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06화 (완결) (306/306)

306. Happy Ending (2)

***

음.

으으음.

으으으으으으음…!

“왜 안 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정태이와 깔끔히 작별을 마치고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반휘혈이 오지 않는다. 엄마의 말에 따르자면 매일같이 병문안을 왔고, 어제도 내가 깨기 직전에 왔다 갔다고 했는데 어째서 깨어 있을 때 오지 않는 건가.

‘이 여름에! 해가 저물 때까지 안 오다니-!!’

오면 아주 반가이 맞이해 주려고 했는데, 밖은 해가 기울어지고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뭔데, 어제랑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황당해지려던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휘혈이인가?!

나는 재빠르게 침대 위에 방치한 핸드폰을 낚아채며 발신인을 확인했다.

[형님]

형님… 형님? …반휘혈 형님?!

“넵, 여보세요,”

순간 이름을 보고 누구인가 싶었으나 곧 그 정체가 누군지 파악한 나는 황급히 정자세를 취하며 통화를 연결했다.

[아, 쉬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해. 잠깐 통화 가능할까?]

“당연히 되죠. 저 시간 많아요.”

오히려 바쁜 건 당신 아닌가요. 나는 그에겐 보이지 않는 손을 빠르게 저으며 괜찮다는 것을 적극 어필했다.

[얘기 들었어. 크게 다쳤었다며. 깨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지금 해외 출장 중이라 병문안도 못 가고…. 이제야 연락해서 미안한걸.]

“아니 저야말로 이렇게 생각해서 연락을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죠.”

그리고 저 깨어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됐어요. 충분히 일찍 연락을 주신 거니 괜찮습니다. 하며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해외 출장 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서 연락해 주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가 차고 넘칠 정도였다. 설마 이렇게 그에게서 안부 연락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나는 놀란 심장을 붙잡으며 침착히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목소리 진짜 끝내주게 좋네. 나는 왠지 모르게 설레 오는 미성에 현혹될까 싶어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조용히 뺨을 내리쳤다.

[휘혈이는 어때? 반응이 꽤 볼만했을 것 같은데.]

그런데 형님이 불쑥 흥미로운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이 곤궁해져 버린 난 몸을 움찔 떨며 입을 다물었으나, 곧 사실대로 말했다.

[뭐? 안 와?]

“네….”

꽤나 의외라는 듯한 반응에 왠지 속이 더 안 좋아졌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막상 그 주인공은 오질 않는 걸까. 부루퉁하게 입을 다물고 있자 형님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조용하더니 흐음, 하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주체되지 않아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네?”

[기다려 봐. 금방 연락이 올 거니까.]

주체가 안 된다니요? 의아하게 되묻자 형님은 낮게 웃으며 기다리란 말을 남겼다. 그러고서 얼마 안 가 우리는 통화를 끊었고 나는 의문만 깊어졌다.

“…진짜 뭔데?”

어리둥절하니 핸드폰만 보고 있던 나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오는 녀석 생각해 봤자 답도 안 나온다. 산책이나 한 바퀴 돌고 와야지. 나는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고자 병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아, 맞다. 감사 인사하는 거 깜빡했다.”

문을 열기 전, 나는 형님에게 특실을 마련해 준 부분에 대해 인사한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경황이 없어서 놓치고 말았네. 나는 지금이라도 다시 연락을 할까 싶어 핸드폰을 들며 문을 여는데,

툭.

이마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혔다. 뭐지? 아빠인가?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보던 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눈앞엔 반휘혈과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 휘혈… 아니, 형님, 아니…. 누구…?”

처음엔 반휘혈인가 싶었으나 곧 분위기가 다르단 걸 느꼈고, 그다음은 형님인가 싶었으나 형님은 방금까지 해외 출장이란 사실을 떠올린 나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혹시 내가 모르는 형님? 아니면 친척? 30대로 보이니 친척 형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자 맹금류 같은 눈매를 가진 남자는 나를 차분히 내려다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반휘혈 아버지일세.”

“아, 아버님이셨구…. 네?”

방금, 뭐라고요? 나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잔뜩 벌리며 경악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들어가도 될까.”

“네, 네? 예!”

생각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머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나는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안내했다. 하지만 반휘혈의 아버지는 내가 가리키는 자리를 사양했다.

“금방 갈 거네.”

“아, 그러시구나….”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나는 하마터면 내뱉을 뻔한 뒷말을 꾹 삼키며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근데…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도대체 이 누추한 병상엔 어인 일로. 그간 반휘혈에게서 들었던 내용이 있다 보니 이렇게 가시방석일 수가 없었다. 이건 진짜 무슨 상황일까. 혹시 그건가? 내 아들이랑 헤어져. 그거 말이다, 그거. 근데 난 걔랑 사귀지도 않는데…? 당황으로 뇌가 꼬여서인지 눈앞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반휘혈의 아버지는 툭, 하고 내뱉었다.

“궁금해서.”

네? 자꾸만 멍청하게 되묻는 자신의 모습에 염증까지 일려는데 반휘혈의 아버지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평범하군.”

“??????”

뭔데 이거. 도무지 맥락을 따라잡을 수 없어 어리둥절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으려니 그의 시선이 내게서 벗어나 병실을 슥 둘러보았다.

“지내기엔 불편함은 없나.”

“예? 아, 네. 괜찮습니다만…?”

편하다 못해 호캉스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아, 물론 음식은 제외였다.

“다행이군.”

그러자 반휘혈의 아버지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볼일을 다 봤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럼.”

탁.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떠났다.

“???????”

나는 바람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이해 못 할 인간을 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못처럼 박혀 있어야만 했다.

***

다음 날, 나는 심통 맞게 볼을 부풀린 채 뚱하니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언데, 진짜. 왜 안 오는 건데.”

왜냐하면 반휘혈은 끝내 내가 퇴원할 때까지 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아버지까지 찾아왔는데. 이러기냐고.’

어젯밤은 난데없는 반휘혈 가족들의 습격에 정신이 없었으나 정작 그 혼자만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불쾌했다. 나는 짜증스럽게 툴툴거리며 짐을 싸는데 그것을 도와주던 서이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빠?”

“아침이라 그래.”

나는 뚱한 얼굴로 성의 없는 대답을 해 주며 가방의 지퍼를 주욱 잡아당겼다.

“자, 이제 가자.”

“응, 아, 그거 내가 들게.”

짐을 들고 일어서자 갑자기 서이수가 내 짐을 가져가며 문을 열었다. 나는 순식간에 빼앗겨 비어 버린 내 손을 어리벙벙하게 바라보았다.

뭐지. 철들었나…? 동생에게서 본 적 없는 배려에 놀라고 있으려니 빨리 나오라는 외침이 연이어 들려왔고, 정신을 차린 나는 후다닥 병실을 나왔다.

‘흠, 내가 다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나는 어딘가 싱숭생숭한 기분에 서이수를 힐끗 보고 있자 녀석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밥 뭐 먹을래? 엄마가 사 먹으라고 돈 주고 갔어.”

“어, 그럼 나 그럼 짜장면이랑 햄버거랑 피자랑 또….”

드디어 맛없는 음식에 탈출한 나는 바로 음식을 줄줄이 내뱉었다. 그러자 서이수가 질린 얼굴로 하나만 고르라고 잔소리를 하던 순간, 내 핸드폰에서 띠링, 하고 가벼운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잠깐만.”

나는 잠시 걷던 것을 멈추고 알림을 확인했다.

“어…?”

그리고 곧 눈이 크게 떠졌다. 잠시간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곧 서이수에게 황급히 말했다.

“이수야, 식당은 네가 골라. 나 어디 좀 금방 다녀올게-!!!”

“어? 누나? 누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뛰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살피며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무릎을 붙잡고 잠시간 숨을 몰아쉬다가 곧 허리를 쭉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딨지?

그런데 막상 보여야 할 게 보이질 않았다. 내 얼굴이 못마땅하게 구겨지려던 찰나였다. 주변에서 훅- 하고 코를 달콤하게 간지럽히는 향이 화사하게 퍼져 왔고-,

“-!”

눈앞엔 커다란 꽃다발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몸이 뒤로 끌려갔다.

“누나.”

그리고 익숙한 미성이 내 귀에 울린 것도 동시였다.

“퇴원 축하해.”

그러곤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다른 손으론 내게 꽃다발을 쥐게 했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으나 나는 내 뒤에 있는 녀석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뭐야, 환자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게 어딨어?”

뭔가 로맨틱한 상황이 쑥스러워져 괜히 툴툴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반휘혈은 그런 내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더니 제 얼굴을 내 어깨에 묻으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그 말에 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곧 평소의 연장선임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보고 싶단 녀석이 왜 안 오는 건데? 이렇게 사진만 보내고.”

나는 뚱하니 고개를 돌려 꽃다발을 쥐지 않는 손으로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반휘혈이 보낸 메시지는 사진 하나로 굉장히 단출했다. 하지만 그 사진이 우리가 자주 만났던 공원이었기에 나는 이곳을 향해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떨어지려니 반휘혈은 그런 날 물끄러미 보며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함부로 할 거 같아서.”

그러곤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못 갔어.”

억. 나는 그 말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반휘혈의 말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 볼을 한 손으로 감싸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좋아해.”

그러곤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난 역시 누나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그러니까,

“영원히 함께해 줄래?”

다정한 속삭임이 내 귀를 간지럽혔고, 따스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건… 혹시.

그 하염없는 시선을 넋 놓고 마주했다. 반휘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

나는 잠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곤 피식,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살며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나는 툭, 하고 그의 어깨를 짚었다.

“당연하지.”

그러곤 엄지를 척 치켜들며 뿌듯이 웃어 보였다.

“넌 내 소중한 동생인걸? 물론 영원히 함께지.”

덜컹. 그러자 반휘혈의 손이 내 볼에서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미 나는 기쁨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 떨림을 눈치채질 못했다.

짜식, 퇴원하자마자 이런 열렬한 고백이라니. 병문안 안 온 거 봐준다, 정말.

하마터면 진짜 고백인 줄 착각할 뻔했지만 그간의 경험이 나를 도왔다. 나이스, 서이나. 스스로에 대한 흐뭇함과 반휘혈의 열렬한 애정이 기뻐 코를 비비고 있는데 어쩐지 충격을 먹은 듯 멍해졌던 반휘혈은 곧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아니, 이건 내 잘못이니까.”

왠지 모르게 착잡한 목소리에 내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들어 보이자 반휘혈은 어딘가 힘이 바짝 들어간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알려 줄게.”

“? 어, 응. 힘내?”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반휘혈은 잠시 복잡한 얼굴이 되었으나 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가자.”

왠지 모르게 언짢은 듯 보였지만 그와 달리 잡아당기는 팔은 심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옆얼굴을 보다 문득 이전의 삶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죽음과 함께 걸어가는 듯한 이였다. 그 아이는 결코 사람의 접근을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는 그 아이와 달랐다.

“……응.”

그리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만면 가득히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도 다르다. 현재도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도 다르다.

새로이 시작된 삶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또 수차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분노하고 우는 날이 웃는 날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아닌 삶을, 허락받았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내게 있어 소중한 축복임이 틀림없을 터였다.

< 인소에 갇혀버렸다?! > 完

Epilogue. Never Ending Story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흘러 3년 후, 어느 공항 라운지.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엔 한 여성이 있었다. 여성은 챙이 넓은 모자로 머리칼을 하나로 틀어 올려 가리고 그 얼굴엔 선글라스를 썼지만 걸어가면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기품이 흐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라운지 안에 마련해 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털썩.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누군가 앉는 인기척이 들렸다. 힐끗 확인하니 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성은 그에 다시 시선을 돌리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무장하고 어딜 그렇게 가시나.”

“!”

여성은 그 목소리에 선글라스 안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길 잠시, 앙다물어졌던 입이 천천히 열리었다.

“무슨 볼일이야.”

한도훈.

그녀의 나직한 말에 남자, 한도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할 네게 마지막 인사나 하러 왔지.”

“……하.”

그 말에 여자는 헛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마치 모든 일을 다 꿰고 있는 것같이 말하는 그 뻔뻔한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녀는 입매를 비틀며 대답했다.

“그 같잖은 수법으로 알리바이를 만드는가 본데. 내가 직접 알은척하기 전에 조용히 꺼져.”

그녀의 낮은 경고에 한도훈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네가 더 곤란해질 텐데. 난 바로 신고할 거거든.”

“…재수 없는 새끼.”

“천만에. 백여우 씨.”

한도훈이 코웃음을 치며 뻔뻔히 대꾸하자 백장미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겨우 인사 따위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더 대화해 봤자 스트레스만 받을 것만 같았다. 백장미는 서늘한 목소리로 본론이나 얘기하라고 하자 한도훈은 짐짓 서운하듯 대답했다.

“너무하네. 마지막 인사 하러 온 거라니까.”

“네가? 웃기지 마.”

“진심이라니까?”

대화가 자꾸 반복이 됐다. 백장미는 설마설마하며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전히 반복되는 대화에 백장미는 정말 그가 그럴 의도로 왔다는 것을 깨닫곤 믿기지 않다는 투로 낮게 속삭였다.

“미쳤냐?”

그 소리에 한도훈이 유쾌한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백장미는 신경질적으로 낯을 구기었으나 한도훈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흥미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원하던 바를 이룬 기분은 어때?”

“…넌 진짜 재수 없는 새끼야.”

당연한 소릴. 한도훈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백장미는 그 뻔뻔한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천천히 풀며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듯 시선을 던졌다.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야.”

한도훈의 눈동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의 쪽으로 이동했다. 백장미 또한 그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말을 덤덤히 이어 갔다.

“내가 망가트린 인생만 해도 수없이 많을 텐데…. 겨우 가정 폭력범 하나 죽어서야 시끄러워질 걸 생각하니, 참 웃음밖에 안 나와.”

“…….”

한도훈은 그녀의 담담한 말을 말없이 들었다. 그에 백장미는 피식 웃었다.

“참 웃기네. 날 마지막으로 마중 나온 게 겨우 너라니. 나도 인생 정말 헛살았어.”

“복 받은 거겠지.”

가벼운 대꾸에 백장미는 입가에 미소를 더 깊게 그렸다. 그러곤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나랑 비슷해, 한도훈.”

“…….”

아, 그래서 네가 날 찾아온 걸까. 백장미는 이제야 유쾌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 나라엔 더는 볼일이 없다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어. 그게 뭘 거라 생각해?”

“…….”

질문이 던져졌으나 한도훈은 대답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녀의 뒷말을 기다리는 자세에 백장미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여상히 대답했다.

“이 사회에서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손을 더럽히게 될지, 그걸 보지 못해 참 아쉬워.”

과연 넌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까?

백장미는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을 데리러 온 비서와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

한도훈은 그녀가 떠나고 나서 잠시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낯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도훈아.”

그런 한도훈에게로 어떤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어서 와요. 경희 누나.”

고개를 든 한도훈은 제게 다가온 안경희를 보고서야 그제야 미소를 그리며 귀에 대고 있던 폰을 내리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안경희가 불안한 듯 묻자 한도훈은 웃음을 빙긋 그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경희의 굳은 낯은 풀릴 줄 몰랐다.

“이런 얘기, 나한테 알려 줘도 괜찮은 거야? 역시 이나가 와야 됐던 게…,”

한도훈이 폰을 귀에 대고 있던 것은 그리 장식은 아니었다. 그가 연결하고 있던 것은 눈앞에 있는 안경희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연락 기록까지 만들어 내는 철두철미함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지만, 그의 파트너가 된 안경희로선 그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뇨. 누나니까 괜찮은 거예요.”

하지만 한도훈은 단호히 대답했다.

“누나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런 건 누구에게도 말 못 하죠.”

“…….”

안경희는 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도훈은 그런 안경희를 향해 눈을 감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 김에 비밀 하나만 더 들어 주실래요?”

“……응.”

고요한 듯했지만 어딘가 불안감을 야기시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안경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앉았다. 제 옆에 앉은 이를 곁눈질하던 한도훈은 돌연 피식 웃었다. 그런 후 고개를 뒤로 젖히며 여상히 입을 열었다.

“전 딱히 두려울 것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글쎄, 그는 눈을 감으며 씁쓸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조금,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워졌어요.”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아서일까. 다가올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런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까.

막연한 불안감이 그를 좀 먹어 가려던 도중이었다.

“그, 저기…!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 때 안경희가 돌연 소리쳤다.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뜨자 어딘가 비장한 낯을 한 안경희가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보고 있었다.

“이나도, 다른 애들도 다 도와줄 거야, 분명. 그, 그리고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도 힘낼게…!”

힘찬 각오의 말에 한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멍한 눈으로 안경희를 보던 그는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기대할게요. 누나.”

“응…!”

그 열정적인 모습에 한도훈은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노라고, 말이다.

***

그렇게 하나의 악연이 끝을 맞이하였고, 또 다른 곳에선 새로운 인연이 움트는 곳이 있었다.

“읏-샤!”

으으…! 주연희는 창고에 짐을 옮긴 후 허리를 쭉 폈다.

“연희야, 이따가 알바생 면접 오는 거 알지? 부탁 좀 할게.”

“걱정 마세요, 삼촌!”

“그래,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네~.”

그녀는 가게를 나서는 삼촌을 배웅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남았나?”

그녀가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아무래도 손이 궁해질 것 같아 알바생을 새로 뽑기로 했다. 새로운 환경과 만남은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괜찮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는데.”

뭐, 너무 기대하면 안 되겠지만. 주연희는 부디 이상한 사람만 안 오길 바라며 가게를 정돈하고 있던 사이, 딸랑- 하고 가게의 문이 열리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반가이 방문객을 맞이하자 쭈뼛쭈뼛 들어오던 이가 황급히 들어오며 인사를 꾸벅했다.

“아, 넵. 저기 저, 오늘 아르바이트 면접 보러 온 사람인데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깜짝 놀라 시계를 보자 벌써 면접 약속으로부터 5분이 남아 있었다. 주연희는 어서 오라고 말하며 빈 테이블로 손짓했다.

“여기 이력서요!”

자리에 앉자 알바생은 꽤나 긴장했는지 두 손으로 이력서를 내밀었다. 서류 봉투까지 꼼꼼히 준비해 온 자세에 주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보니까 저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렇게 긴장하지 마요. 아,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네! 올해로 스무 살입니다!”

스무 살. 동갑이었다. 주연희는 반가운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꾹 참으며 이력서를 꺼냈다.

“이름은…, 어?”

그리고 그녀는 이력서에 적힌 이름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아, 제 이름이 좀 특이하죠?”

그러자 예비 알바생은 민망한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선우정.”

그에 주연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름을 굴리자 앞에 있던 여성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님이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붙여진 이름이에요. 꽤 괜찮죠?”

“…….”

주연희는 그 이름과 눈앞에 있는 얼굴을 말없이 번갈아 보았다. 미인이 주는 빤한 시선이 무안했는지 선우정이란 이는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저기,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그 조심스러운 말에 주연희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를 향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이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진짜로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엔 더없이 환한 미소가 아름답게 만개해 있었다.

***

“건배-!!!”

그리고 밤의 대학가. 어느 한 술집에서 힘찬 건배와 함께 잔이 올라갔다. 왁자한 술집엔 신입생을 반기는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테이블 위로 음식과 술이 오갔다. 그리고 대학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에 신입생들도 어딘가 긴장된 낯으로 또는 들뜬 얼굴로 눈치를 살피며 그 자리에 적응하고 있었다.

“야, 미친. 저기에 엄청난 존잘이 있어.”

“실화? 구경하고 온다.”

그리고 현재 그 술집엔 소소한 이벤트도 일어나고 있었다.

“너는 안 가?”

“응, 난 됐어.”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도 권해 봤지만 대답한 여성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다녀오란 듯 손짓했고, 친구로 보이는 여성은 아쉽다는 듯 입을 내밀며 자리를 벗어났다.

“잘생긴 게 뭐가 대수라고.”

에잇. 그에 같은 무리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곧 술집의 소음에 묻히었다.

“에이, 술이나 마셔야…,”

쨍그랑-!

그때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술집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방금 떠났던 여자가 사색이 된 채 당황하고 있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실수로 유리컵을 쳐 깨 버렸나 보다. 그녀는 제 실수에 크게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 씨발, 술맛 떨어지게.”

게다가 임자 잘못 만났는지 성질까지 더러운 놈에게 걸려 버렸다. 술잔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더니 여자가 입고 있는 과잠을 발견하곤 눈썹을 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범인대 아냐?

에이, 씨발. 재수 옴 붙었네. 남자의 낮잡고 깔보는 모습에 부딪힌 여자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우와, 저 새끼 장원대야.”

그러자 그곳을 주시하고 있던 테이블의 남자 동기가 질색 어린 낯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저 경기도 외곽에 있는 평범하디평범한 범인 대학교와 달리 장원대는 명문대 중의 명문대로 손꼽히는 학교였다. 하필 지리적으로 위치도 가까워 가끔씩 이렇게 마찰을 빚곤 했다.

“머리만 좋으면 뭐 하냐? 인성 수준 떨어지는데.”

그에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던 동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여자인 동기를 도와주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런데 남자를 막는 한 손이 있었다.

“엉? 왜?”

남자는 자신을 막는 여자를 보곤 의아한 듯 물었다. 그에 막은 이는 도로 앉으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곧 해결될 거 같아서.”

“뭐?”

확신 어린 말에 남자가 의아하게 눈을 뜨자 여자는 히죽 웃으며 저쪽을 턱짓했다. 그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곧 그는 눈을 크게 떴다.

“?!”

뭐, 뭐야, 저거.

남자는 눈앞에 보인 광경에 놀랐다. 다름 아니라 딱 보기에도 장신의 미남이 이죽거리던 남자의 머리에 천천히 피처 맥주잔을 주르륵,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그에 깜짝 놀란 인성 쓰레기가 소리쳤으나 맥주잔을 들고 있는 남자가 여상히 말했다.

“쓰레기통인 거 같아서.”

워. 강하다. 구경하던 남자 동기는 입을 틀어막았다. 저 녀석이 방금 그 소문의 미남인 건 확실한데 딱 보기에도 굉장… 어, 잠깐. 저 얼굴, 어딘가 좀 익숙하지 않나?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쓰레기가 얼굴이 시뻘게지며 소리쳤다.

“야! 그게 선배한테 할 소리…!”

훅-!!

“히익-!!!”

그러나 남자는 돌연 세차게 내리쳐 오는 맥주잔에 어깨를 움츠렸다.

“으, 어…?”

그러나 당장이라도 내리칠 것처럼 다가온 그것은 그에게 닿질 않았다. 쓰레기는 슬며시 눈을 떴고, 곧 코앞으로 다가온 유리를 보곤 짧게 숨을 들이켰다.

“흠.”

한껏 굳어 있는 쓰레기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미남은 여유로운 자태로 맥주잔을 도로 테이블 위로 두었다. 그러곤 볼일을 다 봤다는 것처럼 발길을 돌렸다.

오오오오.

그 모습에 주위로부터 감탄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미남인 것도 모자라 카리스마까지. 도움을 받은 여성의 눈엔 하트가 가득 차 있었다.

“응?”

그런데 그 미남이 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 지켜보던 테이블 쪽의 남자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가. 하고 넘기려는데…

“실례.”

“?!”

미남이, 그들의 테이블 앞에 섰다. 설마 이쪽으로 올 것이라 전혀 생각지 않았기에 그 테이블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미남의 시선이 어느 한쪽에 고정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으응??

그런데 그 주인공은 방금 전, 제게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여자 동기였다. 게다가 동기의 낯은 어딘가 헛웃음을 잔뜩 달고 있어 굉장히 의아함을 낳았다. 혹시 저 두 사람, 아는 사인가? 싶은 순간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눈길이 가서 그러는데,”

미남이 눈을 휘며 동기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남친, 있어요?”

허어어억!!!!! 그 말에 조용히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모두가 기함하며 미남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대놓고 헌팅이라고? 역시 미남은 다르다 이건가! 하며 술렁이는데 동기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봤다고 이러세요?”

헐. 쟤 원래부터 터프한 줄 알았지만 저런 미남한테도 저러다니. 굉장한 새끼. 하며 남자가 입을 틀어막으며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하지만 미남은 그 어처구니없단 태도에도 꿈쩍도 하질 않았는지 아주 당연하단 듯 매끄럽게 대답했다.

“처음부터요.”

“네?”

“처음 본 순간부터요.”

그 돌직구에 동기가 입을 다물었다. 굉장히 당황한 듯한 그 얼굴이었으나 미남은 쉬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말했잖아, 좋아한다고.”

허얼. …어, 잠깐만. 갑자기 웬 반말? 하고 남자 동기의 눈썹이 의아하게 찌푸려지는데, 아까까지 살살 웃고 있던 낯은 어디로 내던졌는지 미남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받아 주는 게 어때? 이나 누나.”

?! 테이블은 다시금 조용한 혼돈에 휩싸였다. 정작 그 혼란은 일으킨 미남은 태연하기만 했다.

“…….”

그리고 그 고백을 들은 당사자, 서이나는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너도 참… 끈질기다.”

“새삼스럽게.”

“그렇긴 해….”

어휴. 서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피식 웃음을 흘리곤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우선, 밖으로 나갈까?”

나가서 천천히 얘기를 해 보자고.

아무래도 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 인소에 갇혀버렸다?! > Epilogu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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