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기다려여!
어릴 적, 어떤 영화 하나를 봤다.
본래 그 나이에 봐서 안 되는 영화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때 봤던 영화는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였다.
“이거…… 이건 말도 안 되는데?”
“호에에.”
그 영화가 보여 준 것은 도박꾼들의 희로애락.
한 번의 배팅과 패에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서 드러나는 감정이란 대부분 분노 내지는 슬픔이었다.
“하아…….”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있는 모습 또한 같았다.
망연자실하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이들.
그들은 내가 낀 테이블에서 도박을 한 사람들이었다.
원래도 그 후드를 쓴 녀석에게 돈을 꽤나 잃고 있던 모양이지만, 내가 끼고 난 후에는 그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거, 아가씨. 운도 좋구만.”
쯧, 하고 혀를 차며 나를 바라보는 남자.
데이브라는 이름의 그 중년남이었다.
처음에는 봐주면서 하겠다며 웃음을 짓던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를 영 마뜩잖게 쳐다보게 되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벌써 그가 이 테이블에서 날려 먹은 돈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소 한 마리 값은 족히 될 것이었다.
아무래도 말이나 입고 있는 복식을 봤을 때, 꽤나 부유한 걸로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없는 사람 상대로 털어먹는 건 아무래도 좀 마음이 그렇다.
“이건 사기요! 아니, 말이 됩니까 성님?”
“……억지 부리지 말아. 그게 안 된다는 건 이 아가씨보다 우리가 더 잘 알잖나.”
“그렇지만 이상하잖수. 어떻게 매 판 이기는 패만 나올 수 있냔 말이요?”
흥분해서 사투리 억양이 강해지는 테이블의 남성.
그의 말대로, 나는 모든 판에서 ‘이기는 패’만을 뽑았다.
조금 전에도 10, 7 플러시를 A, K 플러시로 잡았고.
잃기 힘든 패에서 크게 잃고 난 후, 저렇게 분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필시 야로가 있는 거요. 야로가…….”
중얼거리던 남자는 영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는지, 입맛을 다시며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미 돈이 다 떨어진 마당에 게임을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이 있긴 하지만…… 나도 이쯤 빠지지.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듯하니.”
데이브 또한 옆의 남자와 함께 슬쩍 뒤로 빠졌다.
숨을 몰아쉬며 잃은 돈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그와는 다르게, 상당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돈보다는 내게 더 관심이 있는 듯한 눈길.
적어도 그 눈길에서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후드를 쓴 남자에게 집중했다.
그는 돈을 잃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잃기는 했지만 매 판 빠르게 죽었다.
마치 내가 이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혹시 내 패를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의심 또한 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직 손에 좋은 패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도 가차 없이 죽었으니까.
애초에 내 기감을 속일 수도 없을 것이었다.
“두 명.”
내가 가만히 그를 뜯어보고 있던 때.
순간 후드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간 입 한 번 열지 않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굳이 할 필요가 없겠군.”
“왜, 왜여?”
……안 한다고?
한마디를 남긴 채 문밖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남자.
예의 그 여관주인이 ‘어디 가셔요옹’ 하며 불렀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이게, 아닌데…….
망연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던 내 귀에, 옆에 앉은 남자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저 봐요, 아쿠 씨도 안 한다잖아. 이거 완전 사기…….”
* * *
“하우으으…… 피곤한 고애오…….”
나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히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어제 여관 밖으로 나간 남자가 마음에 걸려 온갖 대비를 다 해 뒀다.
경계, 경보 마법을 포함하여 방 안에 트랩들을 잔뜩 깔아 둔 상태.
만약 좀도둑이라도 진입했다면 그대로 온몸이 난도질된 채 죽었겠지.
째재재잭.
“호에에, 새 씨 반가운 고애오.”
다행히 방 안으로 들어온 거라곤 조롱이처럼 생긴 새 한 마리뿐이었다.
침상 옆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자, 내게 와서 달라붙는다.
“배고픈 고애오? 잠시만여…….”
손가락에 머리를 비비는 새.
보드라운 털에 살갗이 스치자 팔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웬만한 동물들은 이렇게 다들 내게 호의를 보인다.
아마도 정령 때문이겠지.
“여깄네여!”
혹시나 해서 남겨 뒀던 곡물 가루가 담긴 주머니.
약간 묵은내가 나긴 하지만, 짐승이 먹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찌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 가루를 가져다 대는 녀석.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머리를 막고 먹어 댄다.
“배고팠나 보네여…….”
잠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일리아 생각이 난다.
이런 귀여운 생명체들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데.
그 부류 안에 내가 속한다는 사실이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이런 걸 보면 이따금 생각이 난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단지 일리아뿐 아니라 나츠키, J, 패스파인더 길드원까지.
하나하나 다 걱정되기 시작했다.
“븝미쟝이 없으면 안 되는 고애오…….”
어디 언론에서나 외부에서 떠들어 대기를, 내가 바지길마라느니 하기도 했지만, 엄연히 이곳에서 일군 모든 것들은 내 관할하에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까.
“으얏.”
그때, 순간 오른쪽 손가락에 쪼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가 아니라…… 진짜로 아까 그 새가 내 손가락을 쪼고 있었다.
뭔가 열이 받아서 반격하려고 하니,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내 머리 부근으로 날아온다.
“아야! 아야! 아구구! 아픈 고애오! 그만해여!”
연신 나를 쪼아 대는 새.
한동안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나를 괴롭혀 대던 녀석은, 열 받아서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자마자 바로 창밖으로 도망친다.
반짝이는 햇살과 그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새.
언뜻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저 황당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런대여?”
이젠 한낱 날짐승한테까지 농락을 당하는 건가.
멀어져 가는 녀석을 망연히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은 차렸으니 됐다.
어차피 걱정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결국에는 엘프들을 찾아내고, 이곳에서 탈출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이어 나는 곧바로 여관을 나섰다.
“외로워도, 슬퍼도 븝미쟝은 안 우러여.”
전 속성 저항력 +10%
혹시나 모를 위험 상황을 대비해 노래를 부르며…….
* * *
각기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빠지게 된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의외로 나츠키였다.
일어나자마자 강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함께 온 이들을 찾았다.
“아…… 씨, 머리야. 니들 괜찮냐?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주변을 둘러보며 외치던 나츠키는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에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단순히 동료들만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떨어진 장소는 어느 울창한 숲.
적어도 백수십 년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을 것 같은 나무들이 우거진 곳이었다.
언뜻 엘프들이 자리 잡은 숲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그보다 더 충만한 정기가 느껴지는 장소.
그렇기에 나츠키는 순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엘프들이 사는 마을 안의 한 장소가 아닐까.
“잠깐만, 뭐야?”
그 생각은 정확히 3초 뒤, 나츠키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사라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과 몸의 형태가 일견 상당히 변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마력을 끌어 올릴 때도 그것이 느껴졌다.
본래 사용하던 마력의 절반도 안 되는 미약한 힘…… 지금의 나츠키가 끌어 올릴 수 있는 힘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마력으로 동그란 거울과 비슷한 형태를 만들어 낸 나츠키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자 전혀 예상외의 모습이 그를 통해 드러났다.
마력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금발 생머리에 큰 키를 가진 엘프 소녀의 모습이었다.
본래 그녀의 이미지와는 영 다른 타인.
“이게 씨발 뭐 하는 짓이야!”
본래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울 정도의 성정을 가지고 있던 나츠키.
요즘 들어 그 정도가 상당히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타인의 모습으로 변한 것에 대해, 곧바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니, 단지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분개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대상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찢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는 그것도 불가능할 공산이 높았지만.
나츠키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아까도 확인한 것이지만, 바뀐 그녀의 몸은 상당히 약했다.
본래 검사치고 상당히 높은 마력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이 몸은 아무래도 마법 쪽에 그 역량이 치우쳐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본래 몸보다 마력이 절반 이하로 낮으니…… 아예 제로 베이스에 가까운 나츠키의 마법에 대한 지식까지 합쳐진다면 그 힘이 1/10 이하로 약화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에 이 상태에서 적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곧바로 무슨 손 쓸 틈도 없이 죽어 버릴 것이다.
“후우……”
없다.
일단은 없는 게 다행이다.
아까 전까지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없음에 불평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일단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니 당분간 조금은 안심하고 상황을 지켜봐도 될 터였다.
“역시나…… 없네.”
입고 있는 옷도 바뀌었건만, 나츠키는 무의미하게 옷을 뒤적거려 봤다.
혹시나 쓸 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런 것 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잠시 자리에서 머물던 나츠키는 일어났다.
이대로 여기서 가만히 있어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언가 솟아날 길을 찾아봐야만 했다.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길이 어디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 보면 되겠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약해진 몸을 이끌고 나츠키는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대략 5시간 후,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미 입고 있던 옷은 잔뜩 해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가던 길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짐승과 산적 때문이었다.
“개새끼들…….”
으드득, 하고 이빨을 갈며 중얼거리는 그 ‘개새끼’에는 진짜 개새끼는 물론이고 아까의 산적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본래 몸이었다면 허섭스레기로 여겼을 놈들에게 목숨을 뺏길 뻔했다는 것에 몹시 화가 났다.
다만 그로써 알아낸 사실도 있었다.
이곳이 적어도 지구는 아니라는 것.
펜타곤에서 배웠던 이종족 강의에서 들은 대륙 그리고 나라의 이름을 대는 산적의 증언 덕분이었다.
애초에 흔히 ‘대륙어’라고 불리는 이종족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말하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다나와 길드원들도 이래서 마치 실종된 것처럼 사라졌던 건가.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륙력 474년이라…… 그게 어느 땐지 내가 어떻게 알아.”
산적들에게 들은 말을 되뇌며, 나츠키는 계속해서 숲을 걸어 나갔다.
이곳의 엘프들이 모여 있다는 한 마을의 방향으로.
그곳에 가면 뭔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변해 버린 몸도 엘프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