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애기븝미쟝이 되었다-29화 (29/172)

#29화. 븝미 빠워!

히어로 판타지에서 몬스터를 조우할 수 있는 장소는 두 개가 있다.

먼저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필드. 수준이 같은 몬스터들이 랜덤으로 리스폰되는 필드는 신기하게도 그 구역이 딱딱 나뉘어 있었다.

29등급 몬스터는 여기, 5등급 몬스터는 여기.

그것은 분명 게임사가 게임 플레이의 편의성을 고려해 만들어 낸 설정이겠지만…… 어쨌든 게임 내 스토리상에서 개별적으로 그 이유를 언급한다.

해당 등급의 몬스터만 견딜 수 있는 특수한 마력장이, 필드에 나타난다나.

이따금 타 등급의 몬스터가 필드에 나타나는 경우, 그건 마력장을 견딜 수 있는 돌연변이라는 설정이었다.

실제로는 이벤트 때문에 억지로 집어넣은 설정이겠지만…….

“하와와와…….”

그 필드를 제외하고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또 다른 공간, 그것은 바로 던전이었다.

필드와 같이 기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랜덤으로 지역 생성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수준 역시 일정하지 않다.

하위 몬스터들이 우선적으로 침입자들을 맞이하고, 높은 등급의 고위 몬스터가 보스룸을 지키고 있는 형식.

히어로들은 필드보다 이 던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필드는 단지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마나석 내지는 육신 그 자체만이 재화로서 변환시킬 수 있는 전부지만, 던전은 자체적으로 클리어 보상이라는 게 존재한다.

또한 던전 내에서만 발견 가능한 여러 광석이나 채집품, 드물게는 유물이나 보물 같은 것들도 있었으니.

그렇기에 던전은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그 공략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 개인이 던전을 공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보니, 자신의 길드에 팔거나, 무소속이라면 타 집단에 팔아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리아의 길드가 이번에 탐사하기로 한 던전의 경우, 하위 길드원 중 한 명이 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길드에서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공략조에 던전 공략권을 넘긴 상황.

나는 바로 그 던전의 탐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서울 근교의 한 벌판. 아직까지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워낙 던전 발생 빈도가 높은 지역인지라 아예 비워 놓은 곳이다.

“다나! 이리 와!”

“호에에에…… 알겠서얌…….”

먼저 와 있던 일리아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어 댄다.

나는 이내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물론, 달려간다고 해도 그 속도가 터무니없게 느리긴 했지만.

“헤응…… 헤으응…… 헤엥…….”

신음성을 뱉어 내며 도착하자, 그녀는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슬슬 공략 진행하려던 참이었는데. 안 와서 되게 걱정했거든.”

“미녀는 잠꾸러기인 거애여…… 븝미쟝은 미녀인 거에얌…… 븝미쟝은 잠꾸러기애오…….”

그냥 늦잠 잤다, 한마디가 이렇게 나온다.

일리아는 내 헛소리에도 마냥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다나가 젤 이쁘긴 하지.”

그러면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부모님한테나 들을 법한 말을, 열일곱 소녀에게 들으니 참 기분이 묘하다.

원래 내 나이 같으면 얘가 한참 어린앤데. 키부터 차이 나서 그런가, 가끔 나보다 진짜 나이가 많은 건가, 착각하게 된다.

푸르르르.

나는 이내 고개를 털었다.

아무리 이렇게 변하긴 했어도, 정신까지 잡아먹히는 건 안 되지.

당장에 일리아가 이렇게 애처럼 대하는 것도 그만둬야 할 행동이었다. 이게, 날 자꾸 퇴행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언냐야!”

나는 단호한 얼굴로 외쳤다. 일리아는,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봐서 의아한지, 얘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다나? 무슨 일 있어?”

“븝미쟝…… 애기는 맞는데…… 그러니까 애기인데 애기처럼 생각하지 말아 주는 거애오…….”

애처럼 대하지 말아 달라.

한마디를 말하려고 하는데, 자꾸 육체와 정신이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개떡같이 말했음에도, 일리아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 그래? 싫구나…… 미안해…….”

일리아는 크게 충격이라도 받은 듯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내게 손을 가져가다 오므리며 땅을 바라본다.

아니, 시발.

이러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당장 여기 데려와 준 것도, 내게는 별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굉장히 힘을 써 준 것일 터였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리아에게 다시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이애오오, 븝미쟝은 언냐야한테 이쁨받는 거 조와하는 거애얌!”

“그래? 진짜지?”

“그럼여어.”

일리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밝히며 이내 나를 들어 올려 껴안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냥 몸을 맡겼다.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 하고.

그렇게 일리아랑 놀고 있던 중, 이번 공략조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일리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얼굴을 평소처럼 굳히고는 말했다.

“공략 준비는 다 되었나요.”

“네, 이제 인원들을 통솔해서 공략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친구분과 아가씨는 후방에 배치하도록 구성을 짜 놨습니다.”

“위험 요소 없는 거 확실하죠? 나 얘, 조금이라도 다치는 거 못 봐요.”

“당연합니다. 절대 작은 부상이라도 당할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공략조의 대장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본대로 향했다.

이렇게 보니까 일리아가 한 중견 길드장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이 금방 와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상 이 세계관에서 한국이 세계 굴지의 히어로 강국이라는 설정이 있어서 그렇지, 일리아네 길드 정도면 세계급에서도 상당히 대우받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펜타곤 내에서 나츠키나 신하연 같은 다이아 수저들한테 은근히 무시받는 그녀라도, 실상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엄청난 금수저였다.

새삼, 뭔가 거리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이쪽 세계건 원래 세계건 금수저랑은 거리가 상당히 먼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거리감은, 일리아가 내게 볼을 비비며 사라졌다.

“너무 찰떡 같아. 부드러워…….”

“호에에에엥.”

……그렇게 공략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참을 만져졌다.

*    *    *

던전의 외부 모습은 그저 일반적인 동굴의 입구와 같았다. 다만 그것이 뜬금없이 나대지 위로 불룩 솟아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30인 제한 던전이기 때문에, 전원이 모두 제때 들어와야 혹시나 모를 외부 침입자를 막을 수 있다. 방심하지 말고 서로 잘 살피도록.”

이따금, 던전 공략 때 몰래 숨어드는 빌런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략 1~5명 정도로 팀을 짜서 던전에 잠입해, 히어로들을 학살하고는 했는데 사실 이번 공략에서는 그리 위험이 크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이 공략조, 명단과 그 히어로 순위를 싹 훑어봤더니 평균 15등급 정도의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치고 과하게 강했다.

아마도 길드장의 외동딸인 일리아가 직접 참여하다 보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정말 대형 조직의 간부급 정도 되는 빌런 혹은 그 바로 아래 단계의 이들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에야 대적해 낼 수 있었다.

길드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공략조 대장의 말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조차 절차상 말하는 느낌이었고.

그 뒤로 몇 가지 안내 사항을 말한(길드원들보다는 내게 설명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장은 이내 진입을 지시했다.

나 또한 끝 무리에서 길드원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장소가 바뀌었다.

아무래도 겉에서 본 것과 같이 일반적인 동굴의 형태는 아닌 듯한 모양이었다.

사실 던전의 외형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 입구에 숨겨져 있는 포탈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화르륵!

던전 진입 이후, 각자 대원들은 횃불을 붙여 들었다.

손전등과 같은 물품은 이곳에서 작동이 되질 않았으니까.

마법사들의 광원을 띄워도 되지 않나, 할 수도 있지만 당장에 횃불도 일반적인 횃불이 아닌 몬스터의 기름을 태워 붙이는 것이라 훨씬 밝았고, 마법사들의 마력은 공략조원 한 명 한 명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이 켜지며 드러난 던전의 내부 모습은 석벽들로 온통 점철된, 꽤나 정돈된 공간이었다.

이런 던전, 그다지 흔치 않은데.

하지만 공략조는 이미 설명을 들은 모양인 듯,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나와 일리아한테도 말해 준 사실인 것 같지만…… 서로 살을 비비며 노느라 제대로 듣지 않았다.

“전열 정비하고 내부로 진입한다. 이석원, 장경철. 선두에 서도록.”

공략조원들은 이내 열을 맞추며 섰고, 나는 그냥 뒤에서 멀뚱히 그 광경을 구경했다.

이거 은근히 뻘쭘하다. 남들은 다들 부산한데 나만 할 일이 없으니.

일리아는 그런 내 눈치를 알아챘는지, 손을 잡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냥 견학하러 온 거니까, 안전만 생각하고 있어. 어차피 우리가 낄 데가 아니기도 하고.”

“알겟서요, 언냐야!”

그녀는 내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이내 함께 공략조를 뒤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의 몬스터가 그 면면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굉장히 흉측했다.

끼기긱, 끄에에엑!

그건 거미처럼 생겼지만, 그 다리가 무려 14개가 달린 기괴한 절지류 몬스터. 저게……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12등급 필드에서 나오던 몬스터 같다.

혹시 이런 애들 나온다는 것도 미리 이야기해 줬나? 나는 그 흉측한 몰골에서 조심스레, 눈을 떼고 일리아에게 물으려 했다.

“언냐야?”

“…….”

“언냐야?”

“어, 어?”

그녀는 마치 얼이 빠진 사람처럼 굳어 있더니, 내가 팔을 잡고 흔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일리아 얘, 징그러운 거에 많이 약하지.

이건 그녀의 고유 설정 중 하나였는데, 귀여운 것들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만큼, 태생적으로 징그러운 생명체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고 또한 일종의 공포증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막상 진짜 고어스러운 광경에는 다른 이들보다 내성이 있으면서.

“하와와와, 마나 씨, 저것들 좀 치워야 할 것 같은데얌…….”

하지만 이 육체는 아무래도 좀 반대인 모양이었다. 그때는 남의 피도 아닌 내 피를 보고도 기절했지만, 저것들을 봤을 때는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긴 했으나, 정신력에 무리가 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금 도와줘도 상관없겠지.

나는 후방에서 마나를 응집했다. 아무래도 저쯤 되는 몬스터한테는 웬만한 마력으론 타격을 줄 수 없을 것이 뻔했으니.

아마 일리아가 저 녀석들이랑 싸운다면 수 초 이내에 초살을 당할 것이었다. 나 또한 단독으로는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안전한 위치에서는 저놈들에게 타격을 줄 만한 단 한 발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내 손안에 본신 마력의 8할이 응집되었다.

사용자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안전하게 응집시켰건만, 이 약한 육신은 그 마력을 유지시키는 것마저 버거운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날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마나 씨 혼내 주는 거야요! 븝미 빠워!”

내가 사용한 것은 에너지볼트. 이전에 마탄을 순순히 날리던 것보다 위력이 상승한, 정석적인 마법 수식에 따라 만든 마력 구체였다.

이내 우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구슬은 거미 몬스터에게 적중했고,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콰앙!

그 소음에, 한창 전투를 벌이던 이들도 당황한 듯 그 방향을 바라봤다. 내 본신 마력의 대부분을 가져다 쓴 저 한 방이, 다른 마법사들보다 강했던 탓이었다.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아예 박살이 나 버린 거미의 시체. 다리 몇 개는 잘려져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광경에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와와와…… 마나 씨 수고한 고애오.”

나는 그저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리며 일리아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얘 괜찮으려나.

아마 평소대로라면 내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으에…….”

그녀는 그 처참함에 아예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주르륵.

침까지 줄줄 흘리면서. 아예 얼이 빠져 있는 모습.

아무래도, 나보다 얘가 먼저 기절할 것 같은데. 나는 남아 있는 마력으로 진정 마법을 사용했고, 그때야 일리아는 원래 안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