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연구소애오!
펜타곤 1학년 생도들이 가장 머리를 싸매는 시기. 바로 계열 선택을 하는 때였다.
1학년 때는 제각기 원하는 수업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다르다. 각자 계열을 골라, 확실하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통합 수업도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어차피 계열 선택이야 나는 무조건 마법 쪽이다. 이 몸뚱어리로 검술 배우리오?
내가 신경쓰고 있는 건 J였다. 그녀는 최근 들어 내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다가서려고 하면 그대로 도망쳐버린다.
그 이유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연구소’ 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선과 악. 둘 중 어느쪽이냐고 묻는다면 분명 악이라고 할 수 있을법한 곳.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악이라고 매도하기도 힘든 그곳.
나는 J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며 마음먹었다. 그곳에 가 봐야겠다고.
“언냐야!”
“어? 어…….”
원래라면 띨빵아,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을테지만 지금에서는 그저 어딘가 얼이 빠진듯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언냐야가 예전에 한 얘기 있잖아여……븝미쟝 약간 관심이 생겼어여.”
“뭐? 예전에 한 얘기라면…….”
“언냐야가 아는 옵바언냐야들이랑 같이하자고…….”
“안 돼!”
그녀의 비명 비슷한 목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생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한다. J는 그것을 의식하며 잠시간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다시 내게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야. 그냥 안 그래도 돼. 너는…….”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술을 뒤틀었다. 엄청 굴려대는 모양이다. 그래도 게임에서는 적당히 적응기간을 거치게 해주는데……무엇 때문에 연구소장, 소속 빌런들에게는 ‘어머니’라고 불리는 그녀의 심경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J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확장되었다 이어 풀어진다.
“꼭 드러간다는게 아니라여……궁금한고애오!”
“궁금해?”
“언냐야가 있는곳이 어딘지. 알고시퍼서여.”
“어딘지 알고싶다……그건…….”
J는 눈에띄게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에게 죄악감을 가지고 있다. 본래는 그 죄악감을 떨쳐내고 조금은 특의한 정의관을 가진채 살아가게 되지만, 갓 17살인 그녀에게 아직 그 시기가 오는것은 요원해보였다. 원래 생도로 위장했을 적의 그녀는 임무를 거의 받지 않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이랑은 상황이 다르다.
“……그래. 알겠어. 너도 미리 알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허탈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 지금의 모습에서는 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납븐 고애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것인지 모르겠지만, J에게 급작스럽게 임무를 다수 맡기고 있는 연구소장. 나는 그를 만나봐야만 할 것 같았다.
* * *
익숙한 장소였다. 과거 J와 만났던 그 장소. 내가 그 연구소장의 선물을 건네받았던 그곳. 그 지점을 지나 대로로 쭉 빠지다가, 환영마법이 걸려있는 한 길목을 통과하면 비로소 ‘연구소’가 나오게 된다.
J는 익숙하다는듯이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고 조금은 당황한 듯 했다.
“너……와본 적 있어? 아니 어떻게…….”
“언냐야 따라가는건데여?”
“따라가? 어……하지만 앞서갔잖아 방금.”
“븝미쟝 눈치가 조은고애오! 똑똑한 아가야애오~”
나름 심각하던 J의 표정이 잠시 풀어지더니,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녀는 못말리겠다는듯 고개를 젓더니 이내 내부로 나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와. 저기는 우리 잘나신……형제 자매들이 있는 곳이라.”
J는 조금은 적대감이 풍기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연구소 내의 인원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친밀하다. 하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겠지. 애초에 그녀는 외부사람중엔 아예 친분을 가진 이가 없으니까. 물론 지금에야 내가 있지만.
연구소 내부의 경비는……놀라울정도로 허술했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외부인에게 출입을 허용해도 되는건가? 물론 환영마법이 깔려있어 찾기 힘들다고는 해도, 딱 내 수준만 되더라도 간파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대략 2~3000등대의 현역 히어로 수준만 되어도 된단 소리였다.
우리는 함께 층계를 올랐다. 무의식적으로 걸어서 오르던 나는, 2층에 도달하자 숨을 헥헥댔고 이어 지팡이에 올라탈 수 밖엔 없었다. 오지게 가파르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엄마……한테 물어봐야 하니까. 만나고싶다고 했지?”
“그런 고시애오!”
“그래……안에 뭐 먹고싶은거 있으면 먹고 있어.”
그녀에게 배당된 개인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고, J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연구소장에게 향했다. 나는 그녀의 뒤에 몰래 마력구체를 띄워 올렸다. 물론 녹화와 송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미 스텔스에 한정해서는 마탑의 상위 마법사에도 비견할 수 있는 나였으니, 저 구체는 웬만해선 들키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하와와와…….”
나는 무료하게 J의 침대 위에 앉았다. 대략 16평? 17평 남짓 되는 공간. 오피스텔정도 크기인 개인실에는 필요한것들이 꼼꼼하게 차 있었으나, 나는 입을 내밀 수 밖에 없었다. 펜타곤 숙소나 별로 다를바가 없어보였다. 되려 내 숙소와 비교하면 훨씬 떨어졌다. 그렇게 부려먹으면서 취급을 이정도로밖에 안 해주나. 물론 J가 이런 여타 환경에 대해 둔감한 편이기야 하지만…….
언제쯤 도착할까. 나는 안구에 마력을 덧씌워 구체와 시야를 공유했다. 그러자 J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착잡한 듯 건물 바깥의 한 구석에서 연초를 피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 하지만 그는 아련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겹쳐 퇴폐적으로 보였다.
쓰으으읍.
후우.
거 맛나게도 빠네. 기분이 영 좋지 않아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시야를 공유하길 그만뒀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얌얌. 으음…….”
나는 선반에 올려진 초콜릿 하나를 집어먹었다. 뭔가 맛이 좀 오묘한게 두 번째 조각까지 먹고싶지는 않았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때였다.
똑똑.
문에서 들리는 노크소리. 나는 순간 숨을 죽였다. 갑자기 무슨 노크? J는 다른곳에 가 있는데……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올때 노크를 할리가 없기도 했다.
“있나? 없어? 뭐, 상관없겠지. 들어간다?”
뭐야, 저 미친년은.
있으나 없으나 그냥 밀고들어오겠다고 선언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 나는 호에에, 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벌컥.
이어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것은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있는 소녀. 굉장히 앳되보이는 생김새를 하고 있는 아이였다. 10살 전후쯤 되어보이는 외양이었는데, 나는 기억 속 한 줄기 편린에서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 너는 누구야?”
버릇없게 나를 손가락으로 척하니 가리키며 말하는 꼬맹이. 물론 실상을 알고 나면 버릇없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린. 나이는 지금 시점이면 대략 50살쯤이려나. 연구소에서 ‘합성’을 통해 깨어난 뱀파이어었다. 그것도 진조.
지금이면 깨어난 지 대략 2년쯤 되었을 시점인가. 그렇게 치면 또 2살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잡스러운 생각을 하던 나는,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호에에.”
“여기 J방인뎅. 왜 여기 있는거야?”
“흐흠, J언냐야가 븝미쟝을 초대해준고애오.”
“그래? 별일이넹. 애초에 여기가 초대해줄만한 곳도 아닌뎅.”
린은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자기가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J랑 내가 무슨 관계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처음보는 사람한테 물어볼만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과한 것 같기도 한 이야기까지.
“킁킁킁……그나저나 너 맛있는 냄새나. 흐으읍…….”
“호에에에! 븝미쟝 잡아먹으면 안대는고시애오!”
“안잡아먹어……그런데 킁킁……한 입만 빨아 보면 안 돼?”
질문 세례가 끝나자, 그녀는 내 목덜미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나를 덥썩 물어버릴까봐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진조의 뱀파이어, 린. 그녀에게 피를 빨린 대상은 모두 뱀파이어가 된다.
다만 린은 거기서 멈췄다. 연구소에서 미리 교육도 받았을테니 나를 갑자기 물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걱정 마. 린은 아주 참을성이 강하다구……그래도 혹시 피 흘릴 일 있으면 모아뒀다가 린한테 줘. 직접 빠는것보단 못하지만 간식으로는 먹을만해.”
“아, 아랏서여…….”
“오, 진짜? 약속하는거다?”
“약속하는고시애오…….”
그녀는 매우 기쁜듯이 보였다. 물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한데, 내가 피흘릴 일이 있으면 그대로 저승행이거든.
“너 착한애구나. 응, 착한애한테는 선물주는거랬어.”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마력을 몽글몽글하게 띄웠다. 그것은 마치 혈액처럼 붉게 변해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실제 사람의 몸에서 나온것이 아닌 마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그런가. 그 혈액은 순간 타원형의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굳혀져갔다.
“자! 이거 가져!”
“호에에에.”
그것은 붉은색의 반지. 어떠한 문양도 없는 반지였으나 나는 그것에서 느껴지는 마력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 꽤 괜찮은 물건이겠지.
“그럼, 나는 나가볼게. J랑 놀고시펐는데…….”
“호에에, 언냐야랑 같이 노는고애오?”
“가끔? 그런데 보통 귀찮아행. 린은 그래서 조금 슬퍼.”
그녀는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J는 나쁜애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진조의 뱀파이어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안개화. 완전히 기화되어버린 그녀는 이내 방문 틈새로 쏘옥 빠져나갔다. 그냥 문 열고 나가면 되지 굳이 저렇게 나가야 하나.
“호에에……방금 먼 일이 있었던건가여…….”
나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듯한 감각을 느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난 후유증이었다. 저 ‘린’은 싱글스토리 중반 이후에서 두 가지 루트가 갈리는 녀석이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앞선 행보에 따라 아군이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하는 녀석.
……차라리 지금 안면이나 터 놓은게 다행인가.
이것도 행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나는 눈에 마력을 다시금 덧씌웟다. 지금쯤이면 J가 연구소장에게 갔을 것이었다. 이어 내 눈이 파랗게 빛났다.
“호에에에.”
그리고 이내 눈 앞에 보이는 모습.
나는 그것을 보며 헛숨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두, 둘이 머하는거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