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너모 아파여……
온몸이 축축하다.
어디 목욕을 했다거나 한 게 아니고, 식은땀으로 온 몸이 젖어 버린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달큰한 과일 향이 풍겨 오는 것이 참 이질적이었다.
“하으으…….”
6월 중순, 한기가 돌 만한 날씨는 전혀 아님에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가야……?”
정신을 잃기 전 들렸던 정령들의 목소리를 떠올려 내곤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역소환된 건지 정령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윽…….”
기혈이 반쯤 뒤틀려 있는 상태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몸 안 쪽의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건 내 연약한 몸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잠깐, 잠깐만여…….”
입가에 선혈이 주륵, 흐른다.
찝찔한 철분의 맛이 혀 끝을 타고오른다.
옷소매로 슬쩍 훔쳐 내며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이걸 확인하는 순간 또 기절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리아, 일리아는 언제 돌아올까.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를 기다렸다.
벌써 시간이 지나 방 안이 어둑어둑해졌지만, 불을 켜러 갈 힘도 없었다.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다. 이성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흐윽.”
눈물이 양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한편 일리아는 검술 교관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검선으로부터 몇 차례 지도를 받은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그 실력.
그것은 교관 또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동일한 신체 능력 제한을 건 채로 대련을 하니, 교관도 쉽사리 이길 수가 없었다.
물론 경지의 차이라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가 밀리기 시작했다.
“……정말 많이 늘었군.”
“그렇죠?”
씨익 웃으며 물어보는 일리아의 모습에 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일리아는 이전에도 생도로서 거의 최상의 모습을 보여 줬었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수많은 연습을 통해 갈고닦은 그 기본기.
그것은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 대해서 압도적인 격차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일리아는 너무나 쉽게 지고 말았다.
자신만의 절초 내지는 기교라는 것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으니까.
너무나 정직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을 검선이 채워 주었다.
교관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었다.
아, 누군가에게 지도를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누구한테 배운 거야?”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적어도 방금 일리아가 보여 준 무위는 일반적인 지도로서는 단기간에 발전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적어도…… 그 스승이 교관 자신보다는 더 뛰어나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검으로서 히어로 사회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으니.
후보를 좁히자면 몇 나오지 않았다.
“어……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셔서요.”
“……뭐, 그랬겠지.”
일리아는 물론 대답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검선이 현재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교관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럴 만하다고 이해해 줬다.
“아무튼, 제자의 실력이 늘어나니 기분이 좋구나. 그게…… 비단 내 가르침 때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아니, 교관님 덕분이죠.”
“입에 발린 소리는 안 해도 돼. 이 녀석아.”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찡그리면서도, 그 어투에서는 옅은 기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일정은 다 끝난 거지?”
“네…… 아마도.”
“끝났으면 끝난 거지 아마도는 무슨 소리야? 수업 다 끝났잖아, 오늘.”
“어, 보충……받으러 오라고 하실 수도 있어서. 제가 이론은 좀 약하잖아요.”
헤헤, 하고 머쓱하다는듯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일리아를 보며 교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 특유의 그 ‘정직함’에는 저 나쁜 머리도 분명 한몫했으리라…….
“……아무튼 가 봐. 수고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일리아는 그렇게 검술 교관과 대련을 마치고, 곧바로 숙소 건물을 향해 총총거리며 뛰어갔다.
돌아가면 다나가 기다리고 있겠지.
요새 뭐가 그리 바쁜지, 같이 있던적이 많이 없었던지라 더 보고 싶었다.
층계를 뛰어가 곧바로 2학년, 랭킹 1위의 것으로 배정된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스윽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나?”
평소완 다르게 불이 꺼져 있는 방 안.
혹시 잠이라도 자나 싶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대신 코끝에 은은하게 과일 향기가 풍겨 올라왔다.
그것은 상당히 익숙한 냄새였다.
“뭐야……?”
무슨 방 안에서 운동이라도 하나?
땀 냄새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나, 분명히 땀 냄새가 맞는 그것에 코를 킁킁거렸다.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어 다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래? 아니, 뭐야?”
마치 잠자듯,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당황하며 다가가 다나의 맥을 짚었고,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얘가 사람 놀라게 하네.”
맥박은 너무나 안정적이었다.
물론 상당히 미약하기는 했으나, 원래 애들 수준으로밖에 짚어지지 않았으니 멀쩡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기절을 한 것 같은데…… 그 자세한 이유는 알기 어려웠다.
워낙에 기절을 자주 했어야지.
일리아는 이내 다나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사뿐히 침대 위에 내려놨다.
무슨 수수깡 다발을 드는것도 아니고, 얘는 뼛속도 비어 있나?
지나치게 가벼운 그 무게에 되레 일리아가 당황했다.
“헤응…… 헤으응…….”
“아, 씨. 깜짝이야.”
잠결에 앓는 소리에, 깨어난 줄 알고 순간 몸을 떨었다.
뭐,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매번 그때마다 가슴을 졸이던 버릇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자면서도 식은땀을 흘리는 다나의 모습에, 일리아는 수건을 적셔 왔다.
그러고는 팔과 다리부터 몸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얘는, 왜 이렇게 말랐어.
평소에 보면 양은 적긴 해도, 꾸준히 입에 뭔가를 넣고 다니던데.
살이 안 찌는 것을 넘어서 삐쩍 말라 있는 몸에 의문까지 들었다.
물론 그에 안쓰럽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명백히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대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후우.”
간병이라는 건 되게 힘든 일이구나.
새삼 일리아는 그것을 깨달았다.
몸이야 힘들 리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고되었다.
……진짜로, 한 치의 과장 없이.
힘을 조금만 세게 줘도 이 연약한 몸은 으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일상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힘 조절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깨에 긴장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호에……에.”
“어, 깼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끙끙 앓고만 있는 모습에 지쳐 가던 무렵.
드디어 다나가 눈을 떴다.
“언냐야……?”
“어, 그래. 나야.”
“지금 몇 시에여?”
“지금……? 7시 반.”
별생각 없이 말한 그 시간에, 다나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녀가 입에서 낸 말은 일리아로선 의아한 것이었다.
“그러면 안 대는데…… 지금은 허가 못 받겠져?”
“무슨 허가?”
“바깥으로 나가야 하거든여. 지금.”
차게 식은 그 표정 그리고 무언가 결연한 어투.
겉으로만 보자면 마냥 귀엽기만 한 모습이었지만, 일리아는 웃을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껏 다나가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 * *
엘프들의 마을.
그곳의 중앙 제단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자세한 내막이야 대부분의 엘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건 흉물을 장로들이 의식을 통해 봉인하려 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주축은 장로들이었지만, 일부 마법에 능통한 엘프들까지 동원되어 그 의식을 돕는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어지러운 형태의 무늬로 배합되어 있는 작은 알 하나.
그 주변에는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단지 이 알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준비하게.”
한 장로의 나지막한 말에 다른 엘프들 전부가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전부 알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의 이들은 이대로 끝이겠구나, 하고 생각할 법한 광경.
실제로 엘프들 중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략 1분 정도가 지난 이후에는 다들 생각을 바꿨다.
저 알이, 보통 물건이 아니긴 한 것 같다는 쪽으로.
“허억…… 허억…….”
개중 제일 마력이 부족한 엘프 하나가,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마력 폭주가 오기 이전까지, 마지막 한 방울을 모두 짜낸 탓이었다.
더 이상 행했다간 십중팔구로 마력 폭주가 올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어 다른 엘프들 또한 하나둘씩 포기했다.
저 작은 알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그러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동시에 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은 몸을 떨었다.
단지 부화하기 이전의 알의 상태인데도 이러하다면…… 만약에 정말 부화하여 강림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힘들 가지게 되는 것일까?
어느새 처음 시작했던 20명 중 절반 이상이 나가떨어졌다.
장로들 중에서도 그 힘이 뛰어난 이들 여섯 명과, 붉은 머리의 엘프 렐만이 남아있었다.
슬슬 버거워하는 장로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피부는 그저 뽀송뽀송했다.
마치 이 짓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처럼.
“흐응…… 안 되겠는데?”
하지만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성과가 영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에.
턱.
모야?
렐은 그에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던 바람의 정령을 손으로 잡아 쥐었다.
녀석은 곧바로 그에 도망가려고 했으나, 어째선지 빠져나갈 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천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어봤다.
렐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잔잔한 미소를 띄우면서, 정령에게 속삭였다.
“미안한데, 여기서부턴 네가 보면 안 되는 거라서.”
의미심장한 말을 지껄인 렐은, 곧바로 마력을 기존보다 더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그마한 정령에게 모두 옮겨 내었다.
끄으으으…… 에헤?
정령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양의 마력.
그것과 반대되는 음의 마력이 들어오자, 정령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렐은 그를 끊어 내지 않고 지속시켰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역소환을 당했다.
“좀 아프겠네.”
그것은, 정령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령을 소환한 주체…… 그러니까 다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적인 역소환을 당하면 술자에게 모든 반동에 전가되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안타깝네.
태평한 어투로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곧바로, 마법진을 향해 퍼붓던 마력의 양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그 마력은 너무나도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