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애기븝미쟝이 되었다-129화 (129/172)

#129화. 벌써 끝이야?

이엘라와 내게 준 임무는 지정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여타 히어로에게 주는 임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 던전에 이미 들어온 선객이 있다면 죽여 버려도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이 던전 자체가 히어로 길드의 소유라는 것이다.

“하와와와…….”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던전을 바라봤다.

저 던전의 명칭은 그렘린 던전. 꽤나 흔하게 나타나는 던전들 중 하나였다.

그렘린 던전은 대체로 적정 15~20등급.

하지만 저건 특이하게도 11등급으로 측정되었다.

그렘린 자체가 굉장히 약한 개체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이상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머리 아픈 고애오…….”

물론, 나는 11등급 던전을 솔로잉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프로필상 나와 있는 ‘불사신선’과 이엘라의 경우에는 둘이 합심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했다.

과연 이 던전을 클리어해서 돌아간다고, 약속대로 정식 단원이 되게 해 줄까?

상당한 의문이 드는 화두였다. 내 예상으로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발할라의 집회가 원하는 최대 성과는 저 안에서 먼저 진입한 히어로들과 싸우다가, 자멸하고 다 같이 죽는 것. 이엘라도 그것을 대충 눈치챘기에 분개한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된 고애오…….”

나는 이엘라와 미리 이야기한 시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딱 지금으로부터 10분전에 히어로들이 던전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던전 안에서 그들과도 마주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더럽게 꼬인 상황이었다.

나는 고민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엘라를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 둬야 할지.

매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죽어야 마땅한 잘못을 했나?’

이엘라는 빌런이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선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후일 발할라의 집회에서 주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어도 그러할까?

개인적으로 빌런 활동을 하더라도, 혹은 다시 흑사회로 돌아가더라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계도의 기회가 없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선례가 있다.

J, 그녀 또한 빌런이니까.

물론 J 같은 경우에는 경우가 조금 특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잣대가 이중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본래 ‘히어로판타지’에서 주연이었다고 해서.

내가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선택들을 해 왔고, 그에 그녀를 양지로 끌어 올렸으니까.

“왜 하게 된 고애오…….”

그녀가 도대체 왜 빌런이 되었는지, 나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괜시리 복잡한 사정이 엮여 있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정말로 이엘라를 죽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끄으웅…….”

나는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펴고, 허리를 세운 채 은신해 있던 바위 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외형을 변화시킨다. 원래 현대에서 나였다면 필시 ‘기생오라비’라고 불렀을 법한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말투를 가진 남성으로.

“쒸뿔련…… 거…… 쩝…… 하지말지…… 그랬어…… 잉……!”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약속된 집결지에 나타난 이엘라.

그 천진한 연보라색 머리칼과 회색에 가까운 맑은 눈동자가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 형씨. 왔어?”

그 말투는 여전하다.

무슨 주막집에서 동네 친구라도 본 것처럼 구는 그녀의 태도.

오늘은 이전에 입고 있던 가죽 슈트가 아닌, 웬 원피스 형태로 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력 증폭과 회복량 증가…… 그쪽 계열의 마법이 인첸트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오늘 형씨 안 올 줄 알았어. 솔직히 덮어 놓고 튀어도 할 말 없잖아? 그러면 나도 튈려고 조금 전까지 준비 중이었는데 말이야. 형씨 없이는 저거 못 깰것 같거든.”

천진하게 자기 얘기를 하는 이엘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정말로 그냥 여기서 멈추는게 더 나았을까.

발할라의 집회에 대한 정보들, 그것이 분명 내게 필요한 것은 맞았으나 이렇게까지…….

“형씨, 왜 그래. 표정 좀 풀어 봐. 무서워 죽겠어.”

그녀는 슬쩍 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쭉 끌어 올려 본다.

그리고는 혹시나 자기 행동에 불쾌할까 봐 머쓱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먼저, 들어가.”

“형씨, 첨으로 그 이상한 말투 안 썼어!”

일순 경악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약간의 마력을 끌어 올리는 이엘라.

그녀의 몸에 나는 알 수 없는 푸른색의 오라가 감돈다.

“형씨도 바로 따라와! 나만 쏙 버려 버리고 안 들어오기 없어!”

포탈 속으로 사라지는 이엘라.

나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렘린.

녀석들은 생각보다 혐오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자세히 뜯어 보고, 귀여운 구석을 찾으라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법한 수준.

오크나 고블린을 기준으로 예를 들어 보면…… 그 초록색 피부와 제멋대로 자리 잡은 이목구비. 그리고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구강구조까지.

귀여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렘린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베이스가 ‘요정’인지라.

진짜 요정들에 비하면 물론 흉측한 생김새를 지닌 것은 맞으나, 보기에 그리 거북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일부 히어로들 같은 경우에는 그렘린을 사냥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던전에서는 아무래도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그렘린 애호가라도 말이다.

캬아아악.

“방패 세워! 제기랄, 무조건 당장 달라붙은 놈들부터 죽여!”

“씨팔, 제대로 세우고 있으니까 고나리질 좀 하지 마!”

흉신 악살과 같은 얼굴로 독하게 달려드는 그렘린들.

그 모습에서 평상시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11등급 던전인가 생각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그렘린들의 전체적인 전투력이 상당히 높고, 거기에 무슨 환술에나 걸린 것처럼 광분한 채로 달려들었다.

“정민이 형! 이거 받아요!”

“……이걸 마신다고 해서 딱히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안 마시는 것보단 낫지!”

히어로들은 제각기 유기적으로 대열을 갖추며 대응했다.

그 개개인의 수준으로 따지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으나, 오래 호흡을 맞춘 팀인 것 같았다.

후방에서 축복과 치유를 하고 있는 이.

비슷한 계열의 다른 능력자들이 그러하듯, 일단 한 사이클을 돌리고 나면 그동안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사이사이에 팀원들이 필요한 보급품을 던져 주거나, 혹은 후방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는 수단으로 공격을 가했다.

쨍그랑!

그렘린들이 모여 있는 한복판에 포션 한 병이 날아와 깨진다.

그와 동시에 포션이 깨진 곳 주변에서부터 한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케에엑!

비명을 지르며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렘린들.

하지만 순식간에 얼어붙는 주변의 공기에, 움직임 또한 둔해졌다.

결국 일부 그렘림들은 그대로 하반신이 얼어붙은 채,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저거, 혹시 본인이 직접 만든 건가?

후방에서 아까까지 버프를 넣고, 사람들에게 시약들을 던져 준 이.

그는 굉장히 적재적소에 그것들을 잘 활용하고 또한 구별했다.

자신이 만든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만약에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영입 제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형씨.”

그때, 내 감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하려면 지금……이겠지?”

이엘라는 손짓으로 그렘린과 저쪽 일행들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동의를 구했다.

확실히.

내가 정말로 빌런이었다면, 습격하기에 지금처럼 알맞은 상황이 없었다.

그 많던 그렘린들이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히어로들도 지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결국 이기는 것은 히어로 쪽일 테지만…… 우리가 끼어든다면 달랐다.

만약에 프로필상의 불사신선의 스펙을 가진 빌런 그리고 이엘라가 저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법한 상황.

앞에서 덮쳐오는 그렘린과 우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쩔까…… 형씨?”

이엘라는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여 봤다며, 변명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저 손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에휴, 씨발.

얘를 도대체 어떡해야 하나.

“그냥…… 가…… 이년아…….”

“그냥 가자고?”

눈에 띄게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너는 왜 빌런을 해 먹고 있는 거냐?

“가면…… 우리도…… 문제여……!”

“아, 그렇긴 하지. 형씨. 좋은 판단이야.”

내가 이엘라와 비슷한 스펙이라고 가정하면, 저 히어로들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엘라는 그것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덮어 놓고 긍정하는 것인지 모를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히어로들을 뒤로한 채, 다른 통로로 앞서나갔다.

그리고 대략 5분쯤 뒤에 그렘린들을 마주했다.

녀석들은 아까 봤던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키에에엑!

먼저 내게 달려드는 그렘린 한 마리.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저게 그렘린이 맞긴 한가?

본래 그렘린은 본신의 그 약함을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메우는 몬스터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본 히어로 파티처럼, 번갈아 가며 조직력 있게 싸우는 것이 무서운 놈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그렘린들의 모습에선 그를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무턱대고 물어뜯고 할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다.

츠칵!

나는 묵색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발도술(抜刀術).

이것은 일리아의 기억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일리아는 발도술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니까.

단지 나츠키가 행하던 것을 한 번 따라해 본 것에 불과했다.

일단 그녀가 수련과 연습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많이 봤으니까.

“우와, 형씨…… 개멋있어.”

하지만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그대로 공중에서 반 토막이 난 채 땅으로 처박히는 그렘린의 시체.

나는 검면을 움직여 뿌려지는 피까지 막아 내었다.

원래 몸처럼 피만 보면 기절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맞으면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이엘린은 질 수 없다는듯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녀의 능력은 ‘염력’과 ‘변화 마법’.

개중에서도 염력이라는 특성이 상당히 발달했다고 한다. 자기 얘기로는.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던전 바닥에 있는 돌들을 공중에 띄워 올린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렘린들을 향해 쏘아 내었다.

파바바바박!

꽤나 강한 위력.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돌덩이들을 얻어맞는 그렘린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끄으으으…….”

물론,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이엘린도 상당히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심각하게 갈등했다.

지금…… 죽여야 할까?

툭.

그리고 내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이엘린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설마 마력 다 쓴 거야?

뭔 조루도 아니고 무슨.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