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하와와가 아니애여!
그저 사냥하러 온 필드에서, 메인 스토리에 등장하는 대형 빌런 조직의 간부를 만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첫 번째 대안, 그대로 못 본 척하고 도망친다.
두 번째 대안, 사무소에 돌아가서 신고하고 다른 히어로들과 함께 제압한다.
세 번째 대안, 그냥 때려잡는다.
머릿속에서는 세 개의 방안이 난립했다. 역시나 마음에 끌리는 건 첫 번째. 괜히 사서 위험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차피 저놈들은 내가 안 잡아도 언젠간 죽을 녀석들인데.
그렇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가려던 때였다.
븝미쟝은 정의의 사도인 거시야요!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의지가 끓어오릅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그…… 아니지?
현재 위치로부터 반경 200m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지정된 적들을 해치우거나, 추격하는 경우 이 상태가 해제됩니다.
“장난치지 마라여!”
아, 이건 아니지.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망연히 바라봤다.
지금 나보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죽을 확률이 꽤나 높은 싸움을.
주변에는 정말로 옅은 노란빛을 띠는 마력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처럼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만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보고 또 어떠한 성질인지 확인까지 할 수 있었다. 저건 명백히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력 장막이다.
혹시나 깨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그런 식으로 해 놨을 리가 있나. 히어로판타지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안내해 주는 사실은 절대적이다. 나갈 수 없다면 나갈 수 없는 거다.
“하와와와와…….”
나는 반쯤 나가 버린 정신을, 빠르게 수습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놈들을 잡아 죽여야만 했다.
사실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되레 내가 7 대 3 정도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본래 전력상으로 따지자면 5 대 5 정도지만, 저쪽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나는 저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나는 저 둘의 특성과 전투 방식을 모두 꿰고 있다는 점에서 생긴 격차였다.
켈빈, 녀석은 자신의 마력을 마치 촉수와 같은 형태로 조형하여 전투를 벌이는 녀석이다.
순전히 마력을 이용함에도, 마법보다는 체술에 가까운 그 특이한 특성.
처음에 녀석이 벌이는 전투를 본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징그럽다고.
촉수를 상대 몸이 꽂아서 정기를 빨아먹는다거나, 몸을 강하게 조여, 터뜨려 버린다거나……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취향을 그대로 전투에 반영시키는 녀석이었다.
반면에 이상수는 완벽하게 반대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형화된 검방전사. 대부분의 빌런들이 대외적으로 금지된 사술을 익혀 전투하고, 흑마력을 사용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왜 빌런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정형화된 전투 방식을 구사한다.
빌런이 된 것에 대해서 무언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중론이었지만 어차피 게임 중반에 마주치고 바로 죽어 버리는 녀석이니만큼 그 뒷사정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투 스타일이 어쨌건 놈도 악당이라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에 일조한 나쁜 놈.
“납븐 옵바야는 혼나야 하는 고애오…….”
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두 빌런 중에 어느 쪽이 더 까다롭냐고 하면…… 아무래도 이상수보다는 켈빈 쪽이었다.
동급의 빌런들과 히어로가 만난다면 빌런들이 유리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정공법을 사용하는 이상수는 대처법이 굉장히 명확했다.
하지만 켈빈 같은 경우에는 뭔 개짓거리를 할지 예상이 가질 않는다.
그러니까 저 녀석부터 잡는 게 옳았다.
“땅아가, 나오는 고애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땅의 정령이 눈 앞에 나타났다.
항상 거대화한 상태로 보다가, 오랜만에 작은 모습으로 보니 조금 색달랐다.
“아가야…… 미안한고애오…….”
나는 녀석에게 미리 사과했다. 앞으로 시킬 일이 꽤나 개같은 것이었으니까.
땅의 정령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말없이 녀석의 크기를 조금 키웠다. 딱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크기. 대략 3~4살 정도의 어린아이와 같은 크기였다.
“시선을 끌어 주는 고애오…….”
음.
나는 녀석에게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라고 명령했다.
땅의 정령은, 그에 평소와 같이 걸어서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골렘 인형과 같이 보였다.
탁탁탁.
원래라면 지축을 흔들어야 할 녀석의 발걸음 소리가 앙증맞게 바뀐다.
물론 그럼에도 저쪽에서 알아챌 만큼의 소음은 되었기에, 켈빈이 이쪽을 바라본다.
“뭐야?”
조금 전까지 드레이크들을 학살하고 있던 켈빈.
그는 분명 드레이크를 다 죽였음에도 기척이 느껴지는 것에, 이상한 듯 갸웃거리면서도 주저 없이 촉수부터 날렸다. 만약에 맞는 게 사람이더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하기야, 그런걸 신경 썼으면 빌런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투콱!
이어, 흙의 정령의 몸에 촉수가 박혀 든다.
느껴져야 할 말랑하고 뜨끈한 살점의 감촉이 아닌, 차갑고 축축한 흙의 감촉이 느껴짐에 당황하고 있었다.
좋아, 됐다.
이걸로 낚시 성공인가.
켈빈은 지금 상공에 떠 있었다.
물론 부유 마법을 사용했다던가, 나처럼 지팡이를 탔다던가 하는 게 아니었다.
기다란 촉수 몇 가닥을 지상에 지지대로 박은 채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상수도 그 옆에 같이 타 있는 상태였고.
드레이크들을 빠르게 찾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 같은데, 아마 그게 녀석의 가장 큰 패착이 될 것이었다.
지상으로부터 대략 15M 정도의 높이. 거기서 떨어지면 꽤나 아플거다.
“당기는 고애오!”
나는 순간적으로 흙의 정령의 몸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대략 전체 마력의 1/5 정도. 이 정도 마력이면 웬만한 히어로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마력량보다도 많다.
뿌드드드득!
그 마력으로 흙의 정령이 이뤄 낸 것은 부분 거대화.
조그마한 몸통은 그대로 둔 채, 팔뚝만이 수십 배 이상 부풀어 올랐다.
이어 그 흉악한 팔뚝으로 사출된 촉수를 잡아, 그대로 땅으로 내리꽂아 버렸다.
“으어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땅에 꽂히는 녀석.
자욱한 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크으윽…… 씨발.”
켈빈이 마법사보다는 무투가에 가깝다는 것은 단지 특성에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오로지 마력만을 집중적으로 성장시킨 그의 본체는 굉장히 연약했다. 내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싸움이었다면 그 본체를 직접 타격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을 터다.
몸에서 나온 촉수들이 방어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 버리면 촉수고 나발이고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를 향해 마법을 사용해, 그대로 끝내려고 했다.
츠카아악!
“꺄아악!”
다만 나를 향해 급작스레 쇄도한 참격.
그 때문에 마무리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깝군.”
담담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미친.
방금 죽을 뻔한 건가?
켈빈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달려온 이상수가, 내게 검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터다.
순간 나도 놓칠 만큼 빠른 속도.
원작에서 이상수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보는, 듣도 보도 못했다.
방금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망정이지 혹여 지금과 같은 거리에서 다시 한 번 참격을 가해 온다면? 과연 내가 반응하고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꿀꺽.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게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바인드(bind)로 일단 움직임부터 막아야 하나?
하지만 움직임이 저렇게 빠르다면 맞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대상 지정 마법과 섞기에는 아직 내 수준이 그 정도는 안 되고…….
머릿속에 온갖 수들이 난립한다.
이 바보 같은 머리로는 그것 중에 어느 하나 고를 수가 없었다.
답은 하나인가, 그냥 정공법으로 대처하다 최후에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불사신선으로 변하던가 해서…….
“이름이 뭐지?”
“하와와와?”
“하와와…… 그게 네 이름인가?”
“그, 그럴 리가여.”
“……하와와. 기억해 두겠다.”
저 새끼 가는 귀가 먹었나?
급작스럽게 이름을 물어오는 바람에, 당황해서 나온 감탄사를 그대로 이름으로 알아들어 버린다. 정정까지 해 줬음에도.
뭐, 죽이기 전에 이름 물어보는 악취미라도 있는 건가?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다음에 보자고, 하와와.”
이상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가버렸다.
“……왜여?”
그 도망가는 속도가, 조금 전에 내게 쇄도하던 속도와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그 순속을 일시적으로 낼 수 있던 것도 아니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왜 도망가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끄르륵…….”
“아, 옵바야가 남아 있었져.”
잠시간 그에 의문을 품으며, 고심하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켈빈의 신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마나 씨!”
퍼억!
나는 가볍게 충격 마법으로 녀석의 심부를 강타했고, 켈빈은 명치 부근이 오목해진 채로 공중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훌륭하게 적들을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퍼져 나갔던 장막이 서서히 걷히는 게 보입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며, 정말로 주변을 감싸고 있던 장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보상도 없는 건가여…….”
하지만 나는 그에 분노를 느꼈다.
사람을 갑자기 사지로 몰아넣어 놓고, 보상 한 톨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몸에 힘이 쫙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하와와, 사냥은 나중에 하는 고…… 잠깐 만여.”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고, 사냥은 나중에 하자.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나중에도 못 하는 고애오…….”
조금 전에 도망친 이상수.
녀석은 내 이름을 잘못 알았긴 해도, 분명히 내 인상착의를 모두 알고 있었다.
솔직히 어딜 가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내 인상착의. 이름을 다르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벌인 일이라는걸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그러면 흑사회로부터 척살령이 떨어질 터였다.
“호에에에에.”
흑사회 척살조.
그들은 100위 이내의 최상위권 히어로들도 사냥할 수 있는 무력을 지닌 놈들이었다.
그 대상이 나라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고 죽을 수도 있었다.
“집에…… 집에 있어야 하는 고애오…….”
무언가 방책이 생길 때까지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그게 내 머릿속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략 1달간 길드 내에서만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했다…….
* * *
“흐음.”
이상수,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의 동료를 죽인 여자아이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
“대강…… 이랬던 것 같군.”
이어 대략적인 모습을 떠올린 그는 그것을 토대로 초상화를 그려 냈다.
그러고는 그 초상화를 흑사회 간부실로 들고 갔다.
“여기, 이번에 켈빈을 죽인 녀석의 모습입니다.”
“……또 그림이냐?”
“네.”
“하아…… 또 좆같이 그려 왔겠지. 제발 넌 스마트폰이라도 좀 들고 다녀.”
“…….”
상급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보며, 머리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 그림을 보더니,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로 종이를 그에게 다시금 돌려주며 말했다.
“이 새끼야. 넌 이게 사람으로 보이냐? 어디 머리 긴 구울을 그려 놨어. 이렇게 생긴 년이 존재한다고?”
“……조금 다른 거 같긴 합니다.”
“조금 다르긴 시발.”
“아, 대신 이름은 알아 왔습니다.”
이상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이어 다급하게 말했다.
상급자는 그제야 분노하는 것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후, 그나마 시발 이름이라도 알아 왔다니 대단하네. 본명을 말했을지 가명을 말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아주 대견해?”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뭔데?”
“하와……였나. 아니면 하아……였던 것 같습니다.”
“지랄을 하고 있네.”
이상수, 그는 심각한 안면 인식 장애에 단기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