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용아가를 지켜여!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새로 생긴 던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그 던전에 들어간 이후, 빠져나오기까진 넉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까.’
이건, 히어로 판타지에서 한 던전에 들어간 히어로가 남긴 대사였다.
일반적인 던전이 아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형식의 던전. 지금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는 패턴이지만, 딱 2~3년 정도만 지나도 이런 던전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 던전이란 바로 ‘시나리오’ 형식의 던전이었다.
실제로 멀티 플레이에서도 많이 겪을 수 있는 던전인데, 단지 던전의 목표가 던전 내의 몬스터 말살 내지는 보스몹 처단이 아니라 일정한 목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더럽게 오래 걸리기도 한다.
“븝미쟝은 그러케 안 걸리는 고애오.”
물론, 나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다.
그런 형식의 던전들을 공략하는 방법도 알고 있고, 실제로 맛보기 수준이지만, 해 보기도 했으니까.
꾸응.
어깨에 얹힌 요정용이 아양을 떨었다. 이 녀석을 구하게 된 던전. 그곳은 요정용을 죽이는 게 아닌 지켜 주고, 길들임으로 인해 추가 보상을 주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시나리오 형식의 던전 중에 굉장히 간단한 것들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오늘 내가 들어갈 곳은 아니지만.
나는 목적지에 다다라, 앞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업는 고애오!”
이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공터.
만약에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내가 헛걸음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 뒤면 이곳의 실체가 나타날 것이라는 걸.
“마나 씨!”
활성화되는 마력. 나는 그것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요정용을 만졌다.
꾸으응.
무언가 오묘한 기분인지, 눈을 부르르 떨며 몸을 비트는 녀석.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에서 오라 패턴이 퍼져 나온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건 가지고 있는 오라 패턴. 그것이 마력으로 형상화되어 퍼져 나가기 시작한 지 대략 3분쯤 지났을 때, 반응이 왔다.
쿠그그그그.
진동하는 대지, 아까까지 그저 공터였던 공간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이어 온통 흑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상이 솟아올랐다. 그 석상의 형태는 누가 봐도 드래곤, 용족이었다.
이곳 던전의 이름은 드래곤 가드(dragon guard).
그 이름답게, 용혈을 뿌리거나 혹은 이렇게 직접 용족이 오러 패턴으로 이루어진 파장을 흩뿌려야 활성화되는 던전이었다.
내가 이 쓸모도 없는 녀석을 데리고 온 게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을 들어 올렸다. 요정용은 그래도 나름 조상에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인가, 석상을 보고 낑낑거리면서 발버둥을 쳤다.
“아가야, 가만히 있는 고애오.”
물론, 내가 한마디 하자 바로 조용해졌지만.
나는 석상으로 다가갔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우우웅.
‘드래곤 가드’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왜 왔겠냐.
나는 곧바로 알림을 수락했고,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 * *
시나리오 던전은 각각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흔한 스토리로는 모종의 이유로 도망치는 도망자를 도와준다든가, 혹은 반대로 추격한다거나 하는 것이 있다. 이곳, 드래곤 가드의 시나리오는 그것보다 복잡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내가 처음에 해야 할 일이란…….
“헤으응…… 헤응…….”
“똑바로 걸어!”
“븝미쟝…… 주거여어어…….”
“아까부터 시발, 그놈의 븝미쟝은 뭔 소리야?”
뒤에서 잔뜩 성이 난 장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그에게 개긴다.
“아 몰라여. 븝미쟝 마법 쓰게 해 주는 고애오!”
“하아…… 이래서 마법사란 족속들은…….”
장교는 얼굴을 감싸 쥐고 몇 초간 갈등하더니, 이내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마법을 써도 된다는 뜻이었다. 진작에 이럴 것이지.
“후와앙.”
나는 부양 마법을 사용하여 이내 공중에 떠올랐다. 지팡이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안 해도 됐을 텐데, 아쉽게도 이 시나리오 던전에는 외부 물품을 반입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한 왕국의 군대에 함께 편성된 채 목적지로 행군하고 있다.
이 군대와 함께 목적지에 있는 목표를 살해하는 것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
다만 내게 있어 문제는 그 목표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군율에 따라서 걸어서 행군하는 게, 웬만한 보스 레이드보다 힘겨웠다.
다행히 왕국 군 장교가 융통성이 있어서(?) 이렇게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장교의 얼굴이 팍 구겨진다.
끄응.
그 와중에 내 품속에 숨겨져 있는 요정용.
녀석은 안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불편해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꺼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녀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하와와와…….”
군대의 행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과연 이 행군의 끝이 나긴 할까, 싶을 정도로.
내가 군에 있을 때 경험했던 행군이 생각이 나는데…….
“호에에, 무슨 생각하는 고애오. 아가야는 군대 못가여…… 옵바야들이 가는 고애오!”
호에에에, 하면서 한 차례 머리를 흔들고,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기를 수십여 분.
이제는 그것마저 지쳐 갈 때쯤, 나는 장교에게 말을 걸었다.
“옵바야.”
“……바깥에서는 겨우 오러 유저급의 기사겠지만, 엄연히 군 내에서는 당신 상관이야. 호칭을 가려 하게.”
“옵바야.”
“어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 뭔가 골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투구를 콕콕 건드리며 말했다.
“우리 언제까지 가는 고애오?”
“당연히 산맥 꼭대기까지 가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드래곤들 중에 산맥 중앙이나 아래에 레어를 만드는 나사 빠진 놈은 없어. 지금 잡으러 가는 놈이 갓 태어난 새끼라고는 해도, 그 어미가 둥지를 지어 줬단 말이야.”
내가 중간중간 뭐라고 반박이나 태클이라도 걸까 싶어, 단번에 말을 쏟아내는 장교의 모습.
그의 말대로, 이 군대가 편성된 이유는 이곳 산맥 꼭대기에 있는 레어, 그 안에 있는, 갓 태어난 헤츨링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퀘스트 창을 통해 설명된 배경으로는, 대략 석 달 전에 이곳에 헤츨링을 낳아 키우고 있던 어미가 다른 지역에서 ‘드래곤슬레이어’들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 왕국 군, 그러니까 내가 속한 이 군대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헤츨링을 잡으러 가는 것이고.
“호에에, 아가용을 죽이는 거는 너무 불쌍한 고애오…….”
“불쌍하긴…… 쯧, 어차피 지금 잡으러 가는 녀석 어미도, 괜히 제국 영공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처단된 놈이야. 거기서 희생된 사람 중에 어린아이가 없었겠나?”
“그거는…… 그렇네여.”
거, 맞는 말이네.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보면 그놈이 그놈이니까.
내심 장교도 심심했던지, 그는 내가 처음 말꼬를 튼 이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주절거리며 읊었다.
왕국 근처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왕궁에서 벌어지는 소문에 대한 일들이라든가…… 개중에는 물론 가십거리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았다.
“거, 최근에 왕국에 출판되는 서적에 대해서 외설적인 부분에 검열한다더라고. 나, 참, 귀족이나 왕족이나, 지들은 허구한 날 떡이나 치면서…….”
“호에에에, 납븐 말 안 되는 고애오!”
나는 귀를 막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 시대나 지금이나 돌아가는 꼴은 비슷하구나.
그렇게 장교와 나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긴장감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헤츨링 하나를 잡으러 가는 데에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생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은, 드래곤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약하니까.
“전군, 정지!”
전열에 있는 장교의 목소리와 함께, 왕국 군이 발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산 정상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헤츨링과 전투가 벌어지겠지.
꿀꺽.
각자 머릿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는지, 침을 넘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나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 나도 행동을 해야 할 때인가.
* * *
“자, 그럼 이제 자네도 준비를……”
왕국 군 장교, 바라한은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희한하게 사교성이 좋아 행군을 하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그녀. 하지만 항상 그의 오른쪽에서 둥실둥실 떠 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뭐야?”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마법사를 찾느라, 그는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어, 저거……? 이상한데?”
“전군 무기 들어! 경계 태세로!”
웅성거리는 왕국 군. 그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각자 병장기를 놓쳐 버리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 두려움의 이유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분명 제국의 수도에서 숨을 거뒀다고 알려진 블랙 드래곤, 녀석이 집채만 한 덩치를 뽐내며 포효했다.
KU TAI DHA KRRRRRR!
주변의 나무들이 허리를 굽히며, 부러질 듯이 휘청거린다. 병사들은 서로의 몸에 기대며,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에 넘어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으…… 으…….”
드래곤은 이후, 그저 병사들을 응시했다. 마치 이래도 덤빌 거냐는 듯, 위협적인 그 눈동자에 다들 다리를 후들거리며 자신들을 이끄는 장교를 쳐다봤다. 이제는 퇴각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 하지만 장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석궁, 앞으로.”
그는 확실하게, 후퇴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석궁부대는 그저 후위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푹!
그러자, 장교는 검을 빼 들어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석궁병을 찔러 버렸다.
끄륵, 검붉은 피를 토해 낸 병사가 바닥에 쓰러져 바들거리다가, 죽었다.
“나오지 않으면, 군율에 따라 처벌하겠다. 석궁 앞으로.”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서는 석궁병들.
그들은 석궁을 받쳐 들고, 이어 드래곤을 향해 격발했다.
쐐액!
발사되는 화살들. 병사들은 그 누구도 그것이 드래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드래곤 스킨이 무엇인가. 무려 오러 블레이드로도 자르지 못한다고 알려진, 현존하는 가장 단단한 물질이 아닌가. 그것이 겨우 오크나 잡는 화살에 뚫릴 리가…….
푸욱!
“어?”
“말도 안 돼!”
있었다.
화살이 드래곤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그것이 유의미한 타격이었음은, 몸을 비척거리며 괴로워하는 드래곤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쏴라, 더 쏴!”
추가로 날아드는 화살이, 드래곤에게 계속해서 먹혀들자, 이내 전원이 드래곤을 공격하는 데에 열중했다. 물론 드래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째서 용언 마법이나 브레스를 사용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육체로 병사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날아올랐다.
콰앙!
“으아아악!”
“비, 비켜!”
실제로 그것은 왕국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거대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리력만 하더라도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할 만하다는 생각.
그리고 근처 숲에 숨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 마법사의 생각 또한 같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그녀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다.
“드래곤이 가짜니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