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내일도 너를 사랑해-56화 (56/79)

제56화

내가 더 좋아하니까.

새봄은 연우가 꼭 안고 있는 팔을 뿌리쳤다. 정말 연우한테 실망해 버렸다. 연우의 그때 마음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자리 연우가 있었으면서 도망가 버린 게 너무 싫었고 하필 연우 부모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게 다 기억나 버린 연우도 싫었다.

연우가 고개를 숙이자,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고개를 들어 새봄을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때 너보단 내가 더 힘들었어. 왜 내가 그 기억을 다 잊고 싶었을 거 같은데?”

“몰라. 난 몰라. 그냥 장연우 미워.”

말이라도 하고 가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 나오려고 한 거 알았으면 잠깐이라도 보고가 주면, 차라리 덜 미웠을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 연우도 그땐 그렇게 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그래도 새봄이가 연우의 마음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애써 눈물을 참아보려던 연우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아. 네가 지난 15년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도 힘들었어. 그 이후. 네 생각 한 번도 안 했을 거 같아? 그날은 아프고 무서웠고. 11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어떻게 그렇게 가. 어떻게 그래? 장연우 너만 살겠다고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두고 도망간 거잖아.”

“도망이 아니라고!!! 아팠으니까. 손이 아파 죽겠는데. 너 나오면, 나까지 그러는 거 보일 수 없었으니까. 11살이 그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 그랬으면? 그 상황 네가 이해할 수 있었어?”

“오빠라도 있었으면. 그러면 그날 우리 엄마 아빠 왜 그렇게 된 건지도 알 수 있었잖아. 언니랑 내가 나왔을 땐 이미 그 강도범도 가고 난 후였단 말이야. 나도 얼마나 무서웠는데.”

“11살의 그 어린 꼬맹이가 목격을 했어. 그 끔찍한 사건을. 그것도 미래를 약속한 여자의 부모님이 죽는걸. 그런 내가 너랑 보미랑 나오는 거 기다렸으면? 그다음은 네가 뭘 해 줄 수 있었는데?”

“장연우. 너 지금 말 다 했어?”

그 상황을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새봄이 따지듯 물었다. 차라리 그날 연우가 한마디 말이라도 하고 갔으면, 차라리 이유라도 알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뭘 해 줄 수 있었냐고 따져 묻는 상황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연우는 오히려 새봄이에게 따지기라도 할 것 같은 말투로 다시 말했다.

“넌. 거기서 아무것도 못 해 줬어. 아니 해 줄 수 없었어. 나도 못 하는 걸 네가 어떻게…… 며칠 뒤에라도 와서 말해 주고 갔어야 하는데. 그대로 말없이 가버린 건, 내 잘못이야. 그건 나도 인정해.”

연우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건 아니다. 연우가 그날 그 상황을 직접 봤으니까. 새봄보다는 더 무섭고 괴로웠을 거라는 거 모르는 건 아니다. 연우와 새봄은 그날의 상황을 서로 이해하지 못 하는 거다.

새봄은 아무 대답 하지 않았고, 연우는 갑자기 느껴지는 배의 통증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데?”

“……말하기 싫어. 장연우란 남자. 이제 보기 싫어.”

“그 말…… 나한테 헤어지자는 거야?”

“…….”

그동안 연우가 말도 없이 새봄의 몸을 다 봐 버린 거, 연우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들 다 잊을 수 있었다. 용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연우도 새봄이 헤어지자고 했던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우가 한참을 새봄의 대답을 기다리며, 멍하게 서 있다가 말했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갈게. 지금은 보기 싫어. 장연우 나에게도 시간을 좀 줘.”

새봄은 그렇게 가버렸다. 정말 연우를 다시 보기 싫은 거 같았다. 그 마음도 이해가 갔다. 차로 뛰어간 연우가 차를 슬슬 움직이며 새봄의 뒤를 쫓았다. 이대로 새봄을 보낼 수 없었다.

보내기 싫었다. 새봄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그냥 막 걷고 있었다. 저러다가 정말 뭔 일이라도 날 거 같다 싶었다. 밖도 어두운데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연우의 속과 머리는 심하게 아팠다. 미간을 한 번 찌푸린 연우는 아픈 거보다 새봄이 먼저였다. 아파 죽어도 꼭 새봄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했다. 여기서 새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나면 연우의 마음이 더 편치 않을 거 같았다. 새봄이 가는 걸 바짝 쫓고 있는데 하필 신호가 걸렸다. 잠시 눈을 감은 연우는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잠깐 그러고 있으려고 했다.

속과 머리가 너무 아파 어쩔 수 없었다. 새봄이가 어디로 가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사이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있던 연우는 뒤에서 ‘빵’ 하는 소리에 정신 차리고 보니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급히 출발한 연우는 정신 차리고 보니 새봄이를 놓쳤다. 눈만 안 감고 있었어도, 어디로 가는 줄은 알았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답답했다.

이 순간 연우가 갈 수 있는 곳은 치킨집뿐이었다.

어차피 거기로는 올 거 같았다. 늦게라도 어차피 갈 때는 거기뿐이라고 생각했다.

* * *

연우가 치킨집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직 치킨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차에서 내린 연우는 갑자기 두통에 휘청거렸다.

속도 안 좋은데.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한 번 누르던 연우가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보미는 전화가 올 때마다 배달은 안 된다고 하고 있었다. 분명 새봄이가 안 온 건 확실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보미가 연우를 보긴 했으나 치킨 서빙을 하느라 잠시 지나쳤다가 서빙 후 다시 와서 물었다.

“장연우. 새봄이는?”

“……여기 안 왔어?”

연우도, 보미도 서로 모른다는 듯, 같이 놀란 눈치였다.

“……뭐야. 같이 어머님네 간 거 아니야?”

“맞아. 맞는데. 하아.”

연우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몸도 아픈데, 연우도 지금 상황 짜증 나 죽겠는데, 새봄이까지 이러니 진짜 미치겠다. 연우를 바라보던 보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싸웠어? 손님도 많고 배달도 계속 못 해서. 지금 난리야. 새봄이는 어디 갔는지 연락도 안 되고.”

‘연락이 안 된다고?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왜 연락이 안 되는 걸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어디로 가버린 건데. 봄아 제발.’

연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새봄이가 어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도 되고 무서웠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미간을 팍 찌푸리던 연우가 말했다. 새봄이 걱정은 되지만 보미도 알아야 할 거니까.

그래야 새봄이를 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지금 좀…….”

보미는 한참 바빠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연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보미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일이야. 너도 꼭 알아야 할…… 밖에서 기다릴게. 한가해지면 나와.”

이렇게 다 알아버린 거 빨리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연우가 밖으로 나가자 보미가 더 바빠졌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야 보미가 밖으로 나갔다. 연우는 치킨집 바로 오른쪽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아프고 미치겠다. 좀이라도 빨리 말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슨 일이야? 장연우.”

보미의 목소리에 연우가 눈을 떴다. 그리고 보미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답답한 보미가 말을 이었다.

“……뭔데? 새봄이도 없고 미치겠어.”

길게 한숨을 내쉰 연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믿기 힘들 수도 있고. 나 다시는 안 보고 싶을 수 있어.”

“…….”

“15년 전 그날. 너희 부모님 돌아가신 날. 그날이 내가 갑자기 떠난 그 날인 거 알지?”

왠지 그날이 같은 날인 걸, 보미는 알 거 같았다.

“그게 왜? 본론만 말해봐.”

“……내 칼 트라우마. 그날부터야. 새봄이 그날 많이 화나 있었어?”

그러고 보니 보미도 이제야 기억날 거 같았다. 새봄의 생일이 지난 지 이틀쯤 되던 날이었다. 연우 온다고 잔뜩 기대한 새봄이었는데. 오지 않아서 새봄이가 울었었고. 연우한테 많이 화나 있었다.

“……그랬던 거 같아. 네가 그걸 어떻게…….”

보미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건지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니까 설마, 연우도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보미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넌 알지? 그날 일. 내가 생생히 봤어. 강도였어. 너희 부모님 찌르는 거. 그리고 내 손 이렇게 만들고…… 하………….”

너무 당황해할 말을 잃은 보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너…… 그날…… 가…… 강도…… 칼…….”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연우가 그날 있었는데 분명 보미랑 새봄이가 나오고 난 후에는 연우가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를 모르겠다.

“미안해. 너무 무서웠고, 아팠고. 그래서 도망쳤어. 내가 혼자 살겠다고.”

“……장연우!!!”

“너도 나 밉지? 그래서 새봄이가 가버렸는데. 쫓아가다가 놓쳤어.”

“그걸 놓치면 어떻게 해!!!”

보미가 더 답답하다. 새봄을 놓친 건 답답한데. 그날 이야기를 듣고 난 충격은 벗어나질 못하겠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새봄이도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거 같았다. 새봄이는 이거보다 더했을 거다. 걱정되어 미치겠다는 연우가 말했다.

“……그래서 나도 미치겠어. 그래서 혹시나 하고 여기 온 거잖아. 새봄이 어디에 갈만한 데 없어?”

“없어. 알잖아. 새봄이 늘 가던 데가 치킨집이고 할머니 가게였던 거.”

“나. 새봄이 못 찾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될 줄 몰라.”

연우의 표정을 보니 새봄에게 그리고 보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는 걸 느꼈다.

그날 일은 충격적이지만 연우도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지, 공감이 갔다. 그렇지만 보미도 한편으로는 새봄과 같은 생각이다. 그날 말이라도 했다면, 어떤 상황인지 알았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그거 때문에 새봄이랑 싸우고 온 거면 보미라도 연우의 마음을 이해해 줘야 할 거 같았다.

연우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새봄이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왜 아직 안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까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새봄이 연락 오거나 여기로 오면 나한테 바로 말해줘.”

“정말 괜찮은 거지 너?”

“새봄이가 많이 힘들 거 같아. 새봄이가 울고, 힘들어하고 그런 건 싫어. 미안하다고 말해도 싫데. 나랑 헤어지고 싶데.”

“연락해 줄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어. 새봄이 너랑 절대 헤어지고 그럴 애 아니야.”

“……나 새봄이랑 헤어지고는 못 살아. 내가 더 많이 좋아하니까.”

그동안 연우가 새봄에게 했던 모든 행동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15년 전 일은 용서는 못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새봄이를 좋아하는 거라면 용서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 가 있을게. 새봄이 오면 꼭 연락해 줘. 너라도 나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까부터 속도 아프고 머리가 깨질 거 같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이젠 정말 못 참을 거 같았다. 집에 가서 편히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다. 새봄이 연락 왔다고. 치킨집으로 왔다고 혹시 연락이라도 오면 받아야 하니까.

“……알았어.”

연우도 많이 힘들 거 같았다. 새봄이도, 보미도 충격이겠지만, 연우도 그날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랐으니 괴로울 만도 했다. 보미는 최대한 연우의 마음을 이해해 줘 보려고 했다.

차로 간 연우.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운전이 힘들 거 같다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앉아서 쉬다 갈 생각이었다. 보미가 가지 않은 연우의 차를 동정 어린 눈으로 한없이 바라보았다.

연우의 차가 막 출발하려는 그때, 새봄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펑펑 운 거 같았다. 연우의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보미가 새봄이 오는 걸 보고 연우를 붙잡고 싶었지만, 연우의 차는 이미 떠나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