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들이 사막 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일견 의아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나 또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단순히 편견이 아닌, 지금까지 봐온 엘프들의 모습 또한 풀과 나무와 동물들과 공존하는…… 이미지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조우한 엘프들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분명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합니다. 다만 저희는 황폐화된 이곳조차 자연이라고 생각함이 다른 것이겠죠.”
돌과 모래밖에 없는 이 사막.
초목과 오아시스를 찾으려 한다면 수 시간씩 황야를 헤메야 하는 이 지역 또한 자연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엘프들이 그렇다는데야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무튼 생각이야 그렇다 치고, 이곳 부족은 상당히 상황이 열악했다.
적어도 족장이나 장로 정도는 다들 괜찮은 생활 수준을 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거지 소굴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머물러도 괜찮다는 그들의 호의 또한 이제는 ‘어디 오래 있을 테면 있어 봐라’ 하는 어투로 다가왔다.
“벌써 가시다니…… 조금 더 쉬셔도 괜찮을 텐데요.”
“괜차는 고애오!”
그렇기에 나는 딱 4시간만 머물다가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카르마디아에 대한 질문 몇 가지와 그 예의 악마…… 추정하기로는 교만의 마왕인 그 녀석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얻은 후였다.
“……정 그러시다면 이것들이라도 가져가시죠.”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예의 그 장로가 자루 하나를 챙겨 준다.
안에는 말린 나무 열매와 육포 그리고 수통 두어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 내가 봤을 땐 이것들도 상당한 부담을 떠안고 내게 제공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고 딱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줄 때 넙죽넙죽 받아야지.
“고마운 고애오…….”
망설임 없이 자루를 받아드는 내 모습에, 쳇,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또 역시나 그 싸가지 없는 엘프 소년이었다.
저기여어……
그에 내가 무어라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였다.
따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소년의 머리가 푹 하고 숙여진다.
아무래도 녀석의 아버지, 그러니까 족장이 대강 눈치를 채고 머리에 꿀밤을 박아 넣은 모양이었다.
……저래 버리면 뭐 내가 끼어들기도 뭐하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는 소년을 향해 혀를 슬쩍 내밀어 주자, 정말이지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약 오르면 더 해 보시던가.
나는 그대로 자루를 지팡이에 매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녀석아, 도대체가 너는 생명의 은인한테까지……!”
바람결에 흘러오는 엘프 소년이 달달 볶이는 소리가, 귀에 달콤하게 느껴졌다.
* * *
북서쪽으로 대략 나흘 정도.
걸어간다는 기준으로 그 정도 거리를 걸으면 카르마디아에서 가장 번성한 제국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내가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을 물어보자 나온 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사막의 엘프들은 제국을 상당히 꺼리는 모양이었다.
“종족 차별주의가 팽배한 곳이지요. 아마 은인께서도 그곳에 간다면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능력 있는 자라도 2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곳이니까요.”
지성이 있는 종족으로서 인정하는 이들 중, 가장 열등한 취급을 받는 것이 인간이라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종족들이 지구로 이주했던 초기에 보인 태도가 왜 그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가장 열등한 족속들만 잔뜩인 행성에서 자신들을 차별하니 어이가 없었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구에서는 인간들이 열등한 족속들이 아닌 최상위의 포식자 내지는 지배자인데.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 왕창 깨져서 구석에 박혀 사는 것이 현재의 상황인 것이었다.
“혹시 옵바 언냐야들 거기 있슬까여…….”
멸망하기 이전의 카르마디아라면 엘프들이 살기에는 더 나은 곳일 수도 있었다.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최상위 계급의 지배 종족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었으니.
거의 왕자와 거지 이야기의 신분 상승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곳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카르마디아는 재앙들의 등장으로 박살이 났다.
이주하지 않고 남은 이들끼리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완벽하게 복구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자신들의 행성과 멸망을 함께했는지…….
어느 쪽이건 이상하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에 이주해 온 이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세 번째일 가능성이 꽤나 높아 보였다.
“나쁜 앙마…… 아니 마왕이네여…….”
칠죄종에 해당하는 마왕 중 교만은 이런 식의 행동에 상당히 능숙했다.
상대방에게 거짓된 환상을 보여 줌으로써 기만하고, 절망으로 빠뜨리는 수법.
그 본신의 무력이야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까다로운 마왕 중 하나였다.
그나마 일전의 그 가짜 교황…… 그러니까 시기의 마왕이 선녀지.
“호에에에, 보이는 고애오.”
저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성벽.
엘프들은 나흘간 쉬지 않고 걸어야 겨우 도착한다고 했지만, 지팡이를 타고 오니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걸어서 나흘이라는 거리도 그리 먼 것이 아니기도 하고.
사막 지역에 위치한 제국의 도시 중 하나.
‘캐를라인’이 바로 이곳의 이름이었다.
“지팡이 씨, 내려가는 고애오…….”
나는 지팡이의 고도를 점차 낮추다가 지면에 두 발을 디뎠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정찰하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저렇게 망루 밖으로 나와서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교만의 마왕 때문인지 아니면 이 환상세계 속에서 어떤 분란이 일어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어느 쪽이 되었건 내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은 확실했지만.
나는 푹푹 파고드는 모랫바닥의 감촉에 인상을 찡그렸다.
“헤으으…….”
뜨거운 지열이 훅 올라옴에 반사적으로 마력을 사용했다.
일전에야 마력이 떨어진 상태라지만 지금은 풀 컨디션.
이 정도 마력 사용은 별것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타고 갔더라면 곧바로 도착했을 거리를 20여 분간 걸어서야 성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사들 또한 나를 확인했는지 멀리서 소리를 질렀다.
“신원을 밝혀라, 인간!”
‘인간’이라는 부분에서 멸시를 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그걸 제외하고도 그다지 곱지는 않은 말투였다.
“하와와, 애기븝미쟝이애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답변하지 않으면 곧바로 사살하겠다!”
“……제국 마탑 외부마븝사에여!”
뭔 시발 석궁을 들이밀길래 급하게 말을 고쳤다.
저거,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바로 쏴 버렸다. 진짜로.
내 대답 이후 병사들이 수군거리더니 이내 성문이 열린다.
그리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완전무장한 이들이 맞이했다.
“제국 마탑이라고 했나? 증명할 만한 징표를 보여라.”
개중 한 놈이 내게 손을 내밀며 명령조로 말을 했다.
그 모습에 진짜 인간들 취급이 개판이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건 수인…… 그중에서도 묘족 같았는데 지구에서는 가장 멸시당하는 이종족 중 하나였다.
실제로 이쪽에서도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닌 종족.
하지만 ‘제국 외부마법사’와 ‘병사’ 간의 신분 차이가 있음에도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여깄서여…….”
“흐음…….”
나는 미리 엘프들에게서 받아 온 패를 보였다.
정말 이따금, 도시로 들어가야 할 일이 있으면 사용하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엘프들은 모두 기본적인 수준의 마법은 자연스럽게 깨우치기에, 마탑에서 증표를 받는 것도 쉽다나.
이쪽에서 엘프가 최상위 계급의 종족인 이유가 여기 있었다.
“……틀림없군, 통과!”
패에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그는 내게 그것을 돌려주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며 몰래 놈에게 중지를 세워 보였다.
“나쁜 손 안 대!”
물론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 * *
나는 마을 내에서 대략 3시간 정도 동안 엘프들에 대해 수소문했다.
카르마디아의 엘프들과 내가 알고 있는 엘프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으니 분명 이곳에 나타났다면 티가 확 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한 엘프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되레 3등 시민으로서의 불쾌한 일들만 잔뜩 겪었을 뿐이었다.
“나쁜, 나쁜 옵바 언냐야들이애오…….”
자연스럽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단순한 불친절을 넘어 혐오의 시선들.
그것은 도시 내의 인간들이 어떠한 처지인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개중 단 한 명도 상위 계급에 속하지 않았고, 대부분은 빈민가 깡패들 내지는 하류 노동자…… 그리고 뒷골목 화류계에 속해 있는 이들이었다.
“인간 주제에 웬…… 쯥.”
그렇기에 깔끔한 차림에, 지팡이까지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을 아니꼬워하는 이들 사이에는 같은 인간들도 섞여 있었다.
그 시선들이 무슨 매국노라도 보는 듯해서 상당히 거북했다.
얼마간 헤맨 끝에 나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머리를 싸매었다.
“하유으, 그럼 어쩔까여…….”
당장 큰 도시만 하나 찾으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명확한 목표도 사라진 바에야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허탈감에 거리를 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무렵.
“몬스터! 몬스터들의 침공이다!”
“호에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 *
캐를라인은 최근 부쩍 늘어난 몬스터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불분명하나, 대략 한 달여 전쯤부터 지속되어 온 현상이었다.
본래 활동적이지 않은 사막 몬스터들의 특성상 집단 침공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빈도가 수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타지역에 출몰하는 몬스터들보다 강한 사막의 몬스터들.
놈들이 재차 공격을 해 와서 제국으로부터 보호받는 도시라고는 해도, 쉬이 버텨 내기가 힘들었다.
거기에 캐를라인은 상당히 변방에 위치한 곳.
이곳까지 오려는 마법사들이 상당히 드문지라, 병사들은 위험한 싸움을 매일 같이 이어 나가야만 했다.
“마법사들은…… 겨우 넷인가?”
“그 이상 병력 충원이 오질 않습니다. 오늘 오신 분께서도 거의 반강제로 오셨다는데…… 다들 사지로 가는 것은 싫다고 하는 모양이더군요.”
“개새끼들, 비호란 비호는 다 받으면서 궂은일은 하기 싫다는 거군?”
침을 탁 뱉은 경비대장은, 이어 제국군을 모두 집결시켰다.
그리고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과연…… 될까?’
오늘따라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가 많은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큰 사상자 없이 잘 막아냈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상황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전력에 손실이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예감이 그의 머릿속에 엄습했다.
“하와와와와!”
그때였다, 그의 심각한 표정이 풀린 것은.
“……저거 누구야!”
어느샌가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고고히 서 있는 한 명의 인간 소녀.
경비대장은 그녀를 보며 얼굴을 와락 하고 구겼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이 없다는 듯 뻔뻔스럽게 외치며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븝하!”
점점 거대해지는 마력에 때라, 경비대장의 동공도 확장이 되었다.
이윽고 그 마력은 한 덩이의 화염구가 되어, 작열하는 대지에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