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언냐야 지장 찍어여……
“그렘린들, 진짜 더럽게 세네. 이게 내가 알던 그렘린이 맞나…….”
“상태가 좀 이상하던데요? 애들이 무슨 발정난 개새끼처럼…….”
“말투 천박한 거 봐, 좀 가려 가면서 말해라.”
“그런데, 호출은 안 왔어요? 오늘 여기 메인이 빌런 하나 잡는 거라면서. 협회한테 협조 공문 들어왔다고.”
“안 왔어. 던전 들어가기 전에 시험용으로 오고 끝이야.”
“뒈진 거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정이 안 가 이 새끼는.”
그렘린들의 공격을 무사히 물리치고, 보스룸으로 향하는 길드 공략조.
그들은 협회의 연락을 받고, 지금껏 대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호출은 오지 않았고, 그에 의아함만이 더해지고 있었다.
“우린 정상적으로 공략이나 마치면 그만이야. 협회 요청이고 나발이고 우리 식구들 안 죽는 게 더 중요하지.”
“으엑, 멋있는 척하지 마요. 하나도 안 어울려.”
“……이 새끼만 빼고. 야, 얘 어디다가 갖다 버리고 와라.”
다만 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길드가 소유한 자산인 이곳 던전.
발할라의 집회에서 목표물로 삼지만 않았더라면, 정상적으로 클리어했을 곳이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보스룸으로 달려가는 조원들.
이윽고 마주 달려오는 조무래기들 몇몇을 정리하고, 보스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 시발 뭐야.”
“여기 이미 온 거 같은데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미 유혈이 낭자한 채로 찢겨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
그리고 열려 있는 보스룸의 문이었다.
“안에, 그 놈 있는 거 아니야? 왜 협회 소속 히어로 죽이고 자기 혼자 들어가서…….”
“그럼 빨리 들어가야지, 뭐 하고 있어? 아재, 빨리 들어가 봐요.”
“닥쳐 봐! 일단 상황 파악 좀 하고…….”
공략조의 대장이자, 경력이 가장 오래된 구양수.
그가 문 안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을 때였다.
순간 번쩍, 하고 빛나는 섬광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보이는 실루엣 하나.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웬 거대한 골렘같은 것이었다.
골렘? 골렘…….
설마 잡으려는 빌런이 저 놈인 건가?
“요즘엔…… 골렘들도 빌런 해 먹냐?”
“그게 무슨 씹소리요, 아재.”
구양수의 헛소리에 뒤에 남아 있는 조원들이 모두들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만히 까딱이며 문 안을 보라는 듯 몸짓했다.
그에 다른 사람들 또한 앞다투어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던전 보스가 사망했습니다!]
“어?”
“에엥?”
던전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눈 앞에 떠올랐다.
* * *
콰지지직!
오른손에 박아 넣은 25억짜리 충전형 마석이 위력을 발휘한다.
단단하게 조형된 갑주의 주먹이 거대 그렘린을 후려치자, 이내 녀석이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린다.
“븜!”
“……그게 뭐야.”
내장된 마력을 사출하며 내는 소리에, 유시아가 어이없어했다.
상당히 힘 빠지는 소리기는 하지.
하지만 그 소리와는 아주 다른 결과가 펼쳐졌다.
양손의 손바닥에서 사출된 광속성의 마탄 두 개가 그렘린의 육체를 그대로 찢어발긴다.
그와 함께 주변에 퍼지는 거대한 섬광!
유시아는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끼에에에엑!
그렘린 또한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렀고.
몸의 내구력이 모두 떨어진 녀석은 걸레짝이 된 채로 절명해 버렸다.
“호에에에에…….”
이제, 다 된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갑주의 성능을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나 모른다고 미리 아공간 배낭에 챙겨 온 것이 주효했다.
테스트하기엔 딱 적합한 상대였던 것 같다.
“옵바, 언냐야들이 숨어 있는 고애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원래 이곳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길드원들.
저들에게는 조금은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보상을 가로채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협회에서 임무상 발생한 일이니 배상을 해 주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유시아가 불쌍한 건가? 협회 입장에서는 유시아가 그냥 임무를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테니.
“언냐야, 바로 나가는 고애오.”
“어, 잠깐만, 나 눈이 안 보여…….”
더듬더듬, 이곳저곳을 손으로 드문드문 짚으며 내 목소리를 찾는 그녀.
나는 한 차례 한 숨을 내쉬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꺄악!”
그러고는 보스룸에 생긴 워프 포탈을 이용해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길드원들이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야! 이 자식아!”
“닥쳐 봐! 저거 돌아오면 우리 다 죽어!”
물론 돌아간다고 내가 저들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내린 것 같았다.
우욱.
이어 뇌가 진탕되고,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그 역겨운 감각이 느껴졌다. 워프 포탈을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구토는 하지 않았다.
탑승한 갑주 안에다가 구토를 해 버리면…… 마법으로도 청소하기가 곤란했다. 일단 스며들어 버리면 답이 없었으니까.
우에에에엑…….
이 씨발.
우측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만약에 이게 갑주가 아니라, 내 진짜 몸이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오른쪽 다리가 아주 뜨끈해졌을 것이다.
“븝미쟝, 내리는 고애오…….”
촤르르르륵.
내 말에 따라, 순간 각각의 부품으로 변하며 회수되는 파츠들.
나는 우측 다리 파츠를 마력을 이용해 청소했다.
……저거 나중에 냄새 안 나려나 모르겠네.
“눈이…… 안 보여요…….”
워프 포탈의 충격과 던전 내부에서 직빵으로 마주한 섬광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유시아.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나 씨.”
태양여명단.
그곳의 교황으로부터는 성흔을 받지 못했지만, 어쨌건 추기경이라는 작자가 얼마 전에 와서 대신 성흔을 새겨 주고 갔다.
실상 추기경들이나, 교황이나 그 성력의 차이는 별반 다름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냥 순순히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성흔에 새겨진 성력의 일부와 마법을 섞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큰 효능을 보기에는 그 성력이 너무나 적지만…… 이럴 때 쓰기에는 충분히 유용하다.
이마에 성력과 마력을 섞어 흘려보내자, 마치 사제들의 큐어와 비슷한 효과가 발휘된다.
웬만한 수준의 상태 이상은 즉시 회복시킬 수 있는 양의 마력.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시아가 의식을 되찾는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지면을 팔꿈치로 딛고 일어선다.
마치 방금 단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해롱거리던 유시아는 이내 내 얼굴을 바라봤다.
“히익!”
“……언냐야?”
그녀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쳤다.
이런 반응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 겪어 보는데.
단지 이 몸이 아니라 현대에서도 이런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어, 아…… 빠져나왔구나……요?”
내 싸늘한 반응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하게 말하는 그녀.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반존대에 정신이 어질했다.
내가 이 사람을 진짜로 믿을 수 있을까.
던전에서 한 차례 푸닥거리 이후에, 정체를 밝힌 나는 유시아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그것은 바로 ‘불사신선’이 곧 나라는 걸 비밀로 해 달라는 것.
당연하지만 유시아는 그것을 의아해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리 협회 협조나 받으면 되는데……요?’
어차피 히어로면서 발할라의 집회 내부에서 활동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냥 협회의 원조나 받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언뜻 좋은 의견 같아 보였지만…… 그쪽 실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어 보였다.
내가 왜 협회 눈치 봐 가면서 움직여야 하는데.
거기에다가 내 비밀이 더 이상 밝혀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유시아한테야 그녀가 그나마 히어로 판타지 내에서 믿을 만한 등장 인물 중 한 명이고, 오해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내 주변 측근들한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을 협회 놈들에게 까발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여, 나왔어여, 언냐야.”
“그러면 보스룸 보상도 받았어……요?”
“받은 고애오. 그런데 언냐야.”
“네?”
“그거…… 요는 왜 하는 고애오?”
“아, 말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존대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슬슬 눈을 굴리며 내 시선을 피하는 유시아.
아무래도 던전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도 진짜로 죽이려고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니…….
정신계 능력자인 유시아의 경우에는 그 살기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는 고애오, 언냐야!”
“어, 어…… 그래……요.”
텁, 하고 자기 입을 틀어막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기억이 뼛속까지 각인된 것 같았다.
뭐 어쨌든, 그건 개인 사정이고.
나한테는 나쁠 일이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무서워서라도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물론,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냐야.”
“네?”
“집 가서 라면 먹을래여?”
“라면……?”
그녀는 갑자기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이 대사가 나온 영화가 개봉을 안 했겠구나.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던전 근처에 숨겨 둔 지팡이를 호출했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지팡이.
나는 거기에 타고는 뒷자리를 가리켰다.
“언냐야, 타는 고애오.”
이러니까 무슨 90년대 야타족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느낌은 전혀 다르지만…….
유시아는 조심스럽게 지팡이 뒤에 탔고, 나는 그대로 패스파인더 길드 건물로 향했다.
* * *
호로록.
뜨끈하고 구불구불한 면발이 속을 녹여 주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냉기를 막고 다닌다고 해도, 한겨울인데다 몸이 워낙 약한지라 추위에 너무나도 약했다.
그런 와중에 먹는 따뜻한 라면 한 그릇, 아무리 식탐이 없는 나라도 충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맛있냐?”
“녜헤, 업바야…… 우물…….”
그런 나를 도끼눈을 뜬 채 째려보는 강훈.
마침 길드 건물에 혼자 하릴없이 남아 있기에, 라면 좀 끌여 달라고 했더니 10분째 계속 저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요리사로 고용된 것도 아니고 맨날 너나 나츠키 걔나…… 최근에는 위층 동생까지 나한테 심부름시키더라. 너희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거야…… 어…….”
……그런 일이 있었나.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함이 올라왔으나,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그냥 웃어 주었다.
“바주는 고애오…… 미아내오…….”
“하아, 후우우우…….”
뭐라고 더 말하고는 싶은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침울한 표정으로 그저 돌아서는 강훈.
유시아는 그 모습에 슬쩍슬쩍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냐야, 모 해여. 빨리 먹어여.”
“먹을 수 있게 해 줘야 먹지……요?”
그녀는 양 손목을 슬쩍 들어 보였다.
차르륵, 그녀의 양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마력으로 이뤄진 사슬이 소리를 내었다.
“요기 지장 찍으면 풀어 줄게여…….”
“아니, 이거 백지 마력 계약서잖아……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유시아.
나는 최대한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채로 말했다.
“그래서여?”
“…….”
유시아는 결국 20여 분간의 실랑이 끝에, 퉁퉁 불어 버린 라면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