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아주 좋아 죽네.
새봄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바빴다. 연우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맞선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어차피 자리만 나갈 거라 대충 입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맞선 자리이니까. 뭘 입고 나가나 고민하던 새봄은 연우가 사 준 옷 하나를 골랐다. 연우한테 옷 몇 벌 선물 받고 여기저기 잘도 입고 다녀서 참 좋았다. 사실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소개팅이나 미팅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새봄에게 맞선은 연우 외에 남자를 만나는 게 처음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남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서 진짜 그냥 보고만 올 생각이었다. 가서 결혼할 남자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연우한테 말하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맞선을 보러 가기 전 일단은 치킨집에 먼저 갔다. 잔뜩 기대에 차서 집에서 나왔는데 시간도 남았고, 언니한테 한 번 더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하려고 했다.
영업 준비를 하던 보미가 부엌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새봄이었다.
“새봄아!!!”
부엌에서 뛰쳐나온 보미가 새봄을 쭉 훑어봤다.
‘아! 오늘 맞선보러 간다고 했지. ’
순간 잊고 있었다. 새봄 쪽으로 걸어온 보미가 물었다.
“진짜 갈 거야?”
“어차피 연우는 몰라. 알잖아. 오늘 올 일도 없고. 내일 올 거니까.”
“난 왠지 불안한데?”
새봄이는 아무렇지 않은데. 보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뭔가 일이 크게 터질 거 같은 느낌이었다. 새봄이가 저렇게 들떠 있으니 뭐라 말은 못 하겠다.
“언니. 오늘 일은 무덤까지 비밀이다!!! 알지? 나 갈게.”
새봄이 들떠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보미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은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보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맞선 본다고 들떠 있던 새봄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거울을 보며 누군지 모를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너무 기대했는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우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연우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들뜬 거 같았다.
* * *
제부도 물길을 막 빠져나온 연우는 답답한 넥타이부터 한 손으로 풀어 버렸다. 새봄이가 뭘 할지 알기에 신경 썼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창문에 기대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규정 속도로 달리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오늘따라 차가 느리게 가는 거 같았다. 괜히 불안한 탓이라고 생각한 연우는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넣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안 되겠다. 이 정도 속도로는 왠지 맞선 끝나기 전에 못 도착할 거 같다. 속도를 빨리 내어 120킬로가 넘을 때까지 달려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진짜 어쩔 수 없었다.
차선 변경도 깜빡이도 안 켜고 막 하느라 사고 날 뻔한 게 5번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왔다.
* * *
“혹시 한새봄 씨인가요?”
드디어 맞선 보기로 한 그 남자가 왔다. 새봄이 고개를 쓱 돌리고 보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잘 못 본 거로 생각하고 싶었다. 일단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근데 진짜 이 남자 맞는지 의문이 갔다.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연우가 훨씬 낫다. 할머니 소원이지만 너무 기대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아니. 연우가 훨씬 나은 정도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할머니는 이런 남자와 맞선을 보라고 했다. 딱 봐도 나이는 많아 보이고 키도 작고 안경까지 쓴 데다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 남자가 나쁜 건 아니다.
연우를 보다 보니 눈만 높아져서 그런지 이런 남자는 눈에 안 차는 거였다.
맞선남이 새봄의 앞에 앉았다. 새봄도 그대로 얼어 있던 몸을 움직이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반가워요. 박수혁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이름을 말하며 악수를 요청을 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민망하게 뻗어 있는 손을 보자니 미안해서 일단 악수를 했다.
“일찍 오셨네요.”
“네.”
그 남자 말에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너무 기대해서 일찍 와서 기다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 남자 손이 축축하다. 원래 이럴까?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손에 땀이 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거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새봄 씨는 들은 거처럼 어려 보이시네요. 전 서른다섯이에요.”
‘서른다섯이면 연우보다 9살이나 많고, 나랑 몇 살 차이야? 12살. 대박. 띠동갑이다. 어떻게 이런 남자랑 맞선을 봐야 하는 걸까.’
“새봄 씨는 어떤 남자 좋아하세요?”
“요리 잘하는 남자요.”
너만 아니면 된다고. 장연우라는 남자라고 말 하고 싶었다.
“요리는 저도 잘하는데. 혼자 오래 살아서 이제 그 정도는 해요.”
‘그런 요리가 아니라고요. 우리 연우는 그쪽과 비교 할 수 있는 그런 요리가 아니라. 진짜 유명한 셰프라니까요. 앞으로 그렇게 될 거고요.’
“어디 살아요?”
“안 살아요.”
“새봄 씨 참 재밌는 분이네요.”
‘그쪽은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새봄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수혁인가 뭔가 하는 그 남자가 말할 때마다 새봄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말하고 연우한테 도와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보다. 이렇게까지 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연우가 와서 좀 도와주면 좋겠다.
‘와서 데려가 줘. 장연우.’
* * *
오는 동안에도,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표정이 많이 어두워진 연우는 일단은 치킨집 안으로 들어갔다. 새봄이 선본다는 그 장소도 모르고 혹시 아직 안 간다면 그 전에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연우가 들어가자 보미가 닭을 두드리다가 멈춰 버렸다. 닭목을 세게 내리치던 보미가 그대로 닭목에 칼이 꽂힌 채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를 차마 보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연우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코트는 벌어져 있는 상태로 보미 앞까지 다가갔다. 보미도 오늘은 찔리는 게 있으니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연.우.야. 벌써 왔어? 워크샾은?”
연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미도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새봄이는?”
“할머니한테.”
“정말 할머니한테 간 거 맞아?”
“응.”
연우는 빨리 말해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새봄이가 무슨 말 안 해?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무슨 말?”
연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정말 느낌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미한테 소리 지를 거 같아서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뜬 연우가 다시 차분해져 말을 꺼냈다.
“한보미. 사람이라는 건 가끔 느낌이 있거든? 그게 가끔은 맞을 때도 있지. 새봄이가 어제 아침부터 좀 이상하던데?”
“이상? 네가 더 이상한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냥 말하는 거 어때? 말 안 하면, 나 소리 지를지도 몰라. 새봄이 어디 갔어?”
“그게 사실…….”
걸려들었다. 역시나 보미도 새봄이가 어딜 간 건지. 뭔가 알고 있다.
“그게. 새봄이가 오늘…… 진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 말하면 쫓아갈 거야?”
“그래야 할 일이면?”
고민하던 보미가 정말 어쩔 수 없을 거 같이 말했다. 보미의 예상대로 연우도 이미 눈치를 챈 거 같았다.
“사실은 할머니가 소원이라고 한번 해 달라고 해서 맞선을…… 새봄이도 할머니 말은 거절을 못 하거든.”
“알았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맞선 보는 거기가 어디야?”
“분위기 좋은 무슨 카페라고 했는데? 나도 정확히는 몰라.”
“몇 시부터?”
“11시라고 했으니까. 지금 얼마 안 됐겠다.”
시간을 보니 11시 반이다. 얼마 안 됐어도 가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가면 끝나 있을 수도 있었다. 급했다. 연우가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보미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서 뒤를 돌았다.
“장연우!!!”
“왜?”
연우의 표정은 엄청 짜증이 나 있고, 아까 막 들어 올 때처럼 여전히 어두웠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화도 나는데 참았다.
“어떻게 하려고?”
“일단 가면서 좀…… 나도 모르겠어. 밟아 죽여 버려?”
“그러지 마. ”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해. 네 말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럼 간다.”
연우가 뛰쳐나가자, 보미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오늘 불길한 느낌이 진짜 터질 것만 같았다.
* * *
분위기 좋은 카페 안에서, 새봄과 수혁의 대화가 끊길 생각을 안 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혁이란 그 남자 혼자 신났다. 열심히 떠들고 대화하는데 새봄이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좋아서가 아니다. 얼른 이 대화를 끊을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화를 끊을 거면 누군가 와서 흐름을 깨야 할 거 같았다.
“호호홍 그러신가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수혁 씨,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네?”
일단 대화를 끊기는 성공이다. 사실대로 말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저 실은 자리 나오기 싫었어요. 할머니 힘에 억지로 나온 건데요. 나오고 보니까…….”
“네?”
“수혁 씨는 일단 나이가 너무 많아요.”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좋으면 되지.”
“그렇죠. 호호호.”
이 말이 아닌데 결국,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냥 연우가 와서 새봄이를 데리고 나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우는 카페 안을 살폈다. 문 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봄이가 보였다. 다행히 아직 안 갔다. 새봄이는 전혀 모르는 거 같았다. 팔짱을 끼우고 문 앞 벽에 조용히 기대어 지켜봤다. 새봄이 그 남자에게 억지웃음을 보이는 게 연우에게는 오해할 정도였다.
“웃어? 아주 좋아 죽네?”
일단은 그대로 서서 지켜보기로 했다. 어떤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새봄이 미소 짓는 게 막 신경 쓰였다.
‘아무 남자한테나 저렇게 헤프게 웃는 건가?’
“수혁 씨, 사실은요. 저 남자친구도 있어요. 곧 결혼할 남자요.”
“없다고 하던데요? 아직 새봄 씨 나이도 어리잖아요. 근데 무슨…… 제가 싫으세요?”
수혁은 새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새봄이 손을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싫은 건 맞다. 근데 대놓고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연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번 만 더 웃으면 진짜 쫓아갈 기세였다. 연우 눈에도 별로인 저 남자 앞에서 계속 웃기나 하고 대체 뭘 어떻게 우리 순진한 새봄이를 꼬시는지 모르겠다.
“호호홍 안 믿으시네요. 아주 멋진 남자예요. 수혁 씨랑 비교도 안 되게 잘 생겼고요. 요리도 엄청 잘해요. 저를 많이 사랑해 주구요. 그리고 일단 이 반지.”
새봄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들어 보였다. 뭔가 반짝하긴 했으나 이렇게 어린 꼬마가 어떻게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건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반지는 어디든 마음대로 하는데 결혼반지 같지도 않다고 생각해 버렸다.
반지를 보여 준 새봄을 본 연우는 일단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안 믿으셔도 돼요. 전 오늘 이 자리 할머니 때문에 억지로 나온 거고요. 수혁 씨 보니까 맘에도 안 들고요. 제 남친 누군지 확인시켜 드릴게요.”
“저기, 새봄 씨. 우리 딱 세 번만…….”
수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봄이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뭐 하는 거지? 진짜 확인이라도 하려는 건가?’
수혁은 새봄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장연우. 들어 봤을 거예요. 엄청 유명해요.”
막상 하려고 보니 지금 당장 연우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하나 싶었다. 하지 말까 하고 화면을 껐다. 다시 생각하니 가능했다. 목소리라도 증거를 보여주면, 되었다. 아니 영상통화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새봄이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뭘 하나 지켜보던 연우는 코트 주머니에서 ‘드르르르’ 진동이 울리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이 중요한 순간에 누가 방해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새봄이에게 여기 있는 걸 들킬까 봐 새봄을 힐끔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새봄이었다. 그것도 영상통화인 걸 확인한 연우는 저기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기에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순간적으로 화난 기분이 풀려 버린 듯했다.
‘큼큼’ 소리 내며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들고 새봄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일단 새봄이가 손 흔들며 인사는 하니 인사는 했으나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어디야?”
- 네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