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온다 할 때 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신하연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일리아가 아직 불편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있었던 일들을 피해자임에도 다 잊은 쪽과 잊지 못한 가해자 사이의 대화였다.
본래 패스파인더 소속 길드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신하연과 1학년 생도들은 빠지기로 했었다.
1학년 생도들은 아직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신하연은 이미 시일이 지난 지 오래된 일인데 신경 써 봐야 의미 없다는 이유였다.
“아닌 척하더니…… 좀 솔직해져라.”
“그냥 생각이 바뀐 거거든!”
“왜 나한테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이년은……?”
나츠키는 귀를 막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신하연을 쳐다봤다.
그녀는 신하연과 일리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아, 아무튼…… 여기 지나갈 방법 나한테 있어.”
“방법이 있다고?”
“그래, 있어. 아마 조금 뒤면 알아서 비켜 주실 거야.”
“뭐……?”
얼핏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다들 어이없어했다.
개중에서도 나츠키는 콧방귀까지 뀌며 무시했다.
“내가 얼마나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꼼짝 안 하던 사람들이…….”
조금 전에 협회 소속 히어로와 푸닥거리를 해 댄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꼬장꼬장한 사람들을 무슨 수로 비키게 하겠다는 건지…….
“들어가세요.”
“뭐……?”
하지만 단 10분 뒤.
일행은 모두 바리케이드를 뚫고 엘프들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츠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나머지 이들도 놀라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했냐는 뜻으로 신하연을 쳐다봤고.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과거에 많이 보여 줬던 그 재수 없는(나츠키의 표현에 따르자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아빠한테 부탁 좀 했지. 우리 길드장이 거기서 사라졌으니까 협회장한테 말 좀 해 달라고.”
“그게…… 말이 돼?”
“당연하지.”
우훗, 하고 느끼한 미소를 흘리는 신하연.
나츠키는 난데없는 패배감에 찌든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련.”
* * *
“아, 그래서 왔군여.”
내가, 불렀구나.
그것도 까먹고 있었네.
나는 패스파인더 길드원들과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왜 내게 분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까먹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엘프들의 마을로 불렀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그 혹시나 모를 사태가 지금과 같은 것일 줄은 몰랐지만…….
이들은 지금 이곳 북방지역에 떨어진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있던 시간과 비교해 봤을 때, 아무래도 외부의 시간보다 이쪽이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거의 만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는 동안 바깥에서는 1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다는 소리니까.
“하와와와…….”
그게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이곳 밖으로 나갔을 때 시간이 많이 흘러있지는 않을 거란 소리니까.
시간 흐름이 만약 반대였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환상 속에서 빠져나가니 세상이 아포칼립스로 변해 있었다, 하는 그런…… 경우의 수도 있었으니까.
“그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여…….”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악룡의 알과 관련해서도 대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들인지라, 설명하기가 굉장히 수월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놀라움을 표현하던 그들은, 나를 무언가 경외하듯 쳐다보기에 이르렀다.
“아니, 그러면 진작에 도와 달라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하면 되잖아.”
나를 무슨 정의의 사도 보듯이 하는 그 태도가 조금 거북스럽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렇게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행보들로만 보자면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해명하자면 너무 길고…… 내 본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기에 그만두었다.
그냥 오해하라지, 시발.
“아무튼, 그래서 언냐 옵바야 들이 도와줘야 하는 고애오.”
“정확히 뭘 도와줘야 하는데? 우리도 할 게 없어서…… 여기서 몬스터나 잡고 있었는데.”
“그건…… 저도 잘 몰라여.”
머쓱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내 모습에, 다들 어이없어했다.
지금껏 한 얘기는 뭐였냐는 듯한 표정에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당장 해야 하는 것은 알 수 없었으나, 최종적으로 해야 하는 것과 그것을 찾기 위한 방안은 대략적으로 계획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말하기 전에, 일이 일어났다.
덜컹!
“으왓……?!”
순간 작긴 해도, 외부에서 봤을 때 꽤나 견고해 보이던 건물.
그 외벽에서 큰 진동이 울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돼지와 인간의 발음이 반 정도 섞인 것 같은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적이다!”
그리고 그 외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패스파인더 길드원 전원이 무기를 쥐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 해여……?”
아니,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익숙해?
그러자 그들은 모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더니, 하나같이 어색해했다.
개중 강혜원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몬스터를 잡았다고 했잖아. 그게…… 좀 많이 잡아 버려서 말이지.”
그녀는 주섬주섬, 옷 안자락을 만지더니 이내 무언가를 꺼내었다.
무슨 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작은 징표.
그것은, 내가 이쪽으로 오면서 패스파인더 길드원이 아닌 이곳 주민들에게서 본 징표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 경비단원이 됐거든…… 난 대장이고.”
“뭐라구여……?”
* * *
트롤든.
일견 오크와 착각할 수도 있으나, 확실하게 인간을 비롯한 타 종족들과 동등하거나 되려 그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종족으로 취급되는 이들.
그들은 히어로 판타지의 싱글 스토리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처음 나오는 것은 멀티플레이 스테이지에서인데…… 어째선지 인간과 드워프를 제외한 타 종족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진다.
그것을 이해시켜 주는 스토리가 없었던지라, 다들 그 특유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았나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는데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대륙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제국.
그곳의 상류층인 드래고니안, 엘프. 그리고 수인들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이다.
단지 몬스터와 외모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등하다고 취급됨에도 버텨 오던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에 반발할 만한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 북쪽 변방으로 그대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단다.
이 대목에서 파면 팔수록 제국이라는 곳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정말. 나쁜 옵바 언냐야 들이네여!”
나는 분개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그것은 단지 이곳 트롤든 종족에 대한 안쓰러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북방 몬스터들을 처치하느라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춥다구여!”
마력을 끌어올려, 화염구를 수차례 쏘아 낸다.
그에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몬스터 예티들.
하지만 녀석들은 그럼에도 끝도 없이 지치지 않고 몰려왔다.
시발, 원래라면 한 방에 나자빠지는 걸 넘어 그대로 죽었어야 했을 텐데.
이놈들은 이 북방에서 불어오는 마나가 담긴 칼바람을 긍정적으로 이용했다.
콰지지직!
물론, 다행히 이곳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트롤든 전사들을 포함해, 패스파인더 길드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전투 광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호에에…….”
늘었잖아?
몬스터만 주야장천 잡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는지, 길드원들의 전투 스킬이 눈에 띄게 늘어있었다.
전방에 트롤든 부족에서 준 방패로, 몬스터들의 머리를 찍고 있는 강훈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그렇게 자랑하던 그 러시아 장군의 유물급 방패.
그것을 들었을 때보다 되레 더 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현실로 돌아가서 그 무기발까지 더해진다면…… 정말 수십 수백 계단 위로 히어로 순위가 상승하지 않을까.
“죽어! 이 새끼들아! 흐하하하!”
“호에에! 안 대여!”
잠시간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순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피 맛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는지 부러 잔인하게 몬스터들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루틴이 생기는 히어로들이 있기도 하니,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적절치 않다.
아가야는 자닌한 거 못 보는 고…….
알았어, 씨발아.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치워 버리고, 지팡이를 들었다.
“이게 나을 것 같네여…….”
원래 저 예티들한테는 화속성 마법이 제격이지만, 칼바람 때문에 위력이 자꾸 반감이 된다.
그러니, 그냥 순수한 물리력으로 후려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저놈들은…… 화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의 마력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미친놈들이니까.
“마나 씨!”
마력을 거대한 덩어리 형태로 뽑아낸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조형해 나간다.
굳이, 세밀하게 조형할 필요는 없었기에 대충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대로 주물렀는데…… 자연히 사람의 주먹 모양이 나왔다.
“븝빵 맞는 고애오!”
나는 그 주먹들을 하나하나 예티들에게로 날렸다.
하나는 턱으로, 다른 하나는 늑골 부근으로.
그 몸집이 큰지라 정확한 급소는 알 수가 없었지만, 대충 날리니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급소에 맞는 느낌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연달아 쓰러지는 예티들.
그에 트롤든 전사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쏟아진다.
그 시선이…… 마치 ‘새로운 경비대원이 등장했구나!’ 하는 느낌이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곧 길드원들과 함께 떠나야 할 곳이었다.
쉽게 놓아주려 하지는 않겠지만…… 이쪽에서 오래간 지낼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엘프들을 빨리 만나야 했으니까.
서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예티가 뱃가죽을 벌리며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트롤든 전사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아!”
“우스! 우스! 우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니 왜 이들이 오크 소리를 듣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야만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그 포효에, 나는 슬쩍 고막에 마력을 씌웠다.
이러다 귀가 먹을 것 같았으니까.
“다나아.”
“아, 언냐야, 잠깐만여!”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길드원 한 명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무언가 서운하다는 듯이 경직된 그녀에게 나는 마법을 사용했다.
클린, 청소 마법.
그것이 그녀의 몸에 뒤덮인 피를 깔끔하게 씻겨 주었다.
“아니…… 나 더럽다고…….”
굉장히 상처받은 듯이 울먹거리는 그 길드원에게, 나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딱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 내가 피를 보면 기절하는데요……
그런 변명을 하기도 이젠 지쳤다.
이 빌어먹을 몸.
븝미쟝이 머가 어때서여…….
닥쳐,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