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Happy Ending (1)
“……뭐?”
그의 낯이 음산하게 가라앉았고 붉은 눈이 스산하게 떠졌다. 더운 날씨임에도 온도를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한기를 품은 반응이었으나 주연희는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야 너, 경기 때 계속 언니 쪽만 보고 있었구, 또 언니한텐 꽤 잘 웃어 주잖아?”
주연희는 기억했다. 체육 대회 이벤트 경기 예선전 당시, 최강혁에게 업혀 있었다 보니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이나를 대할 때 그의 기색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은 곁에 있다 보면 못 느낄 수가 없었다.
“그건…! …아, 됐다.”
왜 변명 같은 걸 해야 되는지, 원. 최강혁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하듯 성큼 나아갔다.
“어? 진짜 아니야? 정말로??”
“꺼져.”
하지만 주연희도 물러서지 않고 뛰다시피 따라잡자 최강혁은 얼굴을 험악히 찌푸렸다.
“왜애~, 나도 좋아하는 사람 알려 줄게! 진짜 이나 언니 안 좋아해??”
주연희가 기어코 포기하지 않고 거래까지 시도하려 들었으나 그는 코웃음을 치며 즉시 반박했다.
“들을 필요도 없어. 반휘혈 그 새끼잖아.”
“헉.”
어떻게 알았지?! 한 방에 맞힐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그녀는 당혹스럽게 땀을 흘렸다.
“나, 나, 그렇게 티 나?”
“어, 존나. 그니까 그만 따라와.”
최강혁은 진심으로 귀찮다는 얼굴을 하며 그녀를 쫓아냈다. 그럼에도 주연희는 여전히 떨어질 생각이 없는지 자신의 얼굴만 붙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으아, 어떡해-.”
그럼 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이나 언니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흐잉, 하고 초조해하며 발을 동동 굴리면서 말하자 최강혁은 그제야 발을 멈추어 어처구니없다는 듯 주연희를 보았다.
“넌 그따위로 만족하냐?”
“응? 응.”
주연희는 그와 같이 멈춰 섰다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곤 당연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냥 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거든. 사귄다면 좋겠지만- 왠지 상상이 전혀 안 간달까. 으음-, 좋아하기보단… 동경에 더 가까우려나?”
그녀의 얼굴이 갸웃하며 기울여졌다. 그 모습에 최강혁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이해할 수 없는 낯을 지었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
그러곤 이젠 정말 무시하고 떠나려는데 주연희가 다시 그의 뒤를 쫓으며 끈질기게 진실을 물어 왔다.
“너 진짜 이나 언니 안 좋아해?!”
“아, 진짜 끈질기네!!”
결국 눈을 바짝 세우며 성질을 내게 하는 데 성공한 주연희는 기죽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진짜 안 좋아해? 응? 응? 최강혁은 이 자식이 원래 이렇게까지 집착이 강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녀에게 질려지는 건 금방이었다. 결국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난 반휘혈이랑 같지 않아.”
“음?”
그거…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는 건가? 부정은 맞았지만 어딘가 아리송한 말이었다. 대답을 들었으면서도 개운치 않아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곧 주연희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참 꼬였다.”
“닥쳐. 네 머리가 꽃밭인 거겠지.”
최강혁의 싸늘한 대응이 이어졌지만 주연희는 오히려 그 말에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설마~. 나 그렇게 해맑은 애는 아니야. 그냥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 말에 최강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주연희는 웃음을 살짝 거두며 어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는데도 괴로울 때가 더 많았거든.”
“…….”
“근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주연희는 힘차게 고개를 들어 올려 최강혁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억압하던 것, 음, 왠지 내 인생이 짜인 각본에서 벗어난 기분이야. 이젠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련한 듯 맑게 갠 기운이 만면에 펴져 있었다. 최강혁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각본, 이라. 그는 무표정하니 앞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알 바 아니야.”
“아, 진짜 인정머리 없게!”
야박한 그의 말에 주연희가 툴툴거렸으나 최강혁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어딘가 생각이 잠겼다가 조용히 가슴께를 건드렸다.
이전과 다른 해방감. 그것은 낯설지만….
훗, 최강혁은 입가에 미소를 가벼이 그려 냈다. 그러곤 혼잣말을 짧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나쁘진 않네.”
***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고 밤이 되어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와 줘서 고맙다며 인사하던 중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곤 한도훈만 잠시 남겼다.
“도훈아, 이 방 네가 해 준 거 맞지? 고마워.”
당연히 한도훈이 해 줬겠다 생각하며 감사를 전했으나 한도훈은 내 인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아닌데요?”
“어?”
아니라고?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라 당황하고 있으려니 한도훈의 답변이 이어졌다.
“이 방, 제가 해 준 거 아니에요. 근데 음. 그렇네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어딘가 납득이 간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내 의문만 더 깊어졌다. 한도훈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선뜻 생각나지 않는 후보에 갈피를 못 잡고 있자 한도훈이 짓궂은 미소를 씩 달았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그 누구보다 누나를 사랑하는 반휘혈이지.”
“엥?”
반휘혈? 정말 상상도 못 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한도훈은 아주 즐겁다는 표정을 히죽히죽 웃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러 댔다.
“좋으시겠어요? 벌써부터 지극정성인 약혼자 있어서.”
도훈아, 내가 아주 건강하다는 걸 잊으면 곤란하단다. 자꾸만 약 올리는 저 자식을 한 대 칠까 고민하던 나는 딱밤 한 대로 봐주었다. 그에 아프다고 한도훈이 엄살을 피웠지만 나는 무시하고 병실 안을 새삼 둘러봤다.
‘이걸… 휘혈이가….’
형한테 해 달라고 부탁했나. 근데 왜 이렇게 상상이 안 가지? 나는 의문이 동동 떠오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나 오늘 반휘혈을 못 본 기분인데. 왜 안 온 걸까. 내일이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한도훈이 내게 할 말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왕 남은 거 다른 소식도 알려 줄게요.”
“응?”
그가 알려 준 것은 내가 잠들어 있던 2주간의 소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잠자코 듣다가 한도훈과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한도훈까지 떠나보낸 후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흑룡파는 없어질 전망에 백화 재단의 일부는 최강 그룹이 인수할 거라고….”
이건 그거다. 인소 세계에서 흔히 있는 악역 집안 궤멸. 그런데 막상 이걸 현실로 적용하려니 영 현실감이 없었다.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흑룡파는 정태이가 후계에서 내려오자마자 흔들렸다고 한다. 보스인 정호랑은 정태이를 후계로 계속 세우고 싶어 했으나 정태이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고 내부에서 무너져 나라 치안 문제에 전반적인 영향을 줄 바엔 아예 조직을 와해시킬 생각인가 보다.
한도훈은 그런 그를 늙고 병든 호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글쎄. 나는 남은 기력을 모으고 모으다 한 방을 노리는 노련한 호랑이로 보였다. 아마 한도훈도 그리 생각했겠지만 워낙 꼬인 녀석이니 저렇게 말한 거겠지만.
그리고 백화 재단의 문제는 앞서 말했듯 악역 집안의 궤멸…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고, 빠른 시일 내에 흑룡파 내부 문제가 터지면서 그와 가장 밀접히 관련된 것이 백화 재단, 특히 백승호 이사라는 사람이 주도하는 모든 사업이 주가가 폭락할 것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제물이었다. 흑룡파라면 국내 최대의 어두운 손이었다. 그런 조직이 다른 기업과도 연관이 없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규모가 너무 커져서 국가도 나설 조짐이 보였다고 하던데…. 이건 잘 모르겠다. 굳이 엮이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흐으음.”
생각보다 빠르고 크게 퍼져 가는 양상에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나야, 몸은 괜찮니?”
그때 아빠가 병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다가 문득 떠오른 일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맞아, 아빠.”
“응?”
아빠는 붉어진 눈을 비비며 내 쪽을 돌아봤다. 깨어난 나를 본 직후에 펑펑 눈물을 흘리셨고 좀 진정된 후엔 잔소리를 한바탕 퍼부었다. 이럴 때 보면 서이수는 역시 아빠를 닮은 게 분명했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빠, 저 아빠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
“그래서, 내보고 선수를 하라, 이 말이가?”
정태이는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어젯밤 한도훈을 통해 건네받은 연락처로 그녀에게 곧장 연락했다. 그녀는 내가 연락했단 사실에 좀 놀란 듯싶었지만 빠른 시일 내로 만나고 싶다는 내 말에 다음날 바로 찾아왔다.
“응. 어때?”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게 내한테 어울릴 거라 생각하나.”
그런데 설레는 마음으로 제안을 한 것과 달리 정태이의 반응은 싸늘했다.
“엄청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기죽지 않고 당당히 내 의견을 피력했다.
“넌 분명히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거야!”
정태이와 같이 훌륭한 인재를 국내에서만 썩히는 건 심하게 아까운 일이었다. 나는 눈을 한껏 빛내며 많고 많은 직업 중에 굳이 고른다면 제발 선수를 해 달라고 그녀를 설득했다.
“…니, 원래 이런 아였나?”
정태이는 그런 내 모습을 굉장히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굴리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니는.”
“응?”
“니는 그 선수란 거, 안 하냐고.”
아. 나는 그 말에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다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안 해.”
“와? 내보단 니가 더 잘 어울리지 않나.”
그 말은 한 치의 비꼼도 없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서린 의아함을 빤히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난 즐겁지가 않거든.”
정태이와 싸우고, 정태이를 이기면서 확실히 알았다. 그녀를 이기고 나서도 내 시야는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다신 이길 수 없을 거 같고.’
그간의 경험과 꼼수를 다 사용했으니 이젠 다시는 정태이를 이기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그녀는 틀림없는 천재였으니까. 그러니 약은 생각일지라도 나는 이대로 이 결과에 만족하고 싶었다. 분명 이 사실은 내 평생의 자랑이 될 터였다.
“흐음.”
정태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길 잠시, 곧 호쾌한 미소를 달며 시원히 대답했다.
“까짓거 해 보지, 뭐. 세계 제패, 마음에 드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지는 처음인지라 모르는 게 많으니 부디 많이 알려 주시길.”
정태이의 승낙에 곁에 조용히 서 있던 김율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나는 아자! 하고 속으로 파이팅 넘치게 기뻐하고 있는데 정태이는 씩 웃으며 유쾌히 말했다.
“국저…, 뭐드라, 아무튼 그것보단 재밌겠지.”
“국정원입니다. 아가씨.”
국정, …뭐요? 나는 순간 들려와선 안 될 것을 들은 기분에 동공에 지진이 났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그렇게 정태이가 우리 체육관 소속 간판선수가 되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머지않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