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녀석들의 몸은 마치 시체처럼 썩어 있었다.’
이는 히어로 판타지에서 나온 문구였다. 가짜 교황에게 심하게 잠식당한 일부 교인들은 그 몸이 마인의 것처럼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가 되면 교황에게 완벽하게 조종당하게 된다.
백연우는 벌써 그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그 기간으로 보나 가진바 힘으로 보나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언젠간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조금 빠른 이유는 물론 나 때문. 던전에서 힘을 시험한답시고 거석 괴물에게 두들겨 맞게 한 것이 그 원인인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가짜 성력을 온전히 받아들였겠지.
“너희들은…… 누구냐.”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그러니까 시기의 마왕의 아바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호에에에,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려고 했지만 이안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신의 이름을 사칭한 죄과를 묻기 위해 왔다.”
“신의 이름을 사칭했다라……. 가진바 힘도 미약한 견습 성기사가 말하기에는 이상한 대사로군.”
“믿음과 그 힘이 언제나 비례하지는 않아.”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보라.”
마왕의 아바타가 손을 들어 올린다. 완전히 막혀 있는 천장 사이로 한 줄기 성광이 비쳐 온다.
연로한 손길에 성광이 닿으며, 아스라이 부러지는 그 광경은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당장에라도 성자라고 하며 추앙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주신께서는 자신의 종에게 언제나 충만한 힘을 내려 주시지.”
“거짓……!”
“그대는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들었다.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거짓이다.”
둘의 말싸움을 들으며, 나는 잠시간 뒤로 물러서 있었다. 무슨 신파를 찍든 간에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으으…….”
백연우는 육체의 통제권을 상실한 채로 텅 빈 동공을 하고 있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그 모습에서 기이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그 외견보다 다른 것에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찾아낼 수 있었다.
“마나씨!”
가짜 교황의 성력은 그 근본이 마력이었다. 애초에 성력 자체가 마력과 성질이 비슷하기는 해도, 그 차이가 분명한 반면, 성력을 아무리 잘 흉내 내었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그 근본이 마력이었다. 그렇다면 더 양질의 마력으로 파훼하는 것이 가능했다.
“허어.”
순간, 교황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력을 사용해 백연우와 교황의 연결을 끊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아바타 자체보다, 세례를 받은 백연우가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물론 가짜 교황의 본체야 백연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으나, 아바타는 앞서 말했다시피 꽤나 약한 편이니까.
“옵바야, 절로 가는 고애오.”
나는 교황이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백연우에게 명령했다. 백연우는 내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게 뭔가 조금 재밌어서, 그 급박한 와중에도 슬쩍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르르하고 떨리는 입술 사이로 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물론 내가 쳐다보자 곧바로 그가 멈췄다.
“흐음…….”
교황은 잠시간 침음을 흘렸다. 실상 그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패가 방금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웃고 있는 것인지.
그 때문에 고심하던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순간 교황과 내가 같은 곳을 쳐다봤다. 그곳은 신하연이 있는 방향이었다.
“에에, 거짓말하지 마라여…… 안 되는 고애오…….”
하지만…… 할 수 없을 텐데?
교황의 선택을 받기에 신하연은 정말 적합한 대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교황의 능력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바타의 능력이겠지.
백연우는 그래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잠식을 당했고, 또 본인의 의지가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지만 신하연은 그렇지가…….
“어어?”
“호에에에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때, 신하연이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몸의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언냐야…… 아니져? 그럴 리가 없져…… 설마.”
나는 부정했지만, 신하연은 순간 휴대하고 있던 둔기를 빼 들어 나에게 휘둘러 왔다. 그에는 살의가 분명 없는 데다 그 힘도 그녀의 공격이라기엔 약했다.
그럼에도 나는 저거에 맞아도 죽는다. 그러니, 조치를 취할 수밖에는 없다.
“아가야!”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팔뚝이 신하연의 복강을 후려친다. 그에 저만치 밀려가는 그녀.
하지만 이어 아픈 기색도 거의 없이 일어난다.
“호에에에에. 왜 그러는 고애오…….”
도대체 어떻게 통제권을 뺏긴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고,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교황을 빨리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하연도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땅아가! 언냐야 막아 주는 고애오…….”
나는 땅의 정령에게 신하연을 막으라고 말했다. 녀석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녀와 격돌했다. 원래라면 신하연과 땅의 정령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 또한 저항하고 있는지 힘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이안과 교황의 싸움을 바라봤다. 신학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은 다 끝났는지, 서로 성력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진짜고, 다른 한쪽은 가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내분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겠지.
놀라운 것은 이안과 교황의 싸움에서, 이안이 점차 밀리고 있단 것이었다. 이안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그 모습에 코스프레 복장 한 번에 회유되는 씹덕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교황이 생각보다 강했다. 아바타 중에서도 강한 객체인 모양이었다. 원작에서는 한국에 있는 아바타의 무력이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나오지만, 원작과 다른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곧 쓰러질 녀석이니까.
“옵바야! 비켜여!”
이안은 내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몸을 숙였다. 나는 그 위로, 화염구를 쏘아 내었다.
교황의 몸체에 화염구가 닿으며 폭발했다.
콰앙! 쾅! 쿠콰왕!
“호에에에에에?”
일어난 반응은 단순한 화염구에 의한 폭발이라기에는 너무나 컸다. 단 한 방에 교황이 폭사해 버리는 건 좋았다. 다만 이 미친놈이 평소에 뭔 화약이라도 먹고 살았는지, 그 몸과 반응하여 연쇄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에 천장이 무너지며, 원래 골조가 불안했던 지하의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 다들 도망치는 고애오.”
나는 지팡이를 타고 쏙 빠져나왔다. 물론 그 뒷자리에는 신하연이 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아 내게 매달린 것이었다.
“다나…… 씨?”
그녀만큼 영악하지 못했던 이안은, 우리 둘의 모습을 그저 황망하게 바라봤다. 쓰러진 교황의 시체와 기절해 있는 백연우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 * *
다행히 이안은 무사히 빠져나왔다. 상황이 조금 이상해 보여서 그랬던 거지, 그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다. 물론 그건 신하연도 마찬가지긴 한데…….
“으으…….”
그녀는 지금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로 내 옆에 들러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전의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사실 인생 자체가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으로 점철된 그녀이니, 시기의 마왕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나름 본인은 저항하려 노력도 했고.
하지만 앞선 일들도 있는 데다 애초에 여기 따라온 게 그녀의 아집 때문이었으니 지금 저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었다.
“언냐야…….”
“어어, 왜?”
그녀는 내 한마디에 격하게 반응했다. 기쁘다는 듯이. 물론 그 기대하는 듯한 눈빛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저기 가서 서 있는 고애오. 두 팔 븝짝 들고 서는 고애오!”
“……알았어.”
침울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간 그녀는 진짜로 어느 건물 벽에 서서 두 팔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변 수습을 하던 사람들과 현장에 나온 히어로들이 그녀를 힐끔거린다. 이런 말은 또 참 잘 듣네.
신하연은 좀 이런 식으로 갈굴 필요성이 있다. 주연 등장인물 중에서 제일 불안한 녀석이다 보니. J도 거의 막상막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J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의도적으로 나를 만나길 기피하다 보니 대화 한 번 할 틈이 없었다.
연구소 놈들도 빨리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제 원작 스토리를 떠나서 나는 그녀가 더 이상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다나 씨.”
“호에에에, 옵바야. 이야기는 다 한 고애오?”
“네. 금방 끝났습니다.”
이안은 일이 끝난 뒤, 교단 측의 고위 관계자를 사건 현장에 불렀다. 이제는 일이 끝나 확실해졌으니 중대 사안이라며 부른다고 해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단 측의 관계자는 녹화된 영상들과 증언을 통해 금방 무언가를 유추해 냈다는 모양이다. 하기야 애초에 가짜 교황의 정체를 가장 먼저 밝혀냈던 게 한국 교단이었으니, 이번에도 그 역사대로 흘러가는 것이 맞겠지.
“일은 다 마쳤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에엥, 아니애오. 옵바야가 마니 도와준 거시애얌.”
“일단은 원래 저희 일이잖습니까.”
서로 겸양을 떨면서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이안은 이번 일을 통해 얻어 가는 게 꽤나 많았다. 교단에서의 신임을 포함하여 개인적인 성장까지. 그리고…….
“그나저나…… 그 미나짱 코스프레는…….”
“호에?”
……이것까지.
* * *
“끊어졌군.”
시기의 마왕은 자신의 아바타 중 하나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개중 가장 많은 힘을 배당한 개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만한 놈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바타가 전송해 온 기억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한국에 있는 교단에서 견습 성기사를 맡고 있는 이. 그리고 붉은색 머리칼을 가진 한 마법사였다.
만약에 아바타를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에 관여한 이가 누구냐 묻는다면 마왕은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견습 성기사에게 당할 만한 힘을 가진 객체는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마법사에게 당했을 것이다.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
마왕은 1400년 전 과거에 타 차원에서 봤던 용사 파티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외양과 그 성격이나 행동 양식이 빼다 박았던 그녀를. 그렇다면 알기 쉽다.
마왕은 그를 알아낸 이후로 곧바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러 아바타를 통해 모으는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했고, 마왕은 그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가장 빠르고 쉽게 알 수 있다는 곳을 찾아내었다.
“애기븝미팬카페……라.”
다만 마왕은 현대 문명의 이기와 감성에 무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