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당연하지만 히어로들은, 특히 생도들은 철인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들 평범한 정신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주어진 사명,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온 ‘히어로는 일반인들을 지켜야 한다’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었으므로, 비교적 선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나조차,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츠키가 이곳에서 게임을 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잠시 부정하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했다. 일리아나, 최근 같아서는 J 정도야 이제 게임 속 인물이라는 거리감이 없었지만, 아직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런 거리감이 있었다. 되레 원작에서 언급이 많지 않았던 사람이나, 아예 엑스트라면 그냥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나츠키 언냐야…… 한 판 해 볼까여.”
어쨌든 이렇게 된 바에야, 그녀와 한 판 게임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나츠키는 이 시뮬레이션 내지는 격투 게임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웬만한 근접 계열 히어로들은 물론 다 잘하는 편이었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전투를 하는 데에 필요한 센스를 써먹을 수 있는 게임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나는 이 시뮬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신체를 움직이는 테크닉 따위도 따로 배운 적이 없었고.
다만 나는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센스가 항상 있었다. 그리고 뭣보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의 경지를 일부 가져올 수 있다.
결속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겨우 게임 조금 하는데 이렇게 특성까지 사용하는 건 좀 치사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나츠키는 좀 이기고 싶다. 정확히 말해서는 이기는 것 그 자체보다 이기고 좀 골려 주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오른다.
원래 내가 이런 성격은 아닌데, 희한하게 나츠키는 그러고 싶다.
골려 먹기 좋게 반응해 주는 그녀가 잘못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특성을 적용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일리아였다.
“헤으윽…… 언냐야.”
머릿속으로, 이전에 떠올랐던 그녀의 검에 대한 생각과 자세. 의지, 신념.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들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숨을 한 차례 내뱉고, 시뮬레이션에 접속해 검을 들었다. 이윽고,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나츠키에게 싸움을 신청했다.
[상대가 수락했습니다!]
이윽고 떠오르는 메시지. 아무래도 나츠키는 지금 처음 보는 아이디가 겁도 없이 대련을 신청한 것에 대해, 굉장히 분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길길이 화내는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안 봐주는 고애오 언냐야…….”
* * *
“하아…… 짜증 나게 진짜.”
펜타곤 내에 있는 시뮬레이션 센터. 나츠키는 오랜만에 그곳을 찾았다. 원래 입소 초반에 자주 머리를 식히러 들렀던 곳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수업들이 점점 빡세지자 최근 들어서는 오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자꾸만 떠오르는 잡념에 머리를 비우러 이곳에 왔다.
그 잡념의 정체는 최근에 일어난 일. 그리고 그곳에서 봤던 사람 때문이었다.
분명, 그 사람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이였다. 적어도 펜타곤 생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펜타곤 안에 들어왔는가.
처음에는 그게 잘못 본 것 내지는 꿈이라고 치부했지만, 갈수록 더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만 갔다.
혹시, 그 사람이 이번 일을 꾸민 빌런인가? 그렇다면 왜 자기가 저지른 상황을 스스로 수습하려 들었던 거지? 여러 의문들이 머릿속에 난립했지만, 나츠키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모르겠다.”
나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자신의 폰을 꺼내 들고 거기에 그려 뒀던 그 남자의 초상화 비슷한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상당히 꼬불꼬불한 선으로 되어 있는 그림이었는데, 일견 다른 사람이 본다면 혹시 초상화가 아니라 추상화를 그려 놓은 것이 아니냐 할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본인은 굉장히 그 그림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는 듯, 그것을 자꾸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없는 기억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나츠키는 고개를 저으며 단말기를 넣었고 시뮬레이션 장치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없네.”
나츠키는 센터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일과 시간이 완전히 끝나고 난 뒤, 시간이 조금 지나 저녁쯤이 되면 사람들이 많아지긴 할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다들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것이 힘든지, 이렇게 수업을 마치자마자 땡하고 달려오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럼, 뭐. 온라인 매칭이나 돌려야지. 투덜거리면서 장치에 들어간 나츠키는 얼굴이 밝아졌다.
“호오.”
근처에 접속한 플레이어 명단에, 한 명의 닉네임이 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람이랑 하면 되겠네.
나츠키는 잠시 그의 닉네임을 살폈다.
“애기애오……? 뭔 이딴 닉네임을 써.”
그러고는 곧바로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로그를 살폈다. 전적이 0전 0승 0패. 닉네임도 처음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정말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 같았다.
거기에 그 닉네임 자체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기 내지는 애기 어쩌고 하는 누군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익, 진짜.”
단지 머리칼이 붉기 때문인지, 빨간 머리의 자칭 그 애기븝미, 다나 크리스틴을 볼 때마다 그 남자를 떠올릴 때처럼 가슴 한구석이 뻐근했다.
그 때문에 심란해서 일부러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여기서까지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혹시 이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그 다나 크리스틴인가?
나츠키는 잠시간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웬만한 1학년 근접 계열 생도들은 다 이 시뮬레이션을 해 봤을 텐데, 아직까지 하지 않은 사람에다가, 이런 닉네임을 쓰는 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
나츠키는 순간 눈에 불을 켰다. 그렇다면 저번에 무기술 수업 대련 때 있었던 그 치욕, 그것도 같이 갚아 주고, 상념도 떨쳐 낼 기회 아닌가.
마침 그 ‘애기애오’가 대전을 걸어왔다.
“그래, 하자고. 해!”
탁탁탁탁탁탁!
나츠키는 분노하며 수락 버튼을 마구 눌렀고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뭐야, 저 똥캐는.”
그녀가 셀렉한 것은 이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사기캐 내지는 개캐라고 불리는 캐릭터. 하지만 상대가 선택한 것은 거의 최하위권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명백한 성능 차이, 그에 나츠키가 웃음을 면면에 띠었다. 진짜 완전 초보자잖아?
나츠키는 신나게, 날아오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과 콤보를 섞어 가며 상대방의 캐릭터를 쥐어 팼다. 결과는 1세트 승리.
“……재미없다. 너무 쉽네.”
약간은 긴장했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 외로 너무나 원사이드한 대전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2세트가 되었을 때, 나츠키는 조금 고전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중수 이상의 수준으로는 올라온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와, 질 뻔했네.”
방심했던 터라 흐름을 내줬기에, 자칫하면 질 뻔했다.
나츠키는 다시금 이를 악물고 대전을 이어 갔다. 3세트, 이것만 이기면 이제 끝이었기에 마지막 게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 어?”
앞선 두 세트와는 달리, 순간 일취월장한 상대의 실력. 나츠키는 그에 당황하며 밀리다가 패배를 했다.
그리고 4세트, 이제는 나츠키보다 되레 한 수 정도 위의 실력을 뽐내는 상대. 그에 또 한 번 패배.
5세트, 완전히 멘탈이 나가 버린 나츠키를, 상대가 일방적으로 개박살내 버린다.
“…….”
나츠키는 잠시간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가 떠오르자 격분하며 재대결 항목을 마구 눌렀다.
“이게, 이게!”
그녀를 격분시킨 메시지의 내용이란, 바로 이러했다.
[님, 왤케 못하심? ㅋ;; 저 첫판인데 걍 털리시네.]
명백한 도발의 뜻을 담고 있는 메시지. 나츠키는 이어 계속해서 그와 게임을 했다. 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재대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상대는 점점 실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4번째 판 이후로는 단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야! 너 누구야!”
나츠키는 소리를 지르며 시뮬레이션 장치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편, 그때 구석의 시뮬레이션 장치 속에 있던 다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호에에에, 언냐야 무서운 고시애오…….”
하지만, 물론 그 말과 내심은 달랐기에, 그 입에는 옅은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악동처럼,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 * *
사락,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이곳.
이곳은 황해도 해주에 위치해 있는 한 건물,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빌런 집단들 중 가장 악질이라고 평가되는 악사단의 근거지였다.
그곳의 회의실, 검은 정장 차림의 한 남성이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그의 부하가 건네어 준 보고서였다.
한참의 그 침묵, 무거운 분위기가 유지된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무슨 낯짝으로 기어 들어온 건지 모르겠군.”
“…….”
“무슨, 낯으로. 그렇게 마결정까지 지원을 해 줬는데. 그 어린 여자애 하나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렵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생도 수준인데 말이야.”
그들은, 이번에 일어난 펜타곤 사건의 주동자들이었다. 모든 계획은 타나카 나츠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설계된 것.
본래는 약성을 과하게 몸에 지니고 있는 그녀의 특성을 이용해, 마결정에 중독시켜 죽이려고 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자 외력을 써서 죽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 두 가지 시도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지금 그 보고를 받고 있는 악사단의 간부, 페텔은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이 계획이 실패할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라, 정말 어이가 없군. 그런 변수까지 다 계산했기에 이런 과투자를 한 건데 말이야.”
페텔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읍소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당장에 ‘폐기’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완연한 실패.
그에 어떻게든 그 미래는 피해 보기 위해서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를 듣고 있던 페텔의 얼굴은 더욱더 어두워져만 갔다.
그리고 결국.
츠카악!
“꺼…… 헉!”
어디선가 솟아난, 검은색 팔뚝. 그에 솟아난 칼날에 한 빌런의 몸이 양분되어 버렸다.
낭자한 피와 그 부산물들. 페텔은 한숨을 쉬며 피곤하다는 듯이 벨을 눌렀다.
“방에 있는 거, 대충 치워.”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들어와 그 시체를 치워서 나갔고, 그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결국에 이번 일을 통해서 알아낸 정보는 하나였다. 이번 일의 그 ‘변수’. 그 존재가 누구인지. 페텔은 그의 이름을 잠시간 되뇌었다.
“김찬호라…… 흐음.”
……물론 그 정보가,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