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02화 (302/306)

302.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1)

그날로부터 벌써 2주일이 흘렀다.

주연희와 서이수의 납치 사건은 그로부터 크게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서열 1위인 정태우의 패배로 인한 탓이었다. 또한 정태우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도 같이 드러났다. 패왕의 패배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 정체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무엇보다 그 패왕을 이긴 것은 다름 아닌 조커라는 점이었다.

또다시 조커의 이름이 부상하게 되었으나 막상 그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커에 대한 인상착의에 관한 논란은 다양했다. 거대한 곰같이 컸다는 말도 있는 한편 생각보다 작았다는 말도 있었다. 어두운 창고 내부에서 싸웠던 증언들 탓에 조커를 특정 짓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 소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주역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알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오늘도 병원의 한 병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쏴아아-.

인기척이라곤 고요한 숨소리뿐인 병실 안. 열린 창 너머로 간지러운 바람이 불어 커튼을 휘날렸다. 화창한 오후의 날씨처럼 그 안에서 잠들어 있는 이의 얼굴도 어딘지 편안해 보였다. 가만히 맞기만 해도 마음을 치유하는 듯한 산들바람이 머리칼을 사락, 하고 건드리며 그녀의 볼을 간지럽혔다.

스윽-.

그러자 그 옆머리를 가만히 넘겨 주는 커다란 손이 하나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뺨에 닿으며 만질 듯 말 듯 매만지다가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

그는 물끄러미 여성을 내려다보다 여전히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 침잠한 분위기로 병실의 문을 열어 사라졌다.

“쟤는….”

그러한 뒷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중년의 여성은 잠시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 우리 딸, 오늘도 잘 있었어?”

그녀는 병실 가운데 누워 있던 이에게 부드럽게 인사했다. 협탁 위로 가방을 올리고 근처에 앉은 후 제 딸의 손을 잡으며 마사지하듯 주무르며 나긋이 입을 열었다.

“휘혈이 또 왔다 갔더라. 매일같이 참 성실하지?”

후후. 나직한 웃음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울렸다. 이나의 엄마, 이정화는 지난 2주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나가 이렇게 잠들고서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딸의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병원엔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제 아들은 상처투성이의 처참한 몰골로 하염없이 수술실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다 하나같이 처참한 낯을 하고 있던 터라 그녀는 슬퍼할 여유도 없이 그들을 달래야만 했다.

“우리 이나는 대체 무슨 일을 했던 걸까?”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도통 깨어나지 않는 통에 다시금 상황은 심각해졌다.

“이 병실도 휘혈이가 마련해 준 거야.”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자마자 얼마 안 가 제 딸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돼 현재 이 특실에 있게 되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나 봤더니 반휘혈이었다. 귀티 나는 도련님처럼 생겼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전에도 충분히 좋은 병실이었으나, 이 병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가장 큰 병원이었기에 얼떨떨해하며 반휘혈을 붙잡아서 거절하려 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받아 주세요.’

그것을 말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더 거절치 못하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참… 조용히 지극정성인 아이야.”

표현이 서투를 뿐 애정이 깊은 아이였다.

“봐, 오늘도 새로운 꽃을 가져왔잖아?”

그녀는 창가에 놓인 꽃병에 장식된 싱싱한 꽃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나날이 새로운 꽃으로 갈아 주는 덕분에 그가 매일 이 병실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정화는 오늘도 조용히 병문안을 오고 사라진 반휘혈의 뒷모습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딸. 인기 굉장히 많더라? 엄마는 우리 딸이 이렇게 친구들이 많을 줄 몰랐어.”

그것은 다름 아닌 서이나가 이렇게 누워 있던 2주간 굉장히 많은 아이들이 이 병실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워 있는 제 딸의 모습을 반휘혈처럼 왔다 간 줄도 모르게 조용히 보고 사라지는 이들이 있는가 한편, 마치 제 딸이 깨어 있는 것처럼 그날의 재밌는 일과를 알려 주는 유쾌한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을 터트리는 아이들까지. 참 많은 아이들이 이 병실을 오고 갔다.

“…이나야, 친구들이 널 많이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물론 아빠랑 이수도, …그리고 엄마도.”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제 볼에 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우리 딸, 평소에도 열심히 하는 거 너무 잘 아는데….”

조금만 더 힘을 내주면 안 될까.

그녀는 제 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불안한 심정을 삭였다.

-까닥.

움직이지 않던 손끝이 미세하게 살짝 떨리었다.

***

짝-!!!

“-!!”

철퍼덕, 가녀린 몸이 강한 타격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버러지 같은 년.”

“…죄송, 합니다.”

백장미는 맞은 볼을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멸시는 거둬지지 않았다.

“분수에 맞게 행동을 했어야지. 그 멍청한 머리는 그년을 닮아 장식이야?! 너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해-!!!”

“죄송합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죄였으나 그녀의 앞에 있던 남자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던지 연신 씩씩거리더니 근처에 있던 화분을 그녀의 쪽을 던져 버렸다.

와장창-!!!

흠칫, 백장미는 곁에서 깨진 화분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부서진 파편의 하나가 그녀의 피부를 할퀴며 지나갔다. 하지만 백장미는 신음 한번 내뱉지 않고 조용히 흐르는 피를 방치했다.

“뭐, 너무 그렇게 화를 내진 말게. 백승호 이사.”

그런데 그 사이에서 낯선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상황과 맞지 않는 여유가 가득 밴 음성에 남자가 움찔 몸을 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귀빈실 내부의 상석에 앉은 남자는 화려한 금발을 가진 미려한 사내였다. 중후한 듯하면서도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미인인 금발의 남자는 푸른 눈을 휘며 말했다.

“이미 엎지른 물이지 않나. 눈앞에 있는 여자애 한 명으로 어찌 될 일도 아니지.”

그것은 맞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지만 느긋하게 입을 열던 이가 빙긋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을 좀 져 줘야겠어.”

“…예?”

멍청한 대답이 백승호란 자에게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금발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일이 곤란하게 됐어. 하필 흑룡파의 후계를 건드리다니. 도전은 좋았지만 성급했는걸.”

금발의 남자는 백장미의 앞에 다다르며 스윽 허리를 숙였다.

“네 행동을 그대로 둔 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였는데, 꽤나 실망했어. 장미 양.”

“…죄송, 합니다.”

흠칫, 백장미는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순진한 것처럼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으음? 아냐, 아냐. 지켜보는 동안은 재밌었으니까.”

“…….”

다만. 남자는 말을 끊고 시린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내 아들도 꽤 화가 났나 보더군. 녀석의 성질까지 건들다니, 이것도 나름 굉장한가?”

그 아이가 그렇게 눈에 불을 켜는 건 흔치 않은데 말이지? 작게 조소한 그는 백장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악독해질 거면 제대로 악해졌어야지.”

어설프긴.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곤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가 보지. 할 일이 많거든.”

그러곤 볼일은 다 봤다는 것처럼 문으로 향하였다. 그런 그 뒤를 백승호가 붙잡았다.

“자, 잠, 잠깐만요!! 회장님!!! 그, 그간 쌓인 정이 있지 않습니까-!!! 어, 어떻게 좀…!”

“아.”

맞아. 금발의 남자는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백승호 이사. 별별 짓을 다 했더라?”

“예…, 예?”

철렁이는 말에 백승호의 몸이 한순간 휘청였다. 그런 그에게 금발의 남자는 눈을 휘며 말했다.

“덕분에 일이 더 빨리 끝날 것 같아 참 다행이지 뭔가.”

그럼 잘 지내게. 하고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금발의 남자는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허망히 지켜보던 백승호는 점차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홱, 하고 백장미를 보았다.

“이, 이, 망할 년이-!!!”

와장창!!!

방 안에 큰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문을 지키던 비서의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로 큰 소란이었다. 한동안 큰 소음이 연이어 들렸고, 이내 잠잠해질 때쯤 남자는 숨을 고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괴물 같은 새끼.”

움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백장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자라면 이따위로 크는 건지!! 그 미친년이 죽고 당장 내쫓았어야 했는데, 젠장!”

남자는 털썩, 근처에 있던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젠 신세 한탄과 비슷한 넋두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한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자신을 도와줄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아버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예-.”

한순간에 가죽이 바뀌고 아양을 떠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산란히 깨진 물건과 쓰러진 아이는 없다는 것처럼 무시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괴물. 미친년.

그 괴물, 당신이 키웠어. 그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온 평생에 걸쳐 학습된 습관이 그녀를 짓눌러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머리칼로 가려진 얼굴 사이로 드러난 입매가 비참히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마음은 진즉에 처참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그럼에도 무던해질 수가 없었다. 참아야 해. 견뎌야 해. 참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내가 왜 견뎌야 하는 거지?

온몸이 아파서일까, 그녀는 습관처럼 되뇌던 말 속에서 문득 어떤 사고가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재수 없어서?’

그런 그녀에게 답을 주듯 어떤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재수, 없어서.

…그렇구나. 네 말이 맞아. 백장미는 문득 깨달은 듯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힘없이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그녀의 눈은 전에 없이 싸늘히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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