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기회를 붙잡는 자 (4)
이게 뭐야, 10대의 패기? 만용? 무식하면 용감하다 뭐 이건가? 서른 살의 영향인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있자니 심하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판타지 같은 일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말이죠? 너무 판타지 아니에요?”
헛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믿기지 않은 현실에 썩소를 지으며 묻자 시프는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 따스한 눈빛에 울컥한 나는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그냥, 그냥 다 같이 행복하게 살면 안 되었던 걸까. 꼬이고 꼬인 관계였다. 이렇게까지 비참해질 만한 선택지밖에 주어지질 않았던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겨우 열 몇 살의 아이들은 그 지독한 삶 속에서 제 운명을 비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혁이가 예전에 각본 같다고 싫다고 하던 게…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나라도 싫다. 그런 삶 따위. 이윤은 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단편적으로 들여다본 그의 삶이 얼마나 건조하며 또 참혹했을지 감당이 되질 않았다.
눈길을 주는 모든 것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은 사물이기도 했고, 그저 평범한 동물이나… 사람이었다. 끝내는 마음에 품었던 여자애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다른 친구들마저 심하게 다쳤다. 눈앞에서 그 모든 걸 목도한 최강혁은 그것을 기점으로 홀연히 잠적했다고 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함에 나는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바란다. 그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다.]
그때 시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면을 파고든 듯 정확히 마음을 건드리는 말에 내 몸이 잘게 떨리었다. 시프는 그런 내 곁에 조용히 앉으며 그 부드러운 몸을 내 쪽으로 기대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불행을 바라는 이들도 존재하지.]
나는 그 말에 팔과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난 이전에 그들에게 이 세계에서 패배했었다.]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거지. 그는 씁쓸히 말을 이었다.
[나로서도 노력은 했다만- 나는 신이 아니기에, 미력한 파수꾼으로선 한계가 있었다.]
다만, 그는 금빛의 눈을 크게 휘며 내게로 방긋 웃었다.
[그대 덕에 이번엔 이길 수 있었다. 그러니 그대에게 보상을 주고 싶어.]
…보상? 나는 그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시프는 그런 내게 다시 웃어 주곤 뿅뿅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곤 툭, 하고 발로 바닥을 두드리자-,
“-!”
풍경이, 바뀌었다.
“여, 여긴….”
나는 망연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 눈앞엔 두 개의 지구가 맞물리듯 맞물리지 않고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선택의 기회를 주도록 하마. 이쪽은 강인한… 아니, 둘 다 강인하고 상냥하니 이쪽은 좀 더 성숙한 그대, 그리고 이쪽은 어린 그대의 세계다.]
시프는 각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키며 그것들을 소개했다.
[어린 그대에게 기회를 주었듯 성숙한 그대에게도 기회를 주려고 한다.]
그가 손짓… 발짓하자 한쪽의 비전이 바뀌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아직 아빠에게서 복싱을 배우기 전의 나였다.
“어, 어….”
놀라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자 시프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떠한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겠나?]
“하, 할 수 있어요?!”
[불가능하면 제시도 하지 않는단다.]
맙소사.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가 발밑을 보곤 기겁하며 다시 일어섰다. 워, 미친. 여기 뚫려 있어! 깜짝 놀라 시프의 털을 꽉 붙잡았다. 시프는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떨어지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지금은 영혼 상태이니까 말이지.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잘 빼내 왔지.]
“예?”
무사히? 잘? 영문 모를 소리에 그를 보자 시프는 흐음, 하고 못마땅한 것을 떠올린 낯으로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마지막에 발악을 했거든. 하여간 질긴 놈들이야.]
“네? 어, 음. 그, 그렇군요….”
뭔 소린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복잡한 이야기가 있던 것 같았다. 더 알고 싶으면서도 더 파헤치면 안 될 것 같은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으나 나는 애써 눈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후후. 궁금하다면 물어봐도 좋다. 나를 만나기 전 그대가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생을 구했는데도 사고를 당한 것처럼. 그런 불행을 바라는 모종의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아, 그렇구나…. 어,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 으음. 하지만 시프가 있으니까 이젠 괜찮으려나. 나는 좋게 생각하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다시 시프를 보았다.
“자, 잠깐만요. 그럼 지금 제 몸은, 아니 저 세계의 몸은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까지 있었던, 어린 내가 살았던 왼쪽의 지구를 가리키자 시프는 당연하단 것처럼 말했다.
[의식불명이다. 이른바… 코마 상태라는 거지.]
잠깐. 그거 거의 죽은 거란 소리잖아!! 저 세계의 영혼도, 이 세계의 영혼도 아직 분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뜻은… 설마,
“저, 저기, 제가 만약 여길 선택하면…?”
나는 어른인 내 세계를 콕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시프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다른 세계는… 돌아갈 수 없는 거지.]
영원히.
“?!”
나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선뜻 나오지 않는 말에 뻐끔거리고 있길 잠시, 심호흡을 크게 내쉰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리라든가, 그, 그런 건…?”
[불가능하다. 적응력이 굉장히 좋았던 탓인지 융합이 잘 되고 말았어.]
시프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나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만약 저 세계의 남은 이들이 염려가 되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한동안 좀 힘들긴 하겠다만… 결국 일어날 테니.]
“…….”
그것은… 기뻐해야 되는 일일까. 조금은 서글퍼해야 하는 걸까. 모순적이고도 이기적인 감정에 나는 순간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잃었다.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나 보군.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그대가 준 다정함을 기억하기에 일어날 거란 뜻이었다.]
시간이 다소 걸리는 이는 있겠지만. 시프는 나직이 말을 덧붙이며 다시 한번 내게 제안했다.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겠나? 마음속으로 어른의 삶을 살았던 그대를 꽤나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숨이 멎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무겁게 내리누를 명치께를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내가 엄마와 아빠와 같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엔 이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른인 내겐 그것이 익숙한 광경이었다. 나는 문득 울컥하는 감정에 고개를 푹 숙이었다.
“어느 쪽도… 다 내 인생이잖아요.”
어떻게 이걸 고르라고 할 수 있는가. 왜 내가 당연히 저쪽을 고를 거라 가정을 내리는 건데.
“가혹하네요, …진짜.”
잠깐 기회가 있다고 하니 혹하긴 했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정할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발을 움직여 어느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으로 가는 건가?]
의외라는 듯 말하는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정리한 세계예요.”
그렇다. 이미 저 세계는 오래전부터 정리했던 세상이었다. 이미 저곳은 내가 죽었다고 여긴 곳이었다.
“…저쪽의 엄마랑 아빠한테 저 잘 있다고 대신 전해 줄 수 있나요.”
씁쓸히 말하자 시프는 그 기색을 읽곤 난처히 미간을 모았다.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 다만 공정성을 위해 필요한 절차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미안한 듯 사과했다. 나는 그 사과에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었다.
[대신 다른 보상을 주도록 하지. 일어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시프는 그런 내게 빙긋 웃으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서이나.]
나는 그 인사에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곤 슬며시 웃었다. 뭐, 됐나.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걸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시프.”
그리고,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사다난하고 한 치 앞도 모를 스펙터클한 몇 년이었지만, 그만큼 내겐 의미가 큰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만들어 준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시프는 내게서 감사를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건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그 눈을 부드럽게 휘며 내게 말했다.
[우연이 아니다.]
네? 반문하는 내게 그는 동화를 읊어 주듯 부드러운 말씨로 나긋이 이어 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하나의 세계에서 드넓은 망망대해와 같은 별의 바다 가운데에 태어나, 수십억의 사람들 중 맺어진 그 하나의 만남이 어떻게 우연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인연 속에서 순간순간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단다.]
그리고 시프는 내게 물었다.
[서이나. 기회를 붙잡는 자여. 그대는 후회치 않을 선택을 하였는가?]
나는 그 질문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죠.”
그렇군. 시프가 내 대답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면 그대 앞의 길을 응원하도록 하지.]
그대 앞의 영원한 축복을.
그 말과 동시에 환한 빛이 주위를 휘감았다. 나는 그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점차 흐려지고 일렁이며 사라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미안, 엄마, 아빠.”
건강하세요. 나는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을 겨우 펴며 그들에게 닿지 않는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나는 웃고 있는 두 분의 얼굴을 마음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이것은 내가 떠올리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상이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 조건이다. 수락하겠나?]
시프라는 존재는 다시 한번 내 의사를 확인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이것이었다. 다른 세계의 강한 사람, 즉 나보다 더 나이도 많고 운동도 잘하는 사람과 융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사람은 죽어 가는 와중이었기에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다른 부분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제 의식은 없는 거네요.”
[그래.]
열다섯 살로 돌아간 시점부터 그 이후의 기억과 내 의식은 가라앉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당장 내 존재는 지금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은 채 돌아갈 것이고 그럼 또 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잠시 말이 없었으나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만 알려 주세요.”
[무엇이지?]
시프의 되묻는 말에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시선을 던졌다. 내 눈앞엔 어린 날의 나와 동생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이전의 기억들은 변하지 않는 거죠?”
눈앞에 있는 신비한 존재는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숨을 작게 내쉬며 피식 웃었다.
“그럼 됐어요.”
나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제게 가장 소중한 추억만은 잊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들고서 환히 웃고 있는 동생을 보며 나 또한 힘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