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여름 운동회가 시작대써여!
완연한 여름, 몬스터가 되지 않은 매미가 나무에 붙어 구애의 울음을 흘리는 때.
생도들도 서로 눈이 슬슬 맞고 있는 때였다. 심지어 주연 등장인물들도.
“아, 좀 조용히 해! 들러붙지도 말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내가 얘기했잖아.”
저기, 앞에서 신하연과 웬 훤칠한 남자 하나가 걷고 있다. 저 둘은 지금 연인 관계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영 그래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래. 하연 공주님과, 그 하인이라고 해야 할까. 말 한마디에 빌빌거리고 있는 남자를 보자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안쓰러워서?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저 남자 생도가 진짜로 정신 나간 놈이니까.
신하연에게 갈궈지면서도 선한 웃음을 흘리는 저 생도는, 얼마 뒤 대찬 사고를 쳐 버리고 만다.
“아.”
그렇게 본성대로, 자신의 가면을 벗은 채 행동하던 그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시금 위선을 떨기 시작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손을 잡고 마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호에에엥.”
쟤는, 진짜 좀 무섭다. 철저하게 남들의 앞에서와 뒤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솔직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동정이 가지는 않는다.
“아, 더워.”
그때, 나를 스쳐 지나가던 신하연이 생도복 겉옷을 슬쩍 벗으며, 안에 입고 있던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민소매 나시를 보인다.
옆에 걷고 있던 남자 생도가 헛숨을 삼킨다, 그리고 나도.
꼴깍.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헤으응…… 언냐야.”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조금 사람이 이중적일 수도 있지.
원래 예쁘면 다 용서되는 법이다.
* * *
펜타곤에서 여름마다 열리는 이벤트, 그것은 바로 운동회였다.
당연히 올해도 열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3년 전부터 시작된 예능 ‘펜타곤’ 또한 이번 운동회의 중계를 한다고 했다.
무슨 아이돌 데려다 놓고 운동회 한다고 하던, 그 프로그램이 생각나는데…….
“이번에 종목별로 지원을 받을 건데, 그…… 솔직히 양심상 내가 좀 민폐일 것 같다. 그러면 개인 종목은 알아서, 눈치껏! 빠지자고. 나 포함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나쁘게 듣지 말고.”
3반 단상 위에서 말을 하는 생도, 그는 현재 41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반장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사실 41위 정도면 펜타곤 내에서도 명백히 상위권인지라, 개인 종목에서 빠지겠다는 선언을 할 필요는 없지만…….
“호에에에…….”
아무래도, 이 반 멤버가 멤버다 보니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
나는 J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저 딴 세상 이야기라는 듯이 하품을 하며,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J는 아직 순위를 100위권 정도에 유지하고 있다. 사실 그 정도만 되어도 알뜰하게 쓰면 펜타곤 내의 모든 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포인트가 주어지니, 굳이 올릴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이어 나츠키, 장선우, 신하연이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하지만 자리는 공석이었다.
한 반에 너무 상위권 생도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잠시 다른 반에 소속되었다. 반 대항전 때는 다른 반의 이름으로 나올 것이고, 청백전에서는 같은 팀이 될 수도, 다른 팀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에 현재 3반에 남은 희망은 나란 소리였다. 그래서 생도들이 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고. 이런 거, 별로 원하지 않는데.
“어…… 그럼 다나?”
이젠, 아예 대놓고 집어서 이름을 부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하와와와, 왜 그러는 고애오?”
“이번에, 개인 종목은 개인당 세 개까지 나갈 수 있거든. 혹시 나가고 싶은 종목 있어?”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심지어 옆의 일리아까지 눈을 반짝거린다. 물론, 그녀 같은 경우에는 다른 생도들과 기대하는 바가 조금 다르겠지만…….
“으음…… 븝미쟝은여…… 축구랑, 농구랑, 수영이여?”
“……뭐?”
순간, 분위기가 싸해진다. 또한 저기 멀리서 귀만 쫑긋거리고 있던 J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푸흐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발, 나도 장난이라고.
“노, 농담이에요오…… 마법 연구, 시약 제조, 서바이벌로 하는 고에얌!”
“그래, 그렇지? 진심인 줄 알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농구는 좀…….”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그 키로 농구가 말이나 되냐, 하는 듯한 얼굴로. 참고로 저놈은 190이 넘어가는 거구를 가지고 있었다.
풋.
순간 귓가에 비웃음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그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 언냐야…….”
“어, 왜?”
아무렇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일리아. 그녀의 입가에 떠 있는 희미한 미소를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내 이런 상심과는 별개로, 종목의 배분은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나는 단체 종목에서도 힘을 쓰는 종목들에서는 모두 배제되었다. 다만 그를 제외하고서는 죄다 포함되었다.
스케줄이 나한테만 너무 과중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마 다른 반으로 간 상위권 생도들 모두 이런 상황을 겪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다. 나는 체력이 더럽게 약하니까.
“호에에에…….”
그렇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입에서는 그저 호에에, 하는 탄식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종목은 다 정해졌고. 이제 남은 건 응원 단장이랑 장기 자랑에 나갈 사람인데…… 지원할 사람 없나?”
순간, 나름 왁자지껄하던 반 내부가 조용해진다. 다들 슬글슬금 서로의 눈치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냥 교내에서 하는 장기 자랑이면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모든 과정이 전국으로 생중계된다. 그놈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장기 자랑에 나온 생도들 중 몇몇은 인생에서 한 번 남기기 힘들 흑역사를 전국으로 중계했다. 그리고 그 흑역사들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 고스란히 박제되었고.
원작에서는 볼 수 없던 내용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볼 수 있었다. 심심하면 그 동영상 사이트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인지라,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장기 자랑은 절대 나가면 안 된다는 걸.
명성도? 미안하지만 이미 거의 다 올려놨다. 어차피 유예 기간도 한참 남았고, 마음만 먹으면 쭉쭉 올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다. 굳이 지금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람이 걸리길 기도하는 게 맞을 것이었다.
“없어? 흐음…… 그럼 혹시 추천이라도 해 볼래?”
녀석의 말과 동시에, 생도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개중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몇몇들은 자기와 친한 생도를 지목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나쁜 놈들 같으니, 보듬어 주지는 못할 망정…….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언냐야?”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들고 반장을 향해 흔들고 있는 모습이.
“다나가 나가야지! 노래 부르면 무조건 1등 아니야.”
얘, 왜 이래.
나는 버둥거리며 그녀를 앉히려고 했으나, 이미 반장과 그녀는 한뜻인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네, 그럼…… 올린다?”
“호에에에, 븝미쟝 부끄러운 고애오!”
나는, 내 최선을 다해 반론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 노래 잘…… 열심히 하잖아. 그러니까 반을 위해 한번 나서 주라.”
차마 잘한다고는 못 하고, 말을 바꾸며 설득하는 그 모습에, 혈압이 올랐다.
“하우으으…….”
나는 그저 책상에 머리를 박을 수밖에는 없었다.
* * *
“응원 단장…… 나 이런 거 못하는데…….”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일리아. 내가 장기 자랑에 나가기로 결정된 이후, 그녀가 응원 단장으로 선정되었다.
그에는 물론 내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고, 일리아는 나를 만류하면서도 저질러 놓은 짓이 있는지라 거부하지는 못했다.
“하와와…….”
“하아아…….”
나도, 그녀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길래, 왜 그런 짓을 해 가지곤.
물론 그렇게 그녀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일리아는 진심으로 내가 노래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추천을 한 거니까. 취향 한 번 대차게 특이했다. 혹시 청력에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언냐야, 걱정 마라여. 븝미쟝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고애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일리아는 아직도 어느 정도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었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일리아. 물론 나와 결속이 된 이후, 그 증상이 호전되는 것에 내가 크게 기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부담이 될 테니,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었다.
“다나…….”
그녀는 감동이라는 듯, 어느새 그 응원 단장으로 만든 사람이 나라는 것도 까먹은 채 나를 껴안았다.
“나도, 도와줄게.”
“호에에, 머를여……?”
뭐를 말하는지는 명백했다. 당연히 내 장기 자랑을 도와준다는 이야기겠지.
그런데 그 장기 자랑에서 뭘 도와준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나가서 븜븜븜, 이런 거나 부르고 자빠져 있을 건데.
“유, 율동이라도 출게!”
그녀 또한 그것을 깨달은 것인지, 황급히 말했다. 그게 차라리 응원 단장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그냥, 마음이나 고맙게 받아야지.
그렇게 일리아와 나는 운동회에 대한 잡담을 하면서 복도를 거닐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생도가 있었다.
“나츠키 언나야.”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과거였다면 험한 말들이 마구 날아왔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할 뿐이었다.
“아, 안녕.”
그녀 생에 평범하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해 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나츠키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함을 토할 만한 반응이었다.
나도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곤 했다. 평소완 다르게 저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괴롭히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J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다나, 예전부터 궁금한 건데…… 쟤 왜 저래 요즘?”
“호에에에, 고거는…… 븝미쟝도 잘 모르는 고시애오.”
이건 사실이었다. 진짜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나츠키가 왜 한순간에 저런 상태가 되었는지.
그냥, 그렇게 프라이드가 강한 그녀가, 평소에 갈구던 내게 도움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이라도 온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나츠키! 나츠키!”
그렇게,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데.
복도 어디선가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돌리니 저번에 동아리 모집 기간 때 봤던 그 남자였다.
역사 동아리인가 뭔가 하는, 곤룡포를 입고 나대고 있던 그 남자.
“왜 안 하겠다는 거야? 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하다못해 일본어라도 조금 할 줄 아는 사람이 너밖에는…….”
“아, 진짜. 이 씩빨. 말했잖아. 하기 싫다고.”
선배고 나발이고, 짜증을 팍팍 내며 욕부터 해 버리는 나츠키. 아무래도 저 곤룡포가 나츠키에게 무언가를 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인데…….
“하와와, 븝미쟝은 아무고토 모르는 고시애오. 와까리마셍인 고애오!”
그냥 저기에 얽혀 봤자 귀찮을 뿐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