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김수혁은 히어로판타지의 스토리 모드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고, 동시에 중반 이후부터는 전투 요원인 히어로들에 비해 천대를 받는 ‘장인’임에도 그러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철혈의 대장장이. 오직 완벽한 장비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헤파이스토스의 환생.
분명 그러한 인물이었을 터다.
주인공, 플레이어 일행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며, 맹목적인 선(善)의 모습과 그 특유의 장인 정신 덕분에 인기도 상당히 많았던 캐릭터.
“저, 저기…….”
과연 그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수혁은 얼굴을 붉히고는 그답지 않게 더듬더듬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호, 호에에…… 븝미쟝 장비를 사러 온 거시애오…….”
당장 대장간이 엉망이 되고, 본인은 다리까지 다친 마당에 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저 나를 바라보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
……나름 게임 플레이어로서 김수혁의 마초다운 캐릭터를 좋아했는데, 완전히 깰 것 같다.
아니, 무엇보다 그가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부대끼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런 모습이 되긴 했지만, 남자 안 좋아한다고, 십탱.
김수혁은 그런 내 기색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저 동네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장비라면 뭘 원하시는 건가요? 제, 제가 이래 봬도 나름대로 실력은 괜찮은 편이라. 저기 번화가에서 장사하는 인간들보다는 훨씬 잘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더듬더듬 말하지만, 결국은 자기 PR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이기는 했다.
나는 게임에서 김수혁이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나이를 덜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취향이 내 외형인 다나 크리스틴 쪽인 건지.
그는 마치 오랜만에 첫사랑을 만난 남자처럼 부산스러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머리가 차게 식었다.
원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캐붕이야, 플레이어로서 조금 충격받을 만한 것이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자주 겪을 일일 테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질문이었다.
김수혁은 아무래도 내게 호감이 있는 듯했으니, 어떻게 살살 꾀어 본다면 적당히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옵바야가 그렇게 잘하는 거애오?”
“그, 그럼요! 이 근방에서는 제가 제일 잘 만들 겁니다!”
이 근방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그 정도인가.
김수혁은 후일 세계 기준으로 따져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된다. 그것은 그의 노력과 동시에 여러 가지 기연이 겹쳐 성장한 것.
당장 그 능력을 내가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 스틸하트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결심이 들었다.
좀 역겹고 속이 부대끼고 메스껍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뒤따르더라도, 김수혁은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 방법은 너무나 명확했다.
“븝미쟝…… 옵바야한테 부탁해도 될까오? 방어구 하나만 만들어 주새오!”
“당연하죠! 제가 최고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다른 것 할 필요 없이 이 컨셉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최대한…… 이렇게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말투와 행동들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헤벌쭉해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있는 김수혁.
나는 그를 향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븝미쟝은 아가야애오…….”
“……?”
“아가라서 돈이 별로 없는 거시애오…….”
“아.”
김수혁은 그제야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었는지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는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멋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돈 많습니다! 원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 대가를 받지 않는 게 제 신념이기도 하고요!”
그 말은 진실이었다. 김수혁은 그 드높은 에고를 방증하듯, 실력이 되는 이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가격을 높여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그 김수혁의 ‘실력이 되는 이들’ 그룹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 실력이 무슨 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제작 기간은 한 달 정도 걸릴 겁니다.”
“호에에엥?”
어찌 되었든 잘 풀려 가는 분위기에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이어진 그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발, 그렇구나. 제작 기간, 그게 문제였다.
내가 지금 방어구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3월, 아카데미에 입소하기까지 저레벨 필드를 돌며 스펙 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 정도의 기간이지만, 그동안 스펙 업을 시켜 놓으면 좋은 아카데미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니까.
기왕이면 히어로판타지에서 플레이어가 다니게 되는 ‘펜타곤’ 내지는 그 라이벌 아카데미인 ‘캐슬’ 정도에는 들어가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정작 방어구 제작 기간이 한 달이라면…….
물론 방어구를 공짜로, 그것도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만들어 준다는 것은 큰 행운지만, 당장에 내 계획이 어그러지게 되는 것이다.
“더…… 빨리는 안 되는 거시애오?”
“그럴 순 없죠! 물론 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여러모로 질이 좋지 못할 거고…… 그건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김수혁은 신념으로 가득 찬 표정을 내비쳤다.
이렇게 되면 저기 스틸하트의 다른 가게라도 가 봐야 하나.
김수혁한테는 돈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적당히 품질이 괜찮은 방어구 한 벌 정도는 살 돈이 있었다.
하유우…….
한숨을 내쉬자 김수혁의 안색이 변한다.
그러곤 잠시 우물거리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내게 급하게 말했다.
“혹시, 당장 필요하시다면 연습용으로 만들던 습작이라도 드릴까요?”
대장간에서 만들던 습작?
그 이야기를 듣자, 순간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에? 그래도 되는 거시애오?”
“그럼요!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후다닥 자신의 대장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이 엉망이 된 게 내 탓이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인가.
사실 좀 신기하긴 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반했다고 자신도 다치고 대장간도 엉망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런 태도라니…….
특성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이제부터 활성화 항목과 비활성화 항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해금되지 않은 능력은 자동으로 비활성화 처리됨).
작은 의문에 턱을 괴고 있던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성 숙련도…… 그게 갑자기 왜?
“아.”
그때서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름부터가 이상한 내 특성.
그곳의 하위 항목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븝미쟝은 짱짱쎈 언냐야 옵바야들이 조와해여!
나는, 그 항목의 상세 설명을 눌렀다.
그리고 김수혁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사용자 다나 크리스틴에 대해 ‘강자’들이 맹목적인 호감을 가진다. 특성의 숙련도가 높을수록, 대상의 능력과 가진 바 재능이 출중할수록 그 정도가 배가된다.
…이거, 방어구 받고 나면 바로 비활성화로 전환해야겠다.
* * *
“우에우…… 대장장이 옵바야는 변태애오…….”
나는 스틸하트에서 빠져나왔다. 볼 일은 다 봤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가 훨씬 쉬웠다. 부러 불쌍한 표정으로 김수혁에게 이곳에 들어올 때 겪었던 일들을 말하니, 마치 자기 일인 양 격분하며 출구까지 에스코트를 해 줬다.
여러모로 김수혁한테는 상당히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븝미쟝은 아가야인데…… 이거는 아가야가 입으면 안 대오…….”
나는 김수혁이 준 그 습작이라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대장장이가 만든 ‘방어구’라고는 보기 힘든 디자인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짧은 프릴 드레스. 대장장이가 무슨 드레스를 만들어?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의 ‘장인’들은 재단사니, 대장장이니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으니까.
특수한 재료들도 넘쳐 났고, 일정 수준 이상이 된다면 재단사가 철을 짜고, 대장장이가 천을 담금질하는 기적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드레스의 디자인이었다.
나는 최근 외출할 때 일부러 편한 옷만 입었다.
어쨌든 내 몸이 아니고, 다나 크리스틴의 몸이었으니 훨씬 덜하긴 했으나…….
내가 여성용 의류를 입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인터넷에서 ‘브라 착용법’ 따위를 검색할 때마다 내 존엄성이 깎이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드레스의 디자인을 보니, 정신이 멍해질 수밖에는 없었다.
분명 디자인 자체는 상당히 세련됐지만, 너무 짧고 노출되는 부위가 많았다. 심지어 등과 쇄골 부위는 푹 파여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이걸 지금 던전 출입 때마다 입으라는 말인가? 나는 제정신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와와…….”
물론 내가 불평하는 건 디자인뿐이었다. 성능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제 막 각성한 히어로가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장비였다.
아니, 그 사람은 왜 굳이 이런 디자인으로 만들어 가지고는. 드레스와 세트로 딸린 검은색 장갑과 망사 스타킹을 보니 정신이 아찔했다. 이런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던가.
“헤우으으…….”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까지도 갈등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진짜 이걸 입고 나가야 하는 것일까.
꽤나 긴 시간 고민했고 답은 정했다.
물론 그 답이란, 최종적 결론이 아니었다.
“일단…… 입어 보는 거애오…… 옵바, 언니야 들 앞에선 부끄러운 거야요…….”
집이니까, 일단 입어 보자.
일단 입어 보고 나서 결정하자.
그것이 가장 현명한 결론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때려치우고 말면 된다. 다시 스틸하트에 가서 다른 장비를 사건 뭘 하건.
나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방으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걸쳤다. 확실히 여성복이라, 뭔가 입는 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영 익숙지가 않았다.
“하와와.”
고생 끝에 나는 옷을 다 입을 수 있었다. 맨살이 다 드러나는 드레스. 이게 강철로 된 갑옷보다 방어력이 뛰어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게임 세계관이니까.
“호에에.”
나는 다 입음과 동시에, 마력이 증폭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드레스에 박혀 있는 ‘부여’는 마력 증폭(D+)과 물리 방어(C). 당장 팔고자 한다면 수천만 원은 거뜬히 될 만한 장비였다.
체감을 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 조금 민망하고 자괴감이 들면 어때. 던전 갈 때만 잠시 입으면 되지.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치자,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호에에에…… 아가야가 입기애는 너모 야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