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결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다음 날 아침, 연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새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봄은 연우 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잘 자고 있었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새봄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니 더더욱 그랬다. 이 여자 안 만났으면, 정말 다른 여자랑 결혼을 했으면, 장연우 인생에 크게 후회할 뻔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새봄이 눈을 떴다.
“잘 잤어?”
새봄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엄청 잘 잔 기분이다. 연우가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병원부터 갈까?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힘들었어.”
“저기 오빠. 나 무서운데.”
“어차피 가야 하잖아. 내가 같이 가 주는데 뭐가 걱정이야.”
“알았어. 갈게. 가는데 며칠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나도 좀, 진정할 시간이…….”
연우가 새봄의 입술에 순간적인 뽀뽀를 해 버렸다.
“한 번만 더 안 간다는 소리 해 봐. 키스해 버릴 거니까. 또 납치해갈까? 그냥 일어나는 게 좋을걸? 난 엄청 궁금한데 넌 아닌가 봐?”
“알았어. 갈게. 가.”
새봄은 무섭고 두려웠지만, 연우의 힘에 못 이겨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새봄과 연우는 병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새봄이 아닌 연우가 작은 산모 수첩을 들고 있었다.
수첩 안에 작은 초음파 사진을 펼치고, 한없이 바라보는 연우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그러니까. 진짜 우리 애야?”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아빠가 되었다고. 연우의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새봄도 연우 옆에 서서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이 어린 나이에,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연우는 한참 동안 산모 수첩을 펼쳐 바라보다가 새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신기하지 않…….”
새봄에게 물으려던 연우는 말을 멈추었다. 새봄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우는 대체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좋지 않아? 난, 이 상황이 엄청 신기하기도 하고 행복한데.”
“장연우.”
새봄은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연우는 산모 수첩을 접어 손에 꽉 쥐고 새봄을 바라보았다. 연우만 행복했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 뒤로 배가 만삭인 산모 하나가 지나갔다. 연우는 잠시 그 산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봄아. 겁내지 마. 늘 내가 옆에 있을게. 그리고 저렇게 되면, 좋을 거 같지 않아? 나는 지금도 너무 행복해. 아이 생각해서라도 웃어. 그래야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하잖아.”
새봄은 연우의 말에도, 멍하게 서 있더니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좋긴 했지만, 눈으로 확인한 이 상황을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연우는 말없이, 산모들이 지나다니는 그 앞에서 새봄을 한참을 껴안았다.
“괜찮아. 봄아. 이건 축하할 일이야. 할머니도 알면 좋아하셨겠지? 돌아가신 네 부모님도.”
새봄이는 그 말에 또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또 할머니에 부모님 생각까지 났다.
연우는 아차 싶어 새봄을 꽉 껴안은 어깨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미안. 그렇지만 진짜 좋은 일이잖아. 누구든 알면 축하해 줄 거야. 좋은 생각만 하고 힘들면 언제든 말해. 오늘은 내가 일찍 퇴근할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줄게.”
연우의 말에, 새봄은 그대로 연우에게 안긴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가 생겼던 아니던, 연우가 자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 *
새봄이랑 병원을 다녀온 후 늦게 출근한 연우는 온종일 싱글벙글 이었다. 앞으로 며칠은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거 같았다.
“전무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세요.”
비서가 이제 몇 번이나 더 타 줄지도 모르는 커피를 연우에게 건네며 말했다.
연우는 비서가 주는 커피를 손으로 들며 말했다.
“아, 그게. 박 비서는 새봄이랑 친하면서 별말 못 들었어?”
“아직요. 새봄이랑 관련된 일이죠? 혹시…….”
말하고 보니, 연우도 이상했다. 연우도 좀 전에 정확히 알게 된 걸, 벌써 박 비서가 알 리는 없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박 비서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어멋. 전무님 축하드려요.”
연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새봄이가 그 일로 많이 힘들어해.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이런 상황에 박 비서는 뭘 해 주면 좋을 것 같아?”
“위로와 공감이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잖아요. 근데 애부터 생긴 새봄이는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어요. 거기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전무님이 새봄이 진짜 잘 챙겨주셔야 해요. 초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어요. 감수성도 예민해질 때고요.”
“진짜 그거면 될까?”
“그럼요. 전무님 진짜 축하드려요. 결혼도 얼른 하셔야죠.”
연우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로 나 오늘 좀 일찍 퇴근할게.”
“그러세요. 전무님은 절대 혼전임신 그런 거 생각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새봄이 많이 좋아하신 거죠?”
“그래. 그런 거 겉아.”
* * *
회장실에 연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석기는 그 앞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러니까. 그게 사실이란 말이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게 얼마나 된 거냐.”
“6주 조금 넘었어요. 죄송합니다.”
연우는 괜히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석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니. 잘했다. 축하하고.”
“결혼은 아무래도 3월에 못 할 거 같아요. 그 아이도 그렇고.”
“괜찮다. 네 엄마도 알면 좋아하겠구나.”
“결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도 초대 안 해요. 그냥 저희 둘이 소소하게요. 어차피 새봄이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그래. 알아서 하거라.”
“그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전 예정대로 한 달 후에 그만둬요. 장 레스토랑 지금 리모델링 중이고, 이젠 내 스타일로 바꿀 거예요. 이름도 바꾸고. 이젠 거기에만 매진할 거고 새봄이 옆에서 많이 챙겨주고 싶어요.”
“연우야. 꼭 그래야겠니?”
“내가 원하던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 부탁드려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대신에 나중에 언제든 다시 돌아올 의향은 있는 거지?”
“그건 그때 생각해 볼게요. 아직은 괜찮으시잖아요. 저 하나쯤 없다고, 이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전 가 볼게요.”
연우가 일어서 나왔다. 지금, 이 선택에 미련은 없었다. 연우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만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석기는 뭔가 아쉬운 마음에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치킨집 구석의 전용석에 앉아있는 새봄은 서비스 과자를 깨작깨작 먹더니, 절반이나 먹어 버렸다. 먹어도, 먹어도 계속 들어갔다. 아니 지금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임신테스트기로 두 줄을 확인할 때는 몰랐는데 진짜 병원까지 가서 확인해 보니 더 믿지 못할 거 같았다.
믿어야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지금 그러니까 이 배 안에 연우랑 나 사이에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남자? 여자? 이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새봄이 멍하게, 서비스 과자를 입에 밀어 넣고 있으니, 보미가 앞에 와 앉으며 말했다.
“그만 먹어. 그거 서비스용인데 손님들은 어쩌라고.”
아직 한가한 오전 시간에 서비스 과자를 다 먹을 거 같은 새봄이 맘에 안 드는 보미가, 새봄이 들고 있는 과자 봉지를 빼앗았다. 그렇게 먹은 새봄은 아직도 배가 고팠다.
“맞지? 두 줄 나왔어?”
보미가 새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새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맞아. 병원까지 갔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몇 주나 됐는데?”
“6주 좀 넘었는데, 안 믿겨.”
“첨엔 다 그래. 시간 지나면 괜찮을 거야.”
“언니. 나 진짜 무섭고 두려워.”
“괜찮아. 연우가 잘 해 줄 텐데.”
새봄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니,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보미는 그런 새봄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어느새 새봄의 옆에 가서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새봄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까 그렇게 먹었음에도, 너무 울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도 됐고, 아까보다 배가 더 고픈 거 같았.
‘순대 먹고 싶다. 연우가 좀 사다주면 얼마나 좋을까?’
보미는 새봄이 먹을 만할 게 없나 찾아보고 있었다. 없으면 남아 있는 귤이라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때, 연우가 순대를 들고 왔다. 새봄이가 말한 텔레파시가 연우에게도 통했나 보다. 거기다 귤도 커다란 박스로 한 상자 들고 왔다.
“장연우!!!”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새봄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연우보다 사실 귤 상자 위에 보이는 그 비닐. 스멀스멀 풍겨오는 순대 냄새가 더 반가웠다. 냄새에 이끌리듯 새봄은 연우보다 먼저 순대가 담긴 비닐을 낚아챘다. 연우는 내심 서운했다.
“지금 나보다 이게 더 반가운 거야?”
“나 방금 이게, 엄청 먹고 싶었단 말이야.”
“어제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어. 가지고 오는데 냄새 땜에 죽을 뻔 하면서.”
새봄은 비닐도 그대로 든 채, 일어나 연우를 꽉 껴안았다. 지금 딱 생각나는 걸 사 와준 연우가 너무 좋았다. 연우는 비닐 안에서 풍겨오는 순대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새봄은 비닐 안에 있는 순대를 펼치고, 순대를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순대 냄새가 퍼지자, 연우는 코를 막았다. 그리고 그 냄새를 참고,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으며, 새봄의 옆으로 앉았다.
손바닥에 얼굴을 받치고 앉아 새봄이 먹는 걸 한참 바라보았다.
“하나씩 사줄게. 네가 먹고 싶다고 한 거, 많이 먹어.”
새봄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연우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또 지켜보는 보미였다. 어쩐지 연우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코를 막고 있는 연우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긴 보미가 물었다.
“지금, 이 상황 보니까. 연우가 새봄이 대신 입덧해 주는 거 맞지? 새봄이는 이렇게 잘 먹는데 연우 넌 못 먹는 거 같은데?”
연우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고, 새봄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순대만 계속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럴 때 보니까, 딱 느껴진다. 진짜 새봄이보다 장연우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거. 둘이 아주 보기 좋아.”
연우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새봄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말했다.
“봄아. 그러다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
그러건 말건, 새봄은 순대를 먹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새봄이 순대를 거의 먹어 갈 즈음 연우가 말했다.
“봄아. 그거 다 먹으면 가 볼 때가 있어. 보미도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
“어딜?”
몇 개 남지 않은 순대를 오물오물 씹던 새봄이 한쪽으로 순대를 몰아넣고 물었다.
“다 먹은 거야?”
연우가 순대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새봄은 순대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응. 그래서 어디를 간다는 건데?”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봄에게 물을 챙겨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허락받을 수 있는 곳. 가면 너 울지도 몰라. 애한테 안 좋으니까 좀만 울어.”
“어디? 어딘데 그래?”
“비밀. 가면 무조건 허락이셔. 찬성하실 거야. 무조건.”
새봄은 연우의 말에, 불안한 듯 연우가 가져다준 물만 마셨다.
‘대체 어디를 가려는 거지? 장연우. 나를 얼마나 울리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