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15년 전 그날엔(1)
새봄은 추위에 떨면서도, 왜 연우가 저기서 오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우가 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새봄을 바라보며, 걷던 연우는 새봄이 벌벌 떨고 있는 걸 보고, 또 걱정이 되어 뛰었다. 정말 안 벗어 주려고 했지만, 추위에 떠는 새봄을 그냥 둘 수 없는 연우는 새봄에게 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이렇게 꾸미지 않아도 예뻐. 이 추운 겨울에 네가 혼자 떨고 있는 건 나 못 봐.”
“장연우.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새봄은 연우가 이제 막 감기도 다 나은 거 같은데, 또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 마. 딱 차까지만. 금방 갈 거야.”
연우는 다시 한번 새봄의 몸을 쭉 훑었고,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가 사 준 옷이네?”
“이게 제일 단정하고, 어머님이 주신 목걸이를 하고 싶은데 이게 제일 어울리더라고.”
“예뻐. 가자.”
연우는 새봄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새봄은 연우 걱정에 괜찮다며, 다시 연우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연우는 옷을 입고, 새봄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없이 롱 패딩의 주머니에 꼭 잡은 새봄의 손을 넣어 주었다.
“차는 어디 있는데?”
새봄은 어깨에 걸린 가방을 손으로 올리며 물었다.
“……너랑 걷고 싶어서 저 멀리 두고 왔어.”
연우의 말에 새봄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랑? 저 멀리 어디?”
“여기서 안 멀어. 좀만 가면 돼.”
연우는 롱 패딩 안에 있는 새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오빠. 어디 갔다가 왔어?”
“그냥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산책했다고 생각해.”
‘치이. 산책은 혼자 하나.’
새봄이 너무 긴장해서 손마저 떨리는 걸 연우는 느꼈다. 분명 그럴 거였다. 새봄이 얼마나 떨리는지 아는 연우는 롱코트 주머니 안에 있는 새봄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었다. 괜찮다고 말 해 주는 듯, 연우는 그 안에서 새봄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지금 상태로는 새봄이 긴장 상태라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최선인 거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연우는 차 문을 열고, 새봄을 먼저 태웠다.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맨 연우는 운전석으로 가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건 연우가 말했다.
“긴장하지 마. 말했잖아. 나 아닌 너한테 연락한 거 보면 나쁜 일도 아니고, 울 엄마 너 좋아하셔.”
그래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우의 부모님이었다.
새봄은 많이 긴장한 건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거울을 보며 화장도 다시 한번 보고, 또 보고 고치고를 반복했다. 연우도 새봄이 은근 신경 쓰이는지 계속 새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연우는 그런 새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한편으로는 새봄의 마음이 이해는 갔지만, 저 정도로 신경 쓸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연우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오른손으로 새봄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을 거야.”
새봄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연우는 아는지는 모르겠다. 연우가 꼭 잡아 준 손에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얼마나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연우의 그 큰 저택 앞에 차가 멈췄다. 연우가 새봄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자.”
연우의 손을 꼭 잡고 들어가면서도 새봄은 계속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빠. 잠깐만.”
집 대문 앞에 다다르자. 새봄이 잠시 멈추며 말했다. 연우의 손을 놓으며 심장을 부여잡고, 잠시 멈춰 섰다. 그 모습에 연우도 덩달아 긴장을 해 버렸다. 한참 동안 멍하게 그런 새봄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말했다.
“괜찮아. 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새봄은 연우를 믿고, 안심은 되었지만 긴장되는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연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잡자, 새봄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연우의 손을 꽉 잡고 따라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연우의 엄마가 연우와 새봄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연우는 긴장한 새봄을 위해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새봄이 괜찮다면 다행이었다.
“새봄이 왔구나!!! 어서 와. 목걸이 잘 어울리네.”
연우의 엄마는 새봄의 목걸이부터 발견하고, 칭찬부터 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새봄은 긴장이 풀리는 거 같았다. 연우는 아들보다는 새봄이를 더 반기는 거 같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식탁에는 한 번도 연우한테 해 주지 못했던 진수성찬에 연우는 또 한 번 실망을 했다.
“새봄이 앉아. 연우도 앉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오던 석기가 말했다. 석기가 맥주를 식탁 위에 내려놓자, 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 술을 엄청 마시고, 아직 다 깨지도 않아서 그런지, 술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거 같았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 걸, 긴장한 새봄의 앞에서 티 낼 수도 없어서 억지로 참고 있었다. 연우의 속을 알 수 없는 석기는 맥주잔을 채워 연우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연우 한잔해라.”
“아시다시피. 전 차가 있어요.”
“자고 가면 되지. 한잔하거라.”
자고 가는 거, 연우에게는 상관없지만, 새봄이가 불편할 거 같았다. 새봄의 눈치를 살피던 연우는 그래도 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에 주시는 건데 안 먹을 수도 없고, 조금은 괜찮겠지 싶어서 연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반 정도 먹고 내려놓았다.
연우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으며, 새봄에게 이것저것 반찬을 챙겨주고 있었다. 새봄이 긴장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 하고 있는 거 같아 보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봄이가 정말 아무것도 먹지 못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우가 챙겨줌에도 새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해 괜히 걱정이었다. 먹여주기까지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연우의 엄마가 한참 분위기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새봄아 연우가 힘들게 안 하지?”
“……네.”
사실은 어제 연우가 힘들게 했었다고, 연우가 술을 된통 마시고 와서 술버릇이 엄청났다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술버릇이 이상한 거 말고는 연우가 속 썩이는 일은 없었다. 속을 썩인다면 아마 새봄이 연우의 속을 많이 썩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우 엄마가 편하게 대해 주시니 새봄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더니 말했다.
“그런데요. 연우 오빠 술버릇이요…….”
“하하핫. 그렇지? 연우 술버릇이 좀 그렇긴 하지?”
연우의 엄마도 잘 아는 건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새봄은 이제 조금씩 긴장이 풀려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다. 연우도 새봄의 표정이 좋아지자, 이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심각한 표정의 석기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그러자 연우도 아까 먹고 반쯤 남았던 맥주를 쭉 마셨다. 그 맥주를 마시고 나니 아까보다 더 속이 울렁거려 옴을 느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딱 한 잔에도 속이 아파 왔다.
“새봄이도 한잔하겠니?”
별로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우의 아빠니까 거부할 수도 없어서 일단 마시려고 하는데, 연우가 새봄의 잔을 빼앗아 마셨다. 속은 안 좋더라도 새봄이가 술 먹는 건 또 싫었다. 새봄은 당황스러워 컵을 잡았던 손 모양을 그대로 한 채,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맥주 한 잔을 그대로 원 샷했다. 먹고 나니 속에서 곧 뭔가가 올라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을 입으로 막은 연우는 그 상태로 화장실까지 달려갔다. 속이 안 좋아 계속 참았더니 안 되겠다.
한참 후, 연우는 몸에 잔뜩 힘이 빠져나왔다. 연우는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새봄의 어깨에 기대었다. 속이 안 좋아서 미치겠다.
“오빠 괜찮은 거야?”
새봄이 걱정되어 조심히 묻자. 연우는 대답 없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속이 아파서 더 이상 술이고, 밥이고 먹지도 못할 거 같았다.
“연우 어디가 아픈 거니?”
연우 엄마의 물음에 살짝 연우 눈치를 본 새봄이 말했다.
“어제 술을 좀 먹었어요. 그래서 그렇데요.”
“새봄이 속 좀 꽤나 썩혔겠네?”
연우의 술버릇을 잘 아는 연우의 엄마도, 새봄이도 꽤 힘들었다는 걸 잘 아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무리 연우의 술버릇을 안다고 하지만 어제 술 먹고 와서 옷도 다 벗고 난리였다는 말을 차마 새봄이 입 밖으로 할 수가 없었다. 연우는 속 쓰림에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오늘 진짜 자고 가야 할 거 같았다. 새봄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을 거의 먹어 갈 즈음. 석기가 먹었던 맥주병도 꽤 많이 쌓였다.
“연우 너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없는 거니? 15년 전일 말이다.”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이었던, 석기가 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석기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던 연우의 엄마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치 보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실은 말이야. 내가 오늘 너희를 부른 이유는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였어.”
“어떤 말인데요?”
연우를 한 번 힐끔 본 새봄이 물었다. 연우의 엄마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은 말이야. 15년 전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연우가 이렇게 되어서 다음에 해야 할 거 같구나.”
저번에 분명 연우의 엄마도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던 이야기였다. 새봄은 지금 연우의 엄마가 한 말이 또 궁금해 졌다. 몰랐던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봄은 고개를 돌려 연우를 쓰윽 확인하더니 말했다.
“해 주세요. 15년 전 그날 이야기요.”
연우가 그대로 잠든 거 같았고 연우에게 미안하지만, 꼭 듣고 싶었다. 연우의 엄마도 이런 상황에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새봄이가 궁금하다고 하니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했다.
“사실은 말이지. 나도 새봄이 너랑 본 이후로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었어. 연우가 그날 어떻게 왔는지.”
“……뭔데요?”
연우 엄마의 말에 새봄이 궁금한 듯 물었다. 새봄은 얼른 더 말해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우의 엄마는 연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연우 할아버지도 비슷한 무렵에 돌아가셨고, 나도 생각을 했는데. 그날 아마 누군가 있던 거 같구나. 새봄이 부모님은 며칠 뒤에 발견되고.”
듣고 있던 연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연우가 속이 안 좋은 거로 생각한 새봄이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건 그만큼이야. 연우가 기억해야지. 아직 연우는 기억이 나지 않은 것 같으니 우리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새봄의 말에 연우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점점 그날의 기억이 생각날 듯했다.
연우는 눈을 뜨고, 잠시 생각을 했다. 연우 엄마의 몇 마디에 연우는 어렴풋이 났던 기억이 점점 기억이 나는 거 같았다. 정확히는 새봄이 도와서 국밥을 만들던 그 날. 칼을 잡고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했던 그 날 생각났었다.
연우는 새봄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감싸 쥐며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래? 괜찮아?”
“제발 그만해 줘.”
연우는 계속 머리를 감싸고 있는 상태로 말했다. 연우는 심하게 괴로워 보였다.
“오빠 왜 그래?”
“기억났어. 그러니까 그만해.”
“기억이 났어? 갑자기?”
연우의 엄마 물음에 연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며 소리쳤다.
“그만해!!! 그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