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장연우 취한 거 맞네.
연우가 새봄이 아주 사랑스러워 죽겠다며, 새봄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빈집에 태민이 들어와 있었다. 태민을 본 새봄이 부끄러워 손을 빼려고 했는데 연우가 더 세게 잡았다.
연우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태민이 뭐 때문에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다. 분명 열애설이다. 그러니 더더욱 새봄이랑 이런 사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새봄은 연우에게 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태민은 새봄과 연우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오늘 열애설 기사를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밤에 연우 집에 손까지 잡고 들어오니 더더욱 설명이 필요했다. 진짜 둘이 제대로 사랑이라도 할 생각인지 손을 꽉 잡고 들어왔다.
홈바 식탁 앞까지 와서 보니 태민이 냉장고를 뒤진 건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남의 집 냉장고를 뒤진 게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마셔야 태민이랑 뭔가 이야기 좀 할 거 같았다.
연우가 새봄이를 앉히고 맥주를 몇 개 더 꺼내와 새봄이는 못 마시게 막은 후에 캔을 따서 마셨다. 새봄이 마시려고 손을 뻗자 연우가 못 마시게 손으로 막았다. 오늘은 새봄이는 취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먹지 마. 너 취해서 토하고 그러는 거 한 번으로 족해.”
새봄은 오늘 무지 마시고 싶었다. 태민이 앞에 있으니 사실 좀 쪽팔렸다. 전에 연우 친구라는 이 남자 앞에서 연우가 내 몸이며 다 봤느니 어쨌느니 하던 게 생각이 났다. 이렇게 또 볼 줄은 몰랐다.
아니 만날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며칠 안 돼서 다시 볼 줄은. 그러니 마시고 싶었다. 그래야 좀 덜 쪽팔릴 거 같은데 자꾸 술을 못 먹게 한다. 오늘은 일단 참기로 했다.
맥주를 쭉 들이켜던 연우가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세게 구긴 뒤 내려놓고 새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 오빵이는 좀 귀엽던데?”
새봄은 쪽팔려 죽겠는데 왜 또 거기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 근데 또 귀엽다니까 안 할 수도 없다.
“오빵. 빵 먹고 싶어. 오빠아아앙. 오빠아아앙.”
연우가 좋아 죽겠다며 웃었다. 너무 귀엽다.
“귀엽지 않아?”
태민은 연우의 말에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연우는 태민의 반응에 실망스러운 듯, 맥주 한 캔을 더 들고 원 샷 해 버렸다. 갈증도 났기에 단번에 다 마셔 버렸다. 다 마신 캔을 한 손으로 구겨 놓았다. 연우 앞에 맥주 캔이 잔뜩 쌓였다.
“이태민. 너 우리 집에 아무 때나 오는 거 이제 자제 좀 해야겠다.”
“……왜?”
“나 봄이랑 같이 우리 집에서 살 거든. 그러니까 네가 막 아무 때나 오면 봄이 그때처럼 뭐 그런 거. 네가 다 보는 거 싫거든.”
태민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안에 한참을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너무 놀라 뿜어 버릴 뻔한 걸 억지로 넘겼다. 열애설은 그랬다 치고 산다고 하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열애설 이후 같이 살기로 한 거야? 아니지. 그게 오늘인데. 조금 전에 결정 난 거야?”
“그건 며칠 됐어.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많이 먹고 가. 치킨 먹고 싶다. 봄이가 배달해 주는 거.”
“……가져올까?”
“아니. 싫어. 너 위험하니까 싫어. 이제 밤에는 나 없이 아무 데도 가지 마.”
“……장연우. 너 오늘 좀 멋있다.”
새봄이 말했다. 연우는 또 그 말에 새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주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연우였지만 안주는 없어도 괜찮다. 봄이랑 함께 있기만 하다면 상관없었다.
새봄이 쪽팔려 맥주를 마시려고 했지만, 연우가 빼앗았다. 새봄은 입이 삐죽 나와 못마땅한 얼굴이다.
“먹지 말라고. 취한다고.”
“……장연우. 너 때문에 먹을 거야. 나 쪽팔리게 한 죄.”
“……뭐라고?”
“몰라. 이거 놔. 마실 거야.”
진짜 오늘만큼은 참으려고 했는데. 자꾸 전에 일을 꺼내서 쪽팔리게 만든다.
그러니 마시고 싶다. 사실 마시고 싶은데 못 마시게 하니까 이유를 만든 건데 안 통했다.
새봄이 마시려는 맥주를 빼앗아 연우가 꼴깍꼴깍 마시더니 맥주 한 캔을 더 따서 마셨다.
새봄이 앞에 술이 없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안 먹을 것 같았다.
“장연우. 나 궁금한 게 있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태민이 맥주 캔을 내려놓고 물었다.
“너 열애설 그거 네가 만든 거지?”
“맞아. 봄이 어디 못 가게. 온 세상에 내 여자로 알리고 싶어서.”
태민이 연우와 새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맥주 캔에 남은 걸 한 번에 원 샷하고 말했다.
“……새봄 씨, 잘 들어요. 장연우가 지금까지 먼저 열애설 만든 적도 없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 처음 봐요. 새봄 씨한테는 진짜 진심인 거예요.”
“……네?”
“그 있잖아요. 새봄 씨, 술 먹고 토할 때도. 다 치워 준 거. 장연우한테는 상상도 못 할 일이거든요. 근데 해 준 거도 그렇고. 새봄 씨랑 같이 사는 것도. 장연우는 누구랑 같이 사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심지어 나도 같이 살자고 했다가 연우한테 거절당했어요.”
‘진짜야? 장연우? 정말 나한테만 그런 거였어? 그럼 이세연은 뭐야? 뭘 어쨌기에 자꾸 장연우 앞에 얼쩡거리지?’
“그러니까 새봄 씨, 연우한테 잘해요. 물론 연우도 잘하겠지만.”
술에 취한 연우가 갑자기 양손으로 새봄의 얼굴을 감싸더니 눈을 반만 뜨고 곧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새봄을 바라보았다.
“봄아. 오빠앙. 이거 해줘.”
태민이 눈치를 봐 슬쩍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맞는다고 생각했다.
“……오빵이 해줘.”
이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해 달라는데. 분명 취해서 해 달라는데.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오빠아앙. 빵 먹고 싶어. 오빵. 오빠아앙.”
“……귀엽따. 우리 봄이 어엄청 귀여워.”
“장연우 취했어?”
“나 안 취해는떼?”
분명 취한 거 맞다. 쪽팔림에 새봄이 먹으려고 한 술을 다 빼앗아 먹더니 연우가 취해 버렸다. 오늘 취하고 싶은 건 새봄이었는데. 그러기에 왜 먹으려는 술까지 빼앗아 먹어서. 이렇게 취한 건지 모르겠다.
연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침대까지 비틀비틀 걸어갔다. 새봄이 도와준다고 해도 뿌리쳤다.
그러더니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허리띠에 바지까지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침대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새봄이 연우를 뒤따라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여기서 왜? 옷을 다 벗고? 침대는 왜 네가 눕는데?’
연우는 술에 취하니 지금 어디에 누운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연우가 이 침대에서 잘 거 같다.
‘그럼 어쩌지? 소파로 갈까? 아니면 옆에서 그냥 잘까? 어쩌지? 어떻게 하라는 말인데!!! 내 침대란 말이야.’
괜히 심술 난 새봄이 입을 앙다물었다. 술만 안 취했으면 그냥 밀쳐내고 가서 눕는 건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 예쁘고 귀여운 봄아아. 이리 와봐.”
연우가 오란다고 순순히 갈 새봄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취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반만 뜬 연우는 새봄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새봄을 연우의 몸 위에 눕혔다.
“……이러고 있어. 나랑 오늘 이러고 자자.”
“장연우 취한 거 맞네.”
이러고 뭘 어떻게 잔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새봄이 빠져나가려 하니 너무 꽉 잡고 있었다. 한쪽 팔로 잡고 있는데도 힘은 너무 셌다. 연우가 잘 때까지 기다린 새봄이 슬쩍 일어나 소파로 가서 누웠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오늘은 침대에서 자기는 글렀다 싶었다.
* * *
연우는 술을 마신 탓인지 목이 말라서 깼다. 그때까진 장연우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어떤 상태로 있는지 상상을 하지 못했다.
“봄아아아. 물…….”
연우가 큰 소리로 부르자 새봄이도 놀라 깨서 물을 가져다줬다. 직접 가져다 마시면 될걸.
잠이 덜 깬 새봄도 어찌하다 보니 가져다주고 있었다. 연우가 몸을 일으켜 앉아 물을 마시는데 새봄이 고개를 돌렸다. 차마 연우의 알몸을 보지 못했다. 아깐 몰랐는데 진짜 팬티만 입고 있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에야 정신 차린 연우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새봄에게 빈 컵을 주고 몸을 확인해 보았다.
‘이거 뭐지? 나 왜 이래? 왜 내가 침대에 누웠어? 침대 봄이 주기로 했는데? 미쳤다.’
연우가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리고 소리쳤다. 이불 속에 모습을 보니 더 심했다. 진짜 팬티만 입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했다. 새봄이 앞에서 이렇게 쪽팔린 꼴을 당할 줄은 몰랐다.
“으악!!! 봄아. 아무거나 내 옷 좀…….”
새봄이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어두운 방안을 헤집으며 물컵을 홈바 식탁에 살며시 내려놓고 연우가 바닥에 벗어 던진 옷을 주워 연우에게 주었다.
연우가 급하게 옷을 입고 와이셔츠 단추도 중간에 하나쯤 잠그고 침대에서 나왔다.
“……미안해. 내가 어제 술 너무 먹었나 봐. 봄이 앞에서 창피하게.”
“……아니야. 괜찮아.”
대답은 괜찮다 했지만 진짜 괜찮은 것도 아니다. 진짜 창피한 게 뭔지 모르나 보다. 진짜 창피한 건 장연우 친구 앞에서도 내 몸을 보여준 거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 일은 잊고 싶은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다.
‘그러고 보니 장연우 몸 진짜 짱이다. 저 배에 왕자 복근. 언제 만든 거지? 잘생기고 몸매까지 저렇게 완벽한데 여자들이 안 달라붙는 것도 이상하지. 잘생기기까지 해서 여자들이 붙은 건 당연하네. 저 복근 한번 만져보고 싶다.’
복근을 보던 새봄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장연우가 내 남자라 좋았다. 이렇게 멋진 복근을 가진 남자. 이제 온 세상이 다 아는 내 남자였다.
연우는 속이 좀 쓰렸다. 어제 너무 안주 없이 술만 먹은 탓인가 보다. 새봄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은 연우는 단추를 다 잠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봄아. 여기 누워서 자. 나 앞으로 이렇게 술 안 마실게.”
‘믿을 걸 믿어야지. 과연 저 말 믿어도 되는 걸까.’
새봄이 멍하게 서 있었다. 연우가 새봄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술에 취해도 힘은 여전히 넘쳤다. 누워있는 새봄에게 점점 다가간 연우가 새봄의 입술에 뽀뽀 한 번 하고 소파로 가 누웠다. 담요를 덮고 자는 데 속이 쓰려 왔다. 그래도 새봄이가 침대에서 편안하게 잘 자면 됐다. 괜히 자신 때문에 소파에서 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집안에 새봄이가 잠들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걸 확인한 연우가 한참 뒤 잠이 들었다. 오늘은 술도 먹었으니 악몽도 없고, 꿈에서도 새봄이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도 연우 악몽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