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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븝미쟝이 되었다-107화 (107/172)

#107화.

나츠키의 조부는 일본 내에서 꽤나 거대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사업가임과 동시에 히어로다. 지금에야 실상 히어로로서는 은퇴한 데다가 나이가 들어 덜하지만, 젊었을 적에 보였던 위용들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고 또 두려워한다……라고 분명 히어로 판타지에 언급이 되어 있었지.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으로서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구, 우리 강아지 왔어?”

“아, 할아버지! 아익! 그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버선발로 튀어나와 나츠키를 끌어안는다. 나츠키는 부끄러운 것인지,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그 몸부림이란 게 일반적인 노인 같으면 그대로 황천길로 갈 법한 것인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허허, 내 새끼. 힘이 많이 강해졌구나!”

“……그래, 할아버지 덕분이지, 뭐.”

나츠키는 이내 포기한 듯 몸부림을 멎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해 대며 근황을 물어보는 노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팔불출이었다. 하기야 능숙하지도 않던 한국어를,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편한 손녀 때문에 배울 정도라면 말 다 한 거겠지.

“할아버지, 근데…… 뒤에 친구들도 있는데.”

“어허, 그렇구나.”

그때야 자각한 듯, 헛기침을 연발하며 뒤로 물러서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긴장할 수밖에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그의 몸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력 양에 관한 한 나는 다른 히어로들과는 별세계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원을 달리했다. 하지만 지금 저 남자. 외견상으로는 노쇠해 보이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양이 내 몇 배는 많았다.

진짜 저게 세계관 최강자인가.

나는 조금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감정을 품을 수 있는 것도, 그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기운을 발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러했다면 당장에 지금 눈을 마주치고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겠지.

“우리 손녀 친구들인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그런 고시애오. 잘 부탁드리는 거야요!”

“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래. 나도 잘 부탁하네.”

외부로 사출해 내던 기운을 가라앉히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를 바라보며, 일리아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녀는 나츠키의 조부가 일본에서 ‘제일검’이라고 불렸던 타나카 테루야였던것을 몰랐단다. 같은 검의 길에서 거의 끝을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뤘던 사람이니, 동경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혹시 시간이 급하지 않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지…….”

“호에에, 안 급한 고시야요!”

“네, 저희 시간 많아요!”

“아니, 아…… 에휴…… 그래, 뭐.”

그의 부탁에, 나와 일리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백발 성성한 노인이 담소나 조금 나누자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나츠키는 무언가 예감한 듯이 우리를 만류하려다가, 포기했다. 왜 그러지? 나는 잠시 의문을 품었다. 그 이유는 꽤나 시간이 지난 이후에나 알 수 있었다.

“네…… 그렇죠.”

“허허, 45년 전이 떠오르는구나. 그때야 펜타곤 같은 교육 시설도 거의 없었던 때라, 애송이들이 많이 찾아왔었지. 밑에서 기르던 애들만 하더라도…….”

나츠키와 일리아 그리고 나까지. 모두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일본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남자라기에는, 지나치게 소탈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대화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거의 3시간 동안 우리는 그의 과거 연대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만 했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것이라기에는, 당장 지금도 그 영광의 시절이란 게 끝나지 않은 사람인지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쿡쿡.

나츠키는 내 허벅지를 찔렀다. 그리고는 입 모양으로 내게 슬쩍 말했다.

‘내가 이래서 말리려고 했던 거라고’

뭐 이럴 줄 알았나.

그저 고개나 끄덕거리면서, 몰래 하품이나 하는 게 다였다. 나는 이야기를 그만 파하자고 할 만큼 강심장이 되지 못했다. 이 사람이 내가 지금껏 싸워 온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인데, 내가 미쳤다고.

“어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무래도 너무 오래 붙잡아 둔 모양인가 보이.”

“아닙니다! 재밌었습니다.”

“언냐야…… 거짓말은 납븐...으븝.”

그로부터 또 시간이 십여 분쯤 지나고서야 테루야는 이야기를 마쳤다.

조금 전까지 같이 하품을 하고 있었으면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일리아에게 나는 일침을 날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가 입을 틀어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켄타! 이리 오게.”

“네, 회장님.”

“자네가 안내역을 해 주어야겠네. 숙소까지 안내해 주고, 다시 한국으로 갈 때까지 수행하게.”

“알겠습니다.”

켄타라는 이름의 한 남자는, 아무래도 테루야의 수행원으로 보였다. 그는 어딘가에 연락하여 자신의 역을 대체할 후임을 부름과 동시에 이내 우리를 안내했다.

“할아버지, 나중에 봐.”

“그래, 출국하기 전에는 꼭 오너라.”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츠키를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을 보며, 뭔가 조금 미안해졌다. 조금 더 잘 참고 들어줄 걸 그랬나.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 이야기들을 다시 듣고 싶지는 않다.

*    *    *

“으흐흐응…… 좋다.”

“헤으으으응…….”

흔히 일본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료칸이다.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고급 숙박 시설. 타나카 집안에서 내어 준 숙소 또한 그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만, 그보다 훨씬 급이 높다는 것만이 달랐지.

십수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넓은 욕탕에, 온천수가 가득했다. 일행은 모두 그곳에서 몸을 녹이며 피로를 풀고 있었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언냐야들…… 왜 다 옆에 붙어 있는 고애오...?”

“공간이 좁네, 응.”

“그래. 왜 이렇게 좁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좁기는 개뿔.

일리아와 나츠키는 굳이 넓은 욕탕 구석에서, 나와 같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좁다고 주장하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마력이 담겨 있다고 했나? 뭔가 진짜 몸이 좋아지는 느낌인데…….”

“느낌이 아니라 진짜 좋아져, 멍청아.”

“말 하나하나 꼬투리 잡는 거 봐. 넌 머리까지 푹 담가라. 그 성질머리도 좀 정화되게.”

“언냐야들, 여기까지 와서 싸우며는…… 헤으으응…….”

나는 양옆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며 비비적대는 그녀들을 말리려다,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소리 칠 수밖에 없었다. 야한 거 안 돼! 둘 모두 완전한 나신의 상태인지라 도대체가 눈 둘 곳이 없었다.

첨벙!

한동안 티격태격하며 싸우던 그녀들은 이내 육탄전을 벌였다.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속에 서로를 집어넣는다. 아까 머리까지 푹 담그니 뭐니 하는 이야기 때문인가.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애들은 애들이구나.

“호에……?”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파앙!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치며, 서로 공방을 주고받는 일리아와 나츠키. 이 미친년들은 여기서까지 이러고 앉아 있다.

“그마내여!”

나는 마력을 이용해, 둘 사이를 갈라 버렸다. 그에 나츠키가 입을 삐쭉 내밀며 나를 바라본다.

“야, 이거 내가 다 이긴 건데…….”

“개소리 마. 이기긴 뭘 이겨, 그럼  밖에 나가서 대련 한번 하던가.”

“이 식빵 년이. 그래, 더 가 보자. 이 씨…….”

“그만하라구여!”

꼬르르륵.

나는 물의 정령을 이용해 나츠키의 얼굴에 온천수를 퍼부었다. 그에 곧바로 조용해지는 나츠키. 조금 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흐트러진 채 중얼거렸다.

“……시발.”

그녀는 얼마 뒤 온천을 나서며 손가락으로 내 등허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지은 죄가 있으므로 그냥 헤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 뿐이었다.

“하와와와, 배고픈 고애오…….”

“그러게, 나도 배고프다. 밥 언제 나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니가 알 거잖아 그래도. 언냐야 나 밥 조.”

“나츠키 언냐야, 밥 조.”

“……쌍으로 지랄을 한다.”

나츠키는 고개를 젓더니, 이내 켄타라는 남자를 불러 무언가 지시했다. 그로부터 대략 20분 뒤에 우리는 거대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호에에에에.”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잃어버렸던 친언니가 있거든? 그런데 그 언니가 어렸을 적에 붉은 눈에 은발을 가지고 있…….”

“지랄 말고, 밥이나 먹어.”

그 상에 올려진 음식들은, 나름 이쪽에 와서 고급 음식점들을 꽤나 가본 내게도, 어렸을 적부터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일리아에게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냥 상 자체가 ‘일본’이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 하나하나 다 맛도 좋았다.

나야 얼마 못 먹었지마는.

“미친, 너 진짜 사람이냐?”

“뭐래, 지도 엄청 처먹어 놓고.”

“야, 니가 얘 20배는 먹었어.”

“어, 그래? 곧 40배 먹을 테니까 이거랑 이것 좀 더 달라고 해 줘.”

“어이가 없다. 진짜.”

일리아는 상을 통째로 들어 마시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꽤나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딱히 허겁지겁 먹는 것 같지도 않은데, 눈 깜빡하면 상 위의 음식들이 모두 그녀에 의해 사라지기 일쑤였다.

나츠키는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일리아의 부탁을 들어줬다. 역시 저 둘이 사이가 나쁜 건 아니라니까.

나는 그렇게 그녀가 밥을 먹고 있는 사이, 잠시 앞뜰에 나가봤다. 말이 뜰이지, 그 넓이만 하더라도 수십 평이 넘었다.

“하와와와와…….”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잠시간 그렇게 하품을 하며, 쏟아지는 졸음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호에?”

그런데, 그때 그 졸음을 확 가시게 만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기척이 느껴졌는데.

먀옹.

이내 그곳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모애요, 고양이였던 고시애오?”

나는 웃으면서, 이내 실내로 들어갔다.

마치 착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하지만 내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저거, 누구지?

조금 전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는 일반 고양이가 아니었다. 퍼밀리어. 보통 주술사들이 다루는, 사역마와 같은 존재.

보통은 그를 일반적인 동물과 구별할 수가 없기에 알아채지 못한 척을 했지만,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 음침한 기운을.

빌런. 그것도 당장 지금의 나와 겨뤄도 지지 않을 만큼 꽤나 강한 빌런이다.

어째서 타나카 가문의 숙소에 저런 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이곳을 감시하고 있던 놈인가, 아니면 우리 일행을 따라온 것인가…… 그 어느 쪽이든 진위를 밝혀내야만 했다.

“저기로 가는 고애오…….”

나는 몰래 그 퍼밀리어에게 위치 추적이 가능한 내 마력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과자부스러기처럼, 마력을 흩뿌리며 움직이는 녀석. 나는 그것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이내 퍼밀리어가 합쳐지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에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은, 웃는 듯하면서도 아닌 듯. 무표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켄타라는 이름의 그 수행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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