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00화 (300/306)

300. 기회를 붙잡는 자 (3)

…꿀꺽.

나는 벌써부터 칙칙하고 음산해 보이는 학교의 분위기에 침을 삼켰다. 역시 동쪽 최강 고등학교. 듣자 하니 이 학교엔 개또라이 사이코패스가 있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사실 서이수가 일진에 빠지고부터 의식적으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피했다 보니 나는 소식에 둔감한 편이었다. 원래부터 물이 좋지 않아 소문이 흉흉한 학교라서 의식적으로 그 학교 학생들을 보면 피해 다니긴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더 위험해 보였다.

…들어가, 말아?

친구들이나 인터넷을 뒤져 사건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도 방법이란 것은 알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보다 정확한 정보였다. 하지만 덜컥 치미는 두려움에 선뜻 발을 뻗지 못하고 교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일부러 학교까지 빠지면서 이른 시각에 찾아왔건만 이대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조급히 발을 제자리에서 굴렸다.

아, 몰라. 우선 들어가고 생각하자.

뭐가 됐든 고다, 고! 혹시 모르니 핸드폰에 비상 버튼을 미리 눌러 둔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툭-.

그러다 나는 불현듯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리며 사과를 하려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빨려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 빛이 강렬히 내리쬐는 날씨임에도 빛이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어둠을 가진 머리 색과 그와 상반된 진주처럼 새하얀 피부.

아름다운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

꿀꺽. 나는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침을 삼키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분명 그럴진대 어딘가 마주하는 그 눈빛은…,

오싹-.

빛이 없는 암흑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이것은 설렘이 아닌 두려움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 기분에 나는 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위에서부터 시선이 느껴진 듯했지만 곧 앞에 있던 존재는 말없이 움직였다.

‘당신, 운이 좋네.’

그리고 내 옆으로 누군가 속삭이며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그 주인공들은 나와 거리가 확연히 벌어진 뒤였다.

뭐, 뭐야, 저 사람들.

뭔데 저렇게 무서워. 나는 가까이 가선 안 될 존재임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한순간에 닭살이 돋아 오른팔을 쓸었다. 특히나 방금 그 검은 머리의 미남. 그 녀석은 진짜로 위험하다고, 내 본능이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그림자가 스치는 기분이었다.

으으…! 저, 정신 차려, 서이나!

자꾸만 엄습하는 공포심에 떨쳐 내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무서운 놈들도 사라졌으니 나야 땡큐지.

학교 안에서 마주쳤다면 진짜 심장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내가 강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벌벌 떨고 있을 필요도, 내 동생이 저렇게 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옴팡지게 때려서라도 정신을 돌려놨을 텐데. 그리 생각하니 문득 후회가 찾아왔다.

나는 씁쓸히 낯을 가라앉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볼을 쳤다. 그리고 정말로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

돌연 누군가가 내 팔을 붙들었다. 깜짝 놀라 비명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겨우 마음 다잡았는데 누가…!

‘헉.’

그리고 나는 보았다.

‘부탁이에요.’

내 눈앞엔,

‘제 친구들을 도와주세요-!!’

분홍 머리의 천사가 울고 있었다.

***

끔뻑.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찬찬히 깜빡였다. 어느 순간 부상한 의식이 몽롱했다. 나는 흐릿한 눈을 조용히 굴리며 자신이 깨어난 곳을 확인했다.

‘여긴….’

초원?

경계 없이 펼쳐진 푸르디푸른 들판, 그리고 하늘은 그 들판을 축복하듯 쾌청했다. 어딘가 개운한 바람도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하나같이 먼발치에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런가.

이 이질감은 대체 뭘까, 생각하다 나는 불현듯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나, 죽었나….”

분명 트럭에 또 치였던 기억이 솟아났다. 또 트럭이냐고. 나는 짙은 피로감에 얼굴을 북북 문지르다가 문득 눕고 있는 아래가 굉장히 따스하고 푹신푹신하다는 걸 느꼈다.

“이건… 뭐지?”

그러고 보니 눈앞에 펼쳐진 정경과는 다른, 아니 오히려 너무 튀는 분홍빛의 잡초…, 잡초 맞나? 어딘가 털같이 생긴 것 같아 그것을 한 줌 쥐고 있던 중이었다.

[그거 내 털이니 뽑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

끄아아악-!!! 나는 난데없이 울리는 소리에 기겁하며 누워 있던 곳에서 우당탕탕 굴러 떨어졌다.

“뭐, 뭐야! 뭔…, 헙.”

그리고 나는 코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눈앞엔 분홍색으로 둘러싸인 산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뭣….”

뭐야, 이거. 형용할 수 없는 정체를 보자 나는 이지를 잃고 멍청히 입을 벌렸다. 막연한 공포감에 숨도 멎은 채 굳어 있으려니 방금 들려왔던 목소리가 또 말을 걸었다.

[놀랐나 보군. 나름 편하게 해 준다고 본체로 있던 건데. …잠시만 기다리게나.]

그러자 펑- 하고 가벼운 소리가 울리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뿅뿅뿅.

[이 모습은 어떤가? 귀여우니 괜찮겠지?]

그것의 정체는 인형같이 생긴 웬 분홍색 양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내 앞으로 앙증맞은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그것은 앞발 같은 걸 척, 들며 당당히 제 모습을 선보였다.

“어, 귀, 귀엽긴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닌데요?!”

[이 모습도 안 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라고 답답함에 항변하려던 찰나, 다시 한번 펑-! 하고 연기가 주위로 자욱해졌다.

“-그럼 이 모습은?”

흐읍. 나는 눈앞에 닥친 모습에 눈을 부릅뜨며 숨을 멈추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발끝까지 긴 풍성하면서도 방금 전 털과 같이 분홍빛을 지닌 머리칼과 따뜻하게 금빛의 색을 일렁이는… 신화에 나올 법한 신비한 미인이었다.

“이 모습이 그대에게 좀 더 나을까, 어떤가. 서이나.”

금빛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내 의사를 확인했다. 온갖 미남 미녀에 익숙해진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보다. 나는 홀린 듯 멍하니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다 문득 그 누구보다 이질적인 색을 띠고 있는 또렷한 금안을 빤히 보았다.

어, 잠깐만. 그, 금빛?

“호, 혹시… 시프?”

언젠가 이윤에게서 봤던 그 색을 떠올리며 혹시나 싶어 이름을 올리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 내 모습까진 기억하지 못했었나 보군.”

시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 반갑군. 그대, 기회를 잡는 자여.”

고풍스러운 동양식 의복의 소매를 끌어 올리며 입가를 가린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화폭 같아 또 순간 넋을 놓았으나 나는 곧 화들짝 이성을 일깨우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데 그런 내게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그래서, 그대는 어디까지 기억을 떠올렸지?”

움찔. 그 물음에 반사적으로 몸이 잘게 떨렸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슬며시 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대부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명확하진 않지만 필요한 건 다 떠올랐다. 저 세계에서 의식을 각성했을 때부터 줄곧 걱정했던 것. 서이수가 누굴 때리고 다니진 않을까 우려했건만. 결국 학교 폭력의 가해자 중 한 명이란 사실은 맞았으며 그로 인해 감방에 가게 생겼다는 것, 그리고…,

주연희가 자살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최강혁의 앞에서.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내가 모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란 것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윤의 말대로라면 그 주축에 있는 건 백장미뿐만이 아니라-.

‘분명 반휘혈이랑도 연관이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반휘혈 또한 포함되어 있단 사실이었다.

‘휘혈아, 너 그냥 서브 남주가 아니라 악역이었었니….’

당시엔 내가 소식이 둔해 몰라봤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반휘혈이었다. 그리고 곁에서 내게 운이 좋다고 어쩌고 한 놈은 한도훈이었을 터였다. …어쩐지 포스가 남다르더라니. 과거의 잔상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아주 찰나와도 같은 만남이었으나 반휘혈의 존재감이 가장 압도적이었다. 그동안 은연중에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던 것도 같지만, 떠오른 기억 속의 반휘혈의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어떤가. 그대가 원하는 바는 이루었을까?]

한참 마음이 심란해져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시프가 내게 또 질문을 던졌다. 눈을 뜨고 다시 보자 어느샌가 시프는 다시 그 인형같이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 그 모습으로….”

[이게 더 편해하는 듯싶어서.]

어, 그 말이 맞긴 한데. 뭐지, 이 색다른 마이 페이스는. 부담스러웠던 건 맞았으나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원하던 바를 이루는 데엔 성공한 것 같나? 응?]

시프는 뿅뿅거리며 내게 다가와 금빛의 눈을 한껏 반짝이며 물었다. 내 입에서 나올 대답을 한껏 기다리는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뭐. 그렇죠.”

서이수의 갱생. 그것이 이윤과 달랐던 나만의 목표. 그 덕분에 나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세계의 저도 저 맞네요.”

그것은 인소 세계의 나, 라고 단정 지었던 다른 서이나가 ‘나’라는 게 분명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기억이 떠오른 후 다른 세계, 이쪽 세계의 차이가 거의 사라졌다. 확실한 건 둘 다 나라는 사실이었다.

진짜 대단한 패기다, 정말.

무엇보다 어린 나, 라고 부르니 이젠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과거 그 결정을 내렸던 내게 감탄밖에 안 나왔다.

‘할게.’

그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했던 대략의 말들은 기억했다. 나는 이윤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 이후 시프를 만나 그의 조건을 수락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 쪽의 의식이 없는 게 맞죠.’

‘게다가… 이런 저로선 이수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미래를 바꾸는 것도요.’

‘무책임하지만 잘 부탁드린다고 꼭 전해 주세요.’

바로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기억을 잃는 것, 그리고 주 의식을 다른 쪽에 넘기는 것.

무슨 배짱으로 이걸 수락했던가에 대해선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반신반의인 상태였다. 아니 거의 믿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나는 왜 그걸 선뜻 수락했던 걸까? 그리고 그게 사기였어 봐. 그럼 그 이후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는가. 내 선택이긴 하나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을 쓰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

그 삶을 끝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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