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04화 (304/306)

304.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3)

병실은 또 시끌벅적해졌다. 한도훈과 이윤, 그리고 최강혁은 서로를 향해 왁왁거렸고, 서강이는 내게 인사를 하자마자 쪼르르 움직여 병실 한편에 있는 소파에 누웠다. 김시원이 그것을 보고 그의 머리를 내려쳤지만 서강이는 잠시 머리를 감쌀 뿐 요지부동이었다.

시끄러워…. 이것들아.

한순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병실을 둘러보며 나는 눈을 흐렸다. 여기가 특실이라서 망정이지, 다인실이었으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을 거다.

그건 그렇고 이 병실은 한도훈이 준비한 건가? 흠.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다. 나는 당연히 한도훈이 마련해 줬다고 여기며 티격태격 유치하게 싸우고 있는 녀석들을 구경했다. 엄마는 친구들끼리 놀라고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기에 내가 의지할 곳은 침대의 헤드뿐이었다.

“저기, 언니. 혹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한창 한도훈과 최강혁, 그리고 이윤의 신경전 아닌 신경전 같은 만담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내 곁으로 주연희가 슬며시 다가왔다.

“응?”

그게 무엇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주연희는 흘낏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핸드폰을 뒤적여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이 애 알아요?”

나는 생뚱맞은 물음에 눈을 깜빡이다가 그녀가 보여 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에는 시큰둥한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꽤 잘생긴 친구가 있었다.

“이런 거, 지금에서야 묻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 아니면 또 못 물어볼 것 같아서요.”

주연희는 그 사진을 보여 주며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음, 모르겠는데.”

하지만 나는 사진 속에 있는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다. 난처히 갸웃거리며 누구냐고 묻자 예상외로 주연희는 그럴 줄 알았다며 흔쾌히 대답했다.

“제 동생이에요.”

“아, 동생…. 동생?”

“네.”

어쩐지 묘하게 닮았더라니! 나는 신기함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헤헤, 하고 웃던 주연희는 이게 본론이라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사실 얘 때문에 이 학교로 왔어요.”

“……응?”

나는 그 말에 눈동자가 살짝 덜컹, 떨렸다. 하지만 주연희는 묵혀 둔 비밀을 드디어 밝힌다는 생각에 들떴는지 내 기색을 살피지 못하고 제 말을 이어 갔다.

“어느 날 갑자기 도방고 가고 싶다고 난리를 치는 거 있죠? 그러면서 생전 안 하던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웃겼는데요. 저야 공부하고 싶었으니까 좋았지만요.”

나는 그 말에 얼떨떨히 그녀를 보았다. 확실히 형제자매가 같은 학교를 진학하면 등록금이 싸지긴 하다만…. 근데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그 이유가 뭐냐면요-.”

주연희는 그런 내 의문을 정확히 파악하곤 해죽 웃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멋진 누님이 있다고 하던 거 있죠? 1호 팬이 될 거라고 난리를 칠 정도로요.”

“……?”

1호, 팬…? 어딘가 묘하게 익숙했다. 나는 다시금 그녀가 보여 준 사진을 보았다. 모자를 썼음에도 잘난 얼굴은 쉬이 가려지지 않았다.

…음? 모자?

“-!!!!”

헉, 나는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그 야구 배트?! 작년에 반휘혈이 태산고와의 패싸움에 말려들었을 적 본 웃기던 남자애를 떠올리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주연희를 보았다.

어째서 주연희까지 우리 학교에 진학했나 했더니, 드디어 미스터리가 풀렸다…!

‘누님! 저 오늘부터 누님 팬이에요! 나중에 또 봐요!!’

온갖 주접을 다 떨면서 갔던 기억밖에 나질 않아 사진 속의 무뚝뚝해 보이는 청년이랑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팬이 될 거라고 하더니, 진짜 팬이 되었었나…! 놀라운 사실에 눈을 깜빡이다가 확인차 조용히 구석에 있던 안경희를 보았다. 안경희는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어딘가 짐작이 된다는 얼굴로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나는 이 새로운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얘도 나 때문에 내가 다니는 학교에 왔다는 거잖아.

‘나는 도대체…?’

새삼스럽지만 내가 회귀 겸 차원 이동을 하면서부터 굉장히 영향력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연희는 자살을 했었지.’

“…….”

나는 그 무거웠던 진실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다.”

“? 저보단 언니가 더 고생했는걸요?”

내 위로가 갑작스러웠던 탓인지 주연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저 쓰게 웃어 줄 뿐이었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오~?”

“야!! 누가 올라가래!!!”

그때 이윤이 내 침대 위로 머리를 불쑥 내밀며 우리 사이에 난입했다. 그는 마치 자신도 끼어 달라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런 뒤로 한도훈이 잔뜩 성질을 냈지만 이윤은 천연덕스럽게 무시하며 내게 더 엉겨 왔다. 한도훈의 눈이 더 사나워지는 모습에 슬슬 떼어 내야겠다 싶어 손을 드는데 불쑥 그의 머리 색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홍색.

…분명, 시프도 저런 색이었지. 이제는 머나먼 꿈같은 그와의 만남을 멍하니 떠올리다가 나를 흔드는 이윤의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누우나아~ 무슨 대화를 나눴는데요오~ 네~?”

“아무것도 아니…, 음?”

그러다 나는 보았다. 솜사탕처럼… 아니 양털처럼 복슬복슬한 분홍색 머리의 뿌리 쪽에 자라난 검은색을.

어, 잠깐. 저건….

“…윤아, 너 머리 염색이었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심각하게 묻자 이윤은 되레 어리둥절한 낯으로 나를 보았다.

“네? 당연히 염색인데요?”

쿠궁-!!! 나는 돌을 거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먹었다. 당연히 천연인 줄 알았는데…! 주연희가 이 학교로 온 계기보다 더 놀라웠다.

“…그거 염색이었어?”

게다가 나만 충격이 아니었는지 그의 친구들과 한도훈을 제외한 모두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분명 저 색이 나오려면 탈색을 해야 할 텐데 왜 저렇게 머릿결이 좋아 보이는 건데?!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눈을 부릅떴다.

“왜 그 색으로 한 거야? 물론 잘 어울리긴 하지만. 좋아하는 색이야??”

주연희가 이윤에게 신기하단 듯 묻자 그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하는 색이야!”

그러곤 그는 기쁜 듯 배시시 미소 지으며 제 머리칼을 두 손으로 만지며 말을 이었다.

“소중한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한 증표거든.”

“!”

나는 그 말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친구? 그게 누군데?”

“후후, 그게 누구냐며언~ 아아아주 머~찐! 외계인이야!”

응? 외계인…? 이윤의 대답에 주연희가 아리송한 낯을 지었다. 그에 다정한이 끼어들어 그런 게 있다며 능청스레 넘기려 했으나 그 말에 이윤이 기분이 상했는지 볼을 부풀렸다.

“우씨! 진짜라니까!!”

“응, 그래그래.”

다정한은 항의하는 이윤의 모습에 알겠다며 귀여운 어린아이의 말을 듣는 것처럼 따스한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윤은 그게 기분이 더 나빴는지 뚱하니 얼굴을 구겼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슬며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응?”

“잘 어울려, 윤아.”

나는 보이는 바와 같이 푹신하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 이윤은 토라졌던 얼굴이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응.”

네 덕분에 나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고맙다는 뒷말을 삼키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와의 인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지 않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마치 꿈같은 경험이었노라고, 나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 만남을 간직했다.

“내가 여길 뭐 하러 온 건지…. 난 간다.”

“어? 벌써 가? 좀 더 있다가~. 너두 걱정했잖아~.”

한창 한도훈이랑 입씨름을 하던 최강혁은 이내 얼굴을 와락 구기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는 곧장 떠나려던 건지 이윤이 그런 그를 붙잡았다.

“시끄러. 누가 걱정했다는 거야.”

최강혁은 그 말에 낯을 더 대차게 구겼다.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 줘서 고맙다-. 조심히 들어가고.”

멈칫, 내 인사에 최강혁의 발이 일순 멈추었다.

“…흥.”

그러곤 그는 새침하게 반응하고 그대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찬영도 뭔가 떠올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잠깐 나도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뭐 사 올까?”

“맛있는 거…!”

“친구님은 안 되지.”

너무해…. 나는 그 말에 울상을 지으며 조용히 쭈그러졌다. 고찬영은 아이들의 주문을 들으며 금방 오겠다며 문을 열었다.

“아, 저도 같이 갈게요, 선배!”

그러자 그를 혼자 보내긴 뭐했던지 주연희도 거들겠다며 나섰다. 고찬영은 사양치 않으며 두 사람은 함께 나갔다.

***

‘…어라?’

주연희는 현재 동공을 떨며 난처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

“…….”

그것은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최강혁과 고찬영 때문이었다. 나간 시기가 엇비슷해서인지 같이 탄 엘리베이터는 심각하게 적막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게 남의 일같이 느껴질 정도로 어색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찬영이 선배. 원래 이렇게 조용했던 사람이었나…?

유달리 말이 없는 고찬영의 모습에 주연희는 당혹스러웠다. 고찬영은 그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숨 막히는 공기에 그녀만 홀로 긴장하고 있었다.

띵-.

1초가 1시간 같던 잠깐이 지나고 드디어 그녀가 바라던 1층에 도착했다. 주연희는 드디어 한시름 놓겠다는 생각에 얼굴이 환해지며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어이.”

그런데 돌연 최강혁이 그들을 불렀다. 이제껏 말이 없던 그가 부르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최강혁은 물끄러미 그들을 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그러곤 툭- 하고 고찬영의 가슴팍에 무언가를 던지듯 두고 갔다.

“버리든 말든 맘대로 해.”

최강혁은 그 말을 뒤로 볼일은 다 봤다는 것처럼 시큰둥한 기색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

고찬영은 난데없이 받은 무언가를 어리벙벙하게 내려다봤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봉투였다. 그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며 봉투를 열었다.

“…산토리니, 티켓?”

???????????

난데없이 수중에 굴러떨어진 여행 티켓에 고찬영은 어안이 벙벙하게 눈을 떴다. 이건… 대체? 도무지 가늠이 쉬이 되지 않는 최강혁의 돌발 행동이었다. 고찬영은 떠나가는 최강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그거 맞지? 체육 대회 때 그거.”

“네, 맞는 것 같…. 어?”

같이 최강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연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곤 그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고찬영에게 말했다.

“선배! 먼저 매점에 가 있으세요! 곧 뒤따라갈게요!”

“응?”

고찬영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주연희는 빠르게 발을 놀려 최강혁을 따라잡았다.

“야! 야-, 최강혁!”

발이 왜 이렇게 빠른지 겨우 그를 잡은 그녀는 그의 옷 끝자락을 붙잡고 최강혁을 불렀다. 최강혁은 그 목소리에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가려 했으나 붙잡힌 옷에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뭐야.”

당장 꺼지란 말이 목 끝까지 나온 듯한 서슬 퍼런 기색이었다. 하지만 주연희는 이제는 기죽지 않고 당당히 어깨를 펴며 그에게 말했다.

“윤이한테 들었어. 너 원래 열심히 하는 애 아니라며? 혹시… 저건 네 나름의 사죄인 거야?”

최강혁은 그 말에 얼굴을 더 구겼다. 이윤, 그 새끼가 진짜. 그는 속으로 이윤을 욕하며 퉁명스럽게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 냈다.

“착각하지 마. 필요 없어서 준 거뿐이니까.”

…저거, 오다가 주웠다는 말, 맞지? 솔직하지 않은 말에 주연희는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너 진짜 볼수록 특이한 애야.”

하하하, 청명한 웃음소리에 최강혁이 짜증스럽게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하나 주연희는 웃음을 그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덕분에 나도 산토리니 가고. 고맙다?”

“착각하지 말라고.”

그는 잔뜩 가라앉은 낯으로 그녀에게 차갑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연희는 그런 그의 뒤를 졸졸 쫓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왜~? 같은 동지끼리 솔직해지자구.”

멈칫, 최강혁은 그녀의 말에 성큼 걷던 발을 멈추고 싸늘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내가 왜 너랑 동지야.”

하지만 주연희는 그 시선에 전혀 겁먹지 않고 아주 당연하단 것처럼 대답했다.

“그야 짝사랑 동지니까? 너 이나 언니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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