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븝미쟝 쑥쑥 자라는 고애오!
나는 이 세계관 안에서의 정확한 지명이라든가, 주소 같은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가면서 게임을 하는 변태는 없었고,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게임사 측에서도 굳이 그런 정보까지 내놓지는 않았다.
“여기는…….”
다만 실제로 그 장소에 가 본다면, 그곳이 작중에 나온 곳인지 그렇지 않은 곳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빠져 있던 게임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지금 J의 문자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들이 다수 존재하는 산업단지. 실상 홍콩 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이었다. 애초에 육체 노동자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은 국가였으니까.
그 몇몇 존재하지 않는, 찾아보기 힘든 장소. 이곳은 앞서 이야기했던 빌런들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J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분 전에 이곳의 주소를 내게 문자로 보냈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이쪽으로 와 달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 즉시 일리아에게 대강 둘러대고, 지팡이를 타고 날아왔다. 급하게 오느라 전투복도 아닌 잠옷을 입고 날아왔던지라 내일쯤이면 홍콩 시내에 잠옷 입은 마법사 출현, 같은 제목으로 회자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런 사소한 일보다 지금 J가 더 걱정됐다.
원작에서 그녀는 분명 빌런이다. 극단적인 말이지만, 히어로 판타지 세계관 내에서는 히어로가 아닌 능력자는 모두 빌런으로 취급되니까.
그러나 그녀는 공식 인기투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매력 있는 캐릭터였으며, 또한 다른 빌런들 같은 악한이 아니었다.
결국에 스토리 말미에는 주연 등장인물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변했다.
내가 그녀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너무나 건방진 말일 것이다.
내가 있었기에 그녀가 스스로 변화했다. 그것이 가장 맞는 말일 것이다.
우연이 겹쳐 속내를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J. 그녀는 최근 들어 자신의 집단에 대한 의문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뒤가 구린 곳이니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본래 그녀가 그런 의심을 원작에서는 아예 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J가 그곳에 의해 더 마모되기 이전에 확실하게 빼내 오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반드시 히어로 쪽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연구소’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곳이 아니란 자각을 일깨워야만 했다.
“언냐야!”
그런데 아무래도 J는 벌써부터 조금씩 갉아먹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력을 탐색해 가며 J가 있는 곳을 찾았다. 수많은 설비들 사이, 나는 저공비행도 하지 못하는 좁은 길목 길목을 느린 발걸음으로나마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언냐야?”
그녀는 무언가 얼이 빠진 듯이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J는 그에,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잠시 투정을 부리다가, 현재의 자신을 자각했다.
“어…… 띨빵아?”
“언냐야, 왜 그래여? 괜찮아여?”
“어.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어?”
능글맞은 웃음을 띠는 J를 바라보며, 순간 나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혈향을 맡고, 잡은 어깨의 반복적인 떨림을 느끼며 생각했다.
오늘, 이곳이었구나.
단지 여행을 따라온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어, 그런데 니가 왜 여깄지……?”
아무래도, 자신이 나를 부른 것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분노를 느꼈지만 그건 분명 내가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까치발이나마 들어 그녀와 최대한 시선을 맞추고, 웃는다.
그녀는 여전히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 *
“어디 다녀온 거야?”
숙소에 돌아오자 일리아가 천진한 모습으로 나에게 묻는다. 갑자기 뛰쳐나가서 놀랐을 법도 한데, 그녀는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더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굉장히 고마웠다.
“그냥여! 갑자기 볼일이 생각났어얌…….”
물론 좋지 않은 표정이니 뭐니 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육체는 딱히 격정적으로 슬프다거나, 겁을 먹는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이런 미묘한 감정 상태일 때는 항상 웃는 낯이다.
일리아는 그에 속는다. 아니, 속는 척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며, 오늘 놀러 갈 곳들에 대해 줄줄 읊으며 즐거워한다. 그 때문에 나도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다.
“언냐야!”
“어머. 흐흥.”
그 고마움을 느끼자, 몸이 알아서 그녀에게 안겨 든다. 그녀 또한 나를 마주 안아 준다. 일리아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내. 그것을 맡으며 잠시간 안정을 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벌컥!
“야! 둘이 뭐해!”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나츠키 때문이었다.
그에 나는 이 상황에 걸맞은 말을 내뱉었다.
“헤으응…… 나쁜 말 안 대여.”
물론 정상적으로 출력되지는 않았다.
* * *
지금껏 빙의라고 해야 하나, 차원 이동이라고 해야 하나. 이 현상을 겪게 된 이후에 단 한 번도 내가 직접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다.
“븝미쟝은 짱짱 쎄지는 고애오. 우유 마니 먹는 고애오. 언냐야들처럼 커지는 고애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깨달았다. 내가 기존의 이야기를 답보하는 것 또한 답이겠지만,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바꿔도 되지 않을까. 애초에 이미 나는 많은 부분에서 개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븝미쟝 작은 고애오…… 조그만한 고애오…… 우유 마니 먹어도 안 커져여…….”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내 의지와는 별개로 급격하게 강해지는 것은 불가했다. 그랬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겠지.
다만 원래 생각해 뒀던 계획들. 그것을 앞당기려 할 뿐이었다.
“하와와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에 첫 번째로 떠올린 것은 바로 특성의 성장이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스킬들, 그것들은 대부분 자동으로 발현되는 것이거나 노래와 같이 하루에 일정량, 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지금까지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특성인 ‘링크’. 나는 이 특성을 따로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지를 않았다.
죄다 대상으로 지정된 사람들이, 일리아, 김수혁, J…… 다들 육체 계열 능력자였으니까.
일리아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나는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었다.
김수혁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나는 단조 한 번 제대로 해내지 못할 테고, J라면…… 조금 낫기야 하겠지만 결국엔 앞선 경우들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결국에 문제는 이 빈약한 육체. 그 때문에 링크는 결국 불사신선 폼으로나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난 뒤, 그 생각이 바뀌었다.
“아가야!”
나는 정령을 소환해 내었다. 그것은 땅의 정령. 원래부터 조용하고 묵직한 데다가 발달도 뒤처진 녀석이었는데, 지팡이를 얻게 된 이후 갑자기 그 힘이 강력해졌다.
다만 특유의 그 묵직함은 그대로여서, 조그맣고 귀여운 모습임에도 무언가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쑥쑥 자라는 고애오!”
녀석은 내 지시에 따라 한 차례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또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그렇게 몸집을 네 번 정도 불리고 나자, 녀석의 크기는 실내에서 감당키 어려운 정도까지 자라났다.
쿠르릉!
“호에에에!”
녀석이 천장에 머리를 박자, 굉음이 울린다. 나는 기겁을 하면서 녀석의 크기를 한 차례 줄였다. 이거 민원 들어오는 거 아니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윗집으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던 것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인내심이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인가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쿵, 쿵!
나는 녀석에게 최대한 조용히 움직일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몸체는 2m가 넘어가는 키에 엄청난 덩치, 무게는 200kg이 넘어간 상태였다. 조용히 움직이는 게 말처럼 쉽겠는가. 다만 어쨌건 녀석은 내가 원하는 자세로 앉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은 결가부좌.
흔히 수행을 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좌법으로 알려진 그것이었는데, 녀석이 이런 좌법을 택한 것은 실상 큰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앉아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다만 녀석은 나를 따라 한 것이었다.
나는 마법 술식을 외우거나 마력을 순환시킬 때 이런 자세를 취하고는 했다. 이유는 그냥 좌법 중에 매체 같은 곳에서 많이 보고 익숙한 게 이 자세여서. 정령이 그렇듯 나도 큰 이유는 없었다.
“대상 지정이애오!”
눈을 가만히 감은 채 정말로 불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땅의 정령. 나는 녀석에게 한 가지 특성의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것은 일전에 내가 정령사로서 각성하면서 받은 특성 중의 하나인 ‘전수’.
평소에도 정령들은 내 기억과 능력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미약해서, 정말로 나를 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스킬을 사용하면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 녀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내 주 특성 같은 경우에는 불가했지만(‘븝미쟝은 오직 하나애오!’라는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노래 특성 같은 것들은 전해 줄 수 있었다.
다만 뭐, 딱 그 정도. 실상 내 모든 것인 주 특성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만 심어 주고 버려두고 있었던 특성인데…….
이번에 깨달았다.
‘링크’ 특성 자체는 주 특성 내의 세부 특성인지라 복사가 안 되지만, 그 링크를 활성화시켰을 때, 가져오는 일리아나 J, 김수혁의 특성은 이 녀석들에게 전해 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 획기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령들이 그들만큼의 힘을 낼 수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염원하던 것.
나 혼자서도 필드를 돌고 던전을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소환수, 그것을 대신해 주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대상, 일리아 메이슨과 링크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나는 그와 동시에 외쳤다.
“당연한 고애오!”
그리고 순간 일리아의 기억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일전에 잠시 깨달았던 그녀의 검술에 대한 요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던 그 힘들이 몸 안에 차오른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내 육체로는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몸뚱어리를 가진 땅의 정령이라면?
대상, ‘땅의 정령’에게 지식을 전수하시겠습니까?
떠오르는 상태창,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스템 또한 그를 긍정으로 인식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찼던 모든 것들이 스르륵,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다만 그것은 이전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저 땅의 정령에게 모두 흡수된다.
으음.
그에, 묵직한 신음성을 흘리는 녀석.
마치 득도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간 의문을 가졌다. 잘된 거겠지?
전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뒤이어 떠오른 메시지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땅이, 참 과묵한 게 마음에 들기는 해도 이럴 때는 또 불편했다. 워낙 의사 표현 자체를 안 하는 녀석이다 보니.
“수고한 고애오…….”
그 촉촉하고 기분 좋은 감촉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나는, 녀석을 역소환시키고 바람정령을 불렀다.
우헤헤헤.
땅과는 다르게 나오자마자 촐랑거리는 녀석.
이번에는, 이놈에게 J의 특성과 경험을 전수할 차례였다. 아무래도 암살자인 J와는 가장 비슷할 것 같았으니까.
흐하하!
다만 오랜만에 밖에 나왔다고 신나서 날뛰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조금 바뀌려고 했다.
“J 언냐야는 저렇지 않은 고애오…….”
내가 보기엔 저거, 언젠간 사고 한번 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