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이 방학은 단순히 휴식을 취함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시금 발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하며…….”
“흐아아아암.”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교장의 축사에 하품을 하는 일리아. 지루하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 다른 생도들도 그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디건 이놈의 축사는 항상 지루한 것 같다. 내 학창 시절 때 기억이 난다. 딱 얘네들 나이쯤 되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때 교장은 나이가 꽤 젊었는데도 상당히 고리타분했다. 지금 축사가 대충 20분째 이어지고 있는데, 그놈은 최고 기록이 30분이 넘었었나. 그런데 지금 기세로 보면 그걸 넘을 것 같기도 하고…….
“다나!”
“호에에에!”
나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리아는 그런 내 모습이 웃기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푸흡, 웃음을 터뜨린다.
주변에 있던 생도들은 이미 다들 빠져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뭐야, 혹시 나 졸았던 건가?
“츠읍.”
아무래도 입가에 반질하게 번져 있는 침을 보자면 그런 것 같았다. 이거 괜히 민망하네. 나는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일리아도 내 옆에 따라붙었다.
“세상모르고 자길래 놔뒀는데. 일찍 깨워 줄 걸 그랬나?”
“아니에여 언냐야. 쓰읍.”
본래 다른 히어로들 같은 경우에는 수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몸이 충분히 버텨 주니까.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달랐다. 하루에 적어도 8~9시간은 자야 컨디션이 유지가 된다. 물론 이것도 최소 시간을 말하는 거고, 최상의 컨디션이 되려면 대략 10시간 정도는 숙면을 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항상 숙소에서 10시만 되면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일리아가 아쉬워했다. 요즘 들어선 그러지 않는 것 같던데.
“후에에.”
그러고 보니까 요즘에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면 정신은 개운하긴 한데, 가끔 몸이 찌뿌드드할 때가 있었다. 그게 딱 일리아가 불평을 그만둔 시기 같은데. 그 두 개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일리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세상 해맑은 얼굴로 내게 묻는다.
“왜? 다나?”
“그냥여. 언냐야 이뻐서여.”
“히히, 고마워. 너밖에 없다.”
일리아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따금 이럴 때면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 * *
보통 다른 히어로들 같은 경우에는 한번 던전 사냥을 떠난다고 하면 잔뜩 준비를 한다. 이를테면 기본적인 포션류부터 시작해서, 투척 무기라든가 효과적인 사냥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 물론 이런 것들은 최상위권 히어로들의 경우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장 수천 등대의 히어로들만 하더라도 이런 장비들을 챙긴다. 그만큼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필드에 비해 던전은 얻는 것이 많기도 했지만 또한 그에 걸맞은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다 챙겼져?”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달랐다. 김수혁이 만들어 준 방어구들 중 가장 무난한 디자인(그렇다곤 해도 노출이 꽤 있었다)의 방어구. 지팡이와 포션 2개.
그것이 내 짐의 전부였다. 내가 최상위 히어로만큼 강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쓸모업는 고애오…….”
그냥 쓸모가 없었다. 그것들은 근접전이나 기동성을 위시한 대단위 전투에서 의미가 있는 물건들. 애초에 나는 근접전을 벌이면 장비고 나발이고 그냥 죽어야 했다. 기동성 같은 경우에는 지팡이가 있었고.
그렇기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갈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몸 하나면 충분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부르르.
그 때 앞섶에 넣어 놓은 폰이 일순간 진동한다. 그와 함께 아랫배가 우우웅 떨린다. 시발, 휴대폰 진동도 줄여 놔야 하나.
[J 언냐야: 지금 나가면 되는 거지?]
진동의 정체는 J의 문자였다. 오늘, 예의 그 던전을 함께 공략하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네, 언냐야. 지금 출발하면 대는 거예얌!]
사실 지금 출발하면 웬만해선 나보다 늦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출발도 안 한 모양인데 굳이 그런 말을 해 봤자 의미도 없고 기분만 상할 뿐이다.
오늘 던전 공략에서 J가 가지는 비중이 상당할 터였으니, 나는 절대 을의 입장인 것이다.
“호에에에.”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이번 던전은 지금껏 내가 겪었던 모든 필드와 던전들 중에서 단연 가장 어려운 난이도였다. 쉽게 쉽게 클리어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안전하게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반 지식이 분명 필요할 것이었다.
“선우 옵바야 미아내여…….”
장선우, 나는 그에게 다시금 사과했다.
원래 진행대로라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이후, 출동한 히어로들과 함께 사태를 수습하던 장선우가 근원지를 찾아내고 던전에 들어가 사투 끝에 이를 클리어하게 된다.
이미 던전 밖으로 몬스터들이 다수 빠져나간 이후라, 본래 던전 난이도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낮아졌음에도 장선우는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만큼 이번 던전의 난이도가 높다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챙겨 줄게여…….”
물론 그만큼 보상은 달콤했고, 방학이 끝난 뒤 다들 한층 성장해서 돌아왔음에도 장선우는 독보적인 성장을 보일 수 있었다. J의 턱밑까지 따라붙을 정도로. 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 보상을 내가 가져갈 테니까.
그래도 나도 양심이 있으니 후일 원작의 장선우의 성장 속도와 비슷해질 수 있게, 따로 지원을 해 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따로 고생하지 않고 보상은 그대로 얻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나르는 고애오, 나르는 븝미쟝이애오.”
나는 지팡이를 타고, 날아올랐다. 고소 공포증이 어느 정도 완화되기는 했지만 높은 고도는 무리였기에 지상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웅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래도 바로 나인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옵바 언냐야들 븝하!”
나는 그에 한 번 손을 흔들어 주고,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펄럭거리는 마녀복의 치맛자락을 다잡으면서.
* * *
J는 내 예상과 달리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에 잠시 의문을 가졌다. 절대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는 나보다 먼저 도착할 수가 없는데. 그에 J는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띨빵아, 이제 이렇게 안 부르려고 했는데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게 만드네. 내가 버스 타고 왔겠어?”
나는 잠시 멍을 때렸다. 생각해 보니 J는 따로 이동 수단이 있었다. 차체가 자체로 은신 기능을 가지고 있어, 탑승자까지 보이지 않게 만들어 주는 바이크. 사고 나기 딱 좋은 녀석이었지만 애초에 그녀가 그딴 걸 신경 쓸 리가 없다. 그리고 작중에서 그녀는 그 바이크를 타고 사고를 일으킨 적이 없다.
아마도 경량화 마법까지 인첸트 되어 있는 그걸 타고, 갓길로 광란의 질주를 펼쳤겠지. 당장에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오토바이 슈트였다.
“너도 그거 타고 왔으면서. 하여간.”
“우으…… 븝갈통이애오…….”
지팡이를 가리킨 J는 내게 장난식으로 핀잔을 줬다. 나는 그저 머리통을 스스로 쥐어박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에 J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왜 머리를 막 때려.”
“호에에.”
걱정이라도 해 주는 건가? 나는 약간 감동받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차게 식을 수밖에는 없었다.
“원래도 안 좋은 머리, 그렇게 막 때리면 더 나빠져!”
“호에에에, 말이 너무 심한 고애오…….”
J는 얄밉게 미소를 띠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넌 왜 때리는데, 때리면 더 나빠진다면서.
물론 그녀도 농담으로 하는 말일 것이었다. 순전히 운빨이긴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이론 시험에서 1등을 달성했으니까. 교관들이고 생도들이고 다들 나를 천재처럼 여기고 있었다. 바보인 척하는 천재로.
만약에 이론 과목에 제대로 된 서술형 지문이 등장하는 2학년이 된다면…… 내 지능이 탄로가 나겠지만 그 전까지는 아마 그런 이미지를 유지할 것이었다. 사실 나도 약간은 부담이 생겨서 요즘 이론 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다.
“그나저나 던전이 어딨다는 거야? 찾아도 안 보이던데.”
J는 이미 내가 오기 전에 주변을 둘러본 모양이었다. 물론 찾지 못했던 모양이고. 나도 원작에서 자세한 위치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만큼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곳이고, 장선우가 찾은 것도 반쯤 우연이었다고 언급되었으니까.
“후헹, 븝미쟝만 따라오는 고애오!”
나는 약간 뻐기듯 말했다. J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뭐, 그래서 어쩔 건데. 물론 그 이상 도발을 하진 않았다. 그랬다가 J에게 내재되어 있는 그 가학성이라도 깨어나면, 나는 속절없이 버둥거리며 괴롭힘을 당할 것이었다. 괴롭힘이라고 해 봤자 귀나 볼을 잡아당기는 정도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눈물이 찔끔찔끔 흘렀다.
“챠란, 여기애여 언냐야!”
“……뭐야, 진짜네.”
영 못 미덥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J는 내가 정확히 던전을 찾아내자 새삼스럽다는 듯이 나를 봤다.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뭔가 J한테서 이런 반응이 나오면 다른 이들보다 배로 뿌듯했다. 그건 그녀가 주위 인물 중에서 가장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하도 나를 괴롭히려고 눈이 시뻘게져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덤불을 탁탁 쳐내며 동굴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 무심한 모습이 뭔가 좀 멋있었다. 속된 말로 간지가 흐른다.
“호에엥.”
그 모습과 비교되게,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추하게 엉금엉금 움직였다. 뭔가 패배한 기분인데.
“야, 속옷 보인다.”
“소, 속바지거든여?”
J는 그 모습을 보더니 사춘기 소년처럼 음흉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물론 아니긴 했지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쳇,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는 J의 모습에서 나는 다시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주변에 다들 이런 사람들밖에 없는가…….
“나 먼저 간다?”
그녀는 마치 동의를 구하듯 끝음을 올렸으나, 내 의사는 듣지도 않고 그대로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무데뽀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 도대체가 사람이 저렇게 겁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싶었다. 물론 그에 걸맞은 실력 또한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어쩌면 나를 믿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같이 가여어.”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물론 지팡이를 탄 채였다. 어차피 던전에 들어간 이후로는 지팡이에서 내리면 안 되었으니까.
만약에 내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는 이미 내가 싸늘한 시체가 된 이후일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무서어여!”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던전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