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카지노에 간 븝미쟝
“와, 너무 좋다. 그치?”
“음…… 나쁘지 않네…… 야, 근데 넌 왜 말이 없어?”
“다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지.”
“과보호라니까? 얘가 컨셉으로나 애기고 뭐고 하는 거지 진짜 그런 것도 아니고.”
일리아와 나츠키가 내 눈앞에서 티격태격거리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되레 사이가 굉장히 좋아졌구나 하는 감상만이 떠올랐다.
본래 이 둘은 보기만 해도 서로 으르렁거렸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작중에서도 이 시점쯤 되어서 관계가 전체적으로 진전되었으니, 역시 원래 흐름대로 간다고 해야 할까.
“아, 진짜. 그냥 데려오지 말걸.”
“데려오긴 뭘 데려와? 누가 보면 뭐 돈도 다 대 준 줄 알겠다? 나는 내 돈 내고 왔거든?”
“숙소랑 식당 예약하고 일정 다 짠 건 나잖아! 아, 진짜 더럽게 안 맞아. 다나, 그냥 얘 놓고 가자.”
“놓고 갈 거면 널 놓고 가야지. 일정을 다 짜기는, 밑에 사람들 부려 먹어 놓고. 니 머리로 여행 일정 같은 걸 짤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거든?”
……아닌가?
일단은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일정을 짠 건 사실이다 보니, 일리아는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만 머리 나쁘다는 이야기에는 꽤나 삐진 듯한 모습이었다.
나조차도 저번에 그 비슷한 얘기로 그녀를 놀렸을 때, 꽤나 오랜 시간 꽁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조금 살랑거리니까 금세 풀리긴 했지만…….
“언냐야들…… 싸우지 마라여…….”
이대로는 영 끝날 것 같지가 않아, 슬쩍 끼어들었다. 일리아는 불만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한 발자국 물러섰고, 나츠키는…… 그냥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둘 다 다루기 쉬웠다.
애초에 이 둘이 친해진 결정적인 계기가 나기도 했다. 나츠키는 알게 모르게 나를 따라다녔고, 일리아는 대놓고 나랑 붙어 다녔으니까. 이래저래 그런 식으로 접촉할 일이 많아지며 친해진 것이다.
나츠키 쪽이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어쨌든 둘은 꽤나 죽이 잘 맞았다. 가식이나 내숭 같은 건 이미 한참 전에 갖다 버린 이들이니 그럴 수밖에.
나는 이 과정에서 신하연도 함께 어울리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일리아와 서로 불편한 관계이니만큼 그렇게 쉽게 풀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변한 고애오…….”
그러고 보니, 걔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신하연은 그때 일 이후로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이미지를 관리하고 자잘한 인간관계 하나하나 모두 신경 쓰는 그녀의 버릇. 그것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뭔가 조금 분위기가 음침해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간헐적으로 내 폰 메시지에는 그녀의 문자가 온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전화하지.
주변에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밖에 없는 게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저기, 공항 한구석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싱긋.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온다.
마치 해변에라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J였다.
* * *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홍콩이었다. 일리아는 내가 최우선이라면서 여행지 후보 수십 개를 내게 디밀었고, 나는 머리를 굴렸다.
물론 단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겁겠지만, 그저 한가롭게 시간을 때울 바에야 뭐라도 하는 게 좋을 테니까. 주요 사건이 일어난 곳이나 던전 혹은 빌런들의 본거지와 가까운 곳. 그런 곳을 가고 싶었다.
홍콩, 마카오.
내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딱 이맘때쯤에 여기서 사건이 하나 일어났었다. 물론 그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곳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일이 발생하는 곳이다. 빌런들이 천지에 산재한 곳인지라.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 그곳은 현재 빌런들의 돈줄이다. 놈들이 시설 하나는 잘 관리하는지라, 세계 각국의 졸부들…… 그러니까 히어로를 포함한 이들이 이곳을 자주 찾고는 한다. 히어로가 빌런들이 만든 카지노에서 논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도박에 한 번 빠지고 나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모두 일반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난 할 줄도 모르는데.”
“나도 몰라. 그냥 구경이나 하러 가는 거지.”
낮에 테마파크를 돌고 온 우리 일행은, 저녁때 카지노로 향했다. 일단 다들 흥미는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17살이란 나이에 도박에 취미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만…… 아무튼 다들 별로 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만 나는 조금 기대가 되었다.
정말 도움이 되었냐 하고 묻는다면 의문이었지만, 그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여 주고 있는 내 세부 특성 중 하나인 행운.
그것이 이 카지노에서도 통할까 하는 것이다.
룰렛, 블랙잭, 포커, 바카라, 조커세븐, 주사위…….
모든 종류의 도박은 죄다 운에 의해 그 승패와 흥망이 좌우된다.
빌런들이 운영하는 만큼 그 투명성이 의심될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도박판 그 자체에는 아무런 트릭도 부여해 놓지 않았다.
애초에 영웅들도 많이 찾는 만큼 금방 들킬 거라 생각한 것인가.
아무튼 그런 형식이라면 내게 굉장히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현생에서도 별로 해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좋은 그림과 패만 계속해서 손에 들어온다면 프로 겜블러들보다 되레 낫겠지.
벌써부터 손안에 들어올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한다.
“가여 언냐야들.”
“어, 어.”
“되게 신나 보인다……?”
나는 나츠키와 일리아를 데리고 카지노로 당당히 입성했다. 그녀들은 내가 은근히 들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아무래도 내 이미지랑 카지노는 너무 안 맞나.
“호에에에, 넓은 고애오.”
나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넓은 공간, 그리고 화려한 조명들, 그와 반대로 침잠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일리아와 나츠키도 그 생경한 모습이 꽤나 신기했던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입구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아무래도 17살짜리 소녀들이 세 명 모여 있는 조합은 그들로서도 꽤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몇몇 이들은 경계를 했다. 어린 소녀 세 명이 이렇게 카지노에 들어왔다는 것은 무조건 히어로라는 뜻이었으니까. 웬만해선 건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히어로가 아닌 일반인들 같은 경우에는, 카지노 밖을 나서는 순간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행위가 너무나도 쉽게 용인되는 세계니까.
그래서 일반인들 중에 돈이 많지만, 개인 호위를 상시 고용하고 다닐 정도는 아닌 이들은 카지노 측에 호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그 가드들은 일단 빌런이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신용이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몇몇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다가왔다.
그러고는 뭐라고 말을 했다.
“Я потратил все деньги. Ты можешь заплатить за дорожные расходы?”
“뭐라는 거야 씨팔.”
나츠키는 그에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지만, 나는 그녀를 말렸다. 아무래도 몸짓으로 봐서는 돈 좀 달라는 것 같은데, 굳이 상대할 필요 없이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지금 입구에서 가드들이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정도 이상으로 귀찮게 한다면 이들이 먼저 나서서 제지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카지노 2층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Пошел вон.”
낮고, 꽤나 위압적인 그 목소리. 그에는 마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순간 경계하며 그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그쪽을 쳐다봄과 동시에, 우리에게 달라붙었던 사람들 또한 시선을 돌렸고, 당황하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듯 자리를 옮겼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백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것처럼 말을 걸어오고 있는 저 남자. 그의 이름은 자칭 크리스 박. 한국 이름으로는…… 박철구. 저놈은 이쪽에서 꽤나 유명한 한국계 빌런이다.
“뭐야? 저 새끼는 또.”
물론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고, 또 그 분위기가 딱 봐도 능글능글한 게 일리아나 나츠키 취향은 아니었던 만큼 불편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슨 꿍꿍이인지, 세상 친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웃음을 띠었다.
“처음 오시는 건가 봐요. 세 분이서 오셨나?”
“……그런데요.”
“음, 그렇다면 혹시 제가 안내를 해 드려도 될까요? 한국에서 오신 거 같아서 반가워 가지고.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이 조합 중에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무슨. 일리아와 나는 애초에 혼혈 중에서도 한국인 피가 많이 섞이지 않았고, 나츠키는 순수한 일본인이나 그녀가 가진 특성 때문에 동양인과는 너무나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지금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심되는 것은 카지노 초입에서 히어로라는 것을 인증하며 가드들과 잠깐 실랑이를 벌이던 때. 그때부터 우리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다나…… 저 사람 좀 이상해.”
일리아는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리지는 않은 모양이었으나,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꺼림칙함에 내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답했다.
“괜차나여 언냐야.”
나는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최대한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며는 븝미쟝, 안내해 주는 고야요?”
“네, 물론이죠.”
그는 순간 눈빛을 번뜩이더니, 얼굴을 착 가라앉히며 말했다.
저걸 포커페이스라고 하는 건가. 다만 나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표정만 감추면 뭣 하는가. 속내가 그냥 다 보이는데.
* * *
그는 나름 본격적으로 안내를 잘 해 주었다. 어쨌든 좋은 인상을 심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일리아와 나츠키에게는 그다지 잘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저런 스타일을, 그녀들은 굉장히 싫어한다. 다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호감도가 더 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1부터 100 중에 5에서 6 정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는 중간중간 어느 정도 호응도 해 주면서 관심이 있는 척을 했다. 일리아는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고, 나츠키는 딱 봐도 한 성깔 할 것처럼 차가워 보인다. 그렇기에 이 녀석도 애초에 나를 가장 주요 타깃으로 여겼겠지.
과연 그는 내 호응에 굉장히 기뻐하면서, 더욱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자, 여기가 이제 포커 테이블인데…… 사실 아까 보여 드린 바카라 같은 것들은 실상 딜러랑 손님이 하는 게임이라 별로 추천 드리지 않고. 게임을 하실 거라면 역시 포커가 제일이죠.”
자리가 비어 있는 몇몇 테이블. 나는 그것들을 보며 웃을 수밖엔 없었다.
대놓고 자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나름 이름 있는 빌런이라는 놈이 겨우 이런 식으로 앵벌이를 하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일리아와 나츠키는 대충 냄새를 맡았는지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나는 앞으로 나섰다.
“우와아, 그럼 여기 옵바 언냐야들 중에 아무하고나 끼면 되는 고애오?”
“그럼요.”
“다나, 안 돼.”
일리아는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으나,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괜차나여, 언냐야.”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호구 잡으려다, 자기가 호구 되는 기분을 이들에게 느끼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븝미쟝은 운이 조와여!
눈앞에 이미 시스템창도 아른거리고 있었다.
븝갈통을 1학기 전체 필기 수석으로 만들어 준 녀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