 집요한 년을 쓰러트리다니! 그거 하나는 칭찬하마!!!”
“…….”
그 말에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최강혁에게 제압당하고 있으면서도 잘도 떠드는 행태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저 새끼, 말하는 꼬락서니가 영…. 정태이가 이제껏 살려 둔 게 용할 정도였다.
“이젠 후계 소린 입도 뻥긋 못 하겠지! 으하, …어.”
몸만 움직여도 저 새끼 당장 한 대 쥐어박는데, 라고 생각하던 순간 푹, 하고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지차용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다리에 꽂힌 단도 하나를 발견했다.
지차용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고, 그의 시선이 다시 서서히 올라가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엔 인기척 없이 당도한 김율이 있었다. 내겐 등을 보이고 있어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차용을 적막히 내려다보는 묵직한 아우라는 쉽사리 말을 걸기 힘들게 만들었다.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그는 차츰 몸을 숙였다.
촤악-!
그리고 다리에 박힌 칼을 깊게 도려내듯 날카로이 그으며 힘차게 뽑아냈다.
“으, 아아아…!!!! 김율, 김율, 너 이 새끼…!!!!”
“보는 사람이 많아, 지금은… 이쯤으로 끝내도록 하죠.”
김율은 고저 없는 투로 덤덤히 말하고선 최강혁을 보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이젠 그를 놓아주셔도 좋습니다.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놨으니 도망은 못 치겠지요.”
“……흥.”
최강혁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지차용을 놓았다.
“어째서! 어째서냐, 김율!! 정태이, 저, 정태이는 졌다 아이가?!”
“예, 졌지요. 그것도 깔끔하게.”
지차용은 그런 김율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던지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김율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럼 이제 니도 나를 따라야…!”
“그러니,”
지차용의 말이 더 이어졌으나 김율은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단호히 잘라 냈다.
“이젠 당신을 봐줄 이유가 없어졌지요.”
“…뭐?”
지차용의 낯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는 것처럼 굳어졌다. 김율은 그런 그의 낯을 잠시간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내 차분히 손을 들었다.
“말했잖습니까.”
텁. 그리고 그의 손이 그의 턱을 틀어쥐었다.
“당신을 봐준 이유는 당신이 간부이기- 때문이라고.”
“으, 긋…!!!”
“지금 당장 당신 입을 찢어 버리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겨. 지차용 이사.”
홱, 쿵-!!! 강하게 잡았던 턱을 거세게 뿌리치자 육중한 몸에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 모습을 얼떨떨히 보고 있는데 김율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김율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괜히 심장이 쫄리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그가 차분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움직임이 어쩐지 사신처럼 다가왔다.
어, 미친. 어쩌지. 나 진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데.
제 아가씨의 복수라도 할까 두려워진 나는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그런 그를 가로막듯 고찬영이 내 앞을 지켰고, 반휘혈이 내 상체를 일으켜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서이나 양.”
김율은 그런 두 사람을 무심히 무시하며 나를 올곧이 불렀다. 그러곤 우아한 자태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이었다.
“훌륭한 접전이셨습니다. 멋진 경기를 펼치신 당신께 경의를.”
“!”
나는 그 인사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생각지 못한 찬사에 어리벙벙하게 굳어 있으려니 김율은 그런 내게서 몸을 돌려 제 주인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슬슬 일어나시길.”
그러고선 그는 정태이를 깨웠다.
“아가씨.”
하지만 정태이는 그가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확히 카운터였으니까 쉽게 일어나진 못할 거다. 적어도 반나절은…,
“그럼 실례.”
있어야…. 어? 잠깐. 쟤 왜 정태이 위로 올라…타…?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멍청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그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퍽, 하고 내려쳤다.
“?!?!?!?!?!”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김율은 멈추지 않고, 덤덤히 제 주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차, 아니 가볍게? 연이어 후려치고 있었다.
퍽, 퍽, 퍽, 퍽, 퍽.
뭐지, 이거. 혹시 하극상? 하극상이야, 이거?! 아니면 내가 이겼다고 이미 주인이고 뭐고 없는 거야, 어?!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식겁하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도 주먹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덥석.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참 열심히 패던 김율의 손이 돌연 멈추었고,
빡-!!!!!
그의 턱이 강렬한 타격과 함께 위로 솟구쳤다.
“??????!”
난데없는 상황에 다른 의미로 경악하고 있자 우당탕탕 넘어진 김율의 멱살을 거세게 틀어잡는 손이 하나 있었다.
“뒤질래, 새꺄!!!!”
빠악-!!!! 그리고 강력한 주먹이 한 방 더 날아왔다.
“쿠, 쿨럭! 멀쩡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다행은 개뿔이!!! 니 때문에 황천길 들어갈 뻔했다, 마!!!!”
“황천길이라니요. 저는 순전히 아가씨를 깨울 요량으로-,”
“깨우는 새끼가 주먹으로 처때려 쌓나?! 니 솔직히 말해라. 내한테 악감정 있제?!”
“단언컨대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간 아가씨께 배운 대로 했을 뿐입니다.”
“뭐, 이 새꺄?! 아, 잠깐….”
분노로 흥분하던 정태이는 돌연 김율의 말에 멈칫했다. 무언가 떠올린 듯 낯을 굳히더니 이내 표정이 더 험악해지며 그의 멱살을 두 손을 쥐었다.
“니 설마 1년 전에 내가 그렇게 깨웠다고 시위한 거냐, 어?!”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김율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정확히는 1년하고도 3개월 24일 전쯤에 일어난…!”
퍽!!!!
성실히 대답하던 김율의 얼굴이 가차 없이 돌아갔다. 정태이는 그런 그를 툭, 떨구더니 질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하여간 이놈의 뒤끝…, 윽.”
그러다 정태이는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가벼이 고개를 털어 내곤 털썩, 주저앉았다.
“아- 골 때리네, 이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벅벅 하는 그녀의 모습을 어리벙벙히 보았다. 저렇게 문지르면 안 아프나, 이런 태평한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쟤네들 지금 뭐 하는 거지. 묵직하고 근엄함 두 사람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깨졌다. 특히 김율이 말이다.
“잘 거니까 깨우지 마라, 좀. 알아서 들쳐 업고 가든 해라, 마.”
“? 평소에 그런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아, 좀…! …하, 됐다, 마.”
울컥 성질을 내려던 정태이는 곧 짙은 한숨을 내쉬어 신경질은 누그러트리더니 풀썩, 뒤로 누워 버렸다.
“잔다.”
그리고 그 말을 남기곤 진짜로 잠들었다.
“…….”
“…….”
이제껏 태연하던 김율조차 이 상황에 당황했는지 굳어서 선뜻 움직이질 못했다. 그런 내 귀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와아- 졌다니 가오까지 다 죽은 걸까아-?”
“그러…, 뜨왔쉬!!!”
멍하니 대꾸하던 나는 소리 없이 다가온 낯선 인기척에 기함하며 반휘혈의 품에 더 착 들러붙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돌아보자 백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 너 언제 왔어!!”
“방그음-.”
그는 기분이 꽤나 좋은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서열 1위 이긴 거 저어어엉말 축하해애애-.”
그는 말처럼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해죽 웃어 보였다.
“후후. 이젠 나도 덜 찾겠지이~?”
아, 이거 때문이군. 백설은 그간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떠올렸는지 감동과 기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뭐어… 저 녀석이 프라이드가 높긴 했지. 아무래도 후계 자리 때문이었으려나?”
흠. 하고 고찬영이 누워서 자고 있던 정태이를 복잡한 눈으로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김율이 고찬영을 잠시간 보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렇군요.”
김율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