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화 (1/185)

제1화.

태어난 지 1년이 된 해에 갑작스럽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던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1부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악녀를 무찌르고 멋진 남자 주인공과 결혼하게 되는, 꽉찬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소설이었다.

결국, 악녀는 죽음을 맞이하고 주인공들은 딸과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딸이 아닌 악녀의 딸로 환생해 버렸다.

악녀는 패악을 부리며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고, 남자 주인공에 의해 아주 높은 첨탑에 유폐되고 만다.

빌어먹게도 그 죄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이런 완성도가 낮은 소설 속에서 악녀의 딸로 태어나다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그제야 눈앞에 보이는 이 어두침침한 환경이 이해가 되었다.

죄인이기는 하나 아직 젖먹이인 아이를 엄마와 떼어 놓을 수도 없으니 나 또한 이곳에서 같이 사는 거겠지.

'휴’

나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힐끗 눈을 굴렸다.

“…보고 싶어요, 공작님. 정말로 저를 잊으신 건가요….”

소설 속 악녀, 아니 내 엄마는 내게 젖을 물려 줄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전남편을 그리워하며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우울하기만 한 이 첨탑은 육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결국 나는 이곳에서 자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악녀의 딸인 내 운명일테니까.

* * *

이 해피 엔딩 소설에는 참 큰 모순이 있었다.

사실 악녀는 남자 주인공의 부인이었다.

결혼하여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는 사이좋은 부부였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의 등장과 함께 남자 주인공이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자 악녀는 제 자리를 위협받게 된다.

그녀는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다.

다만, 소설의 운명은 악녀가 아닌 여자 주인공의 편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그 노력을 패악으로 여겼다.

그리고 용서할 수도 없는 끔찍한 죄를 지었다며 그녀를 죄인으로 몰아 첨탑에 유폐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

참 재미있게도, 악녀의 몸에는 이미 남자 주인공과의 부부의 결실이 맺혀져 있었다.

그 부부의 결실이 바로 나였다.

악녀와 남자 주인공이었던 공작의 딸.

하지만 공작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온종일 공작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이게 악녀의 딸로 태어난 내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그저 정해진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현실이 너무 가혹하니까.

차라리 이야기라고 믿는 게 마음은 편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두 살이 되었다.

젖을 완전히 뗄 수 있게 되자 나는 엄마와 떨어졌다.

엄마는 내가 떠나는 그날에도 여전히 남편을 그리워하며 내게 관심 하나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실은 오래돼서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슬퍼해 주지 않았을까?

그냥 내 바람일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엄마와 헤어지게 되었고, 제국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작 두 살, 이제 겨우 몸을 꼼지락거릴 나이지만 내게 향하는 것은 악의적인 시선과 무관심뿐이었다.

-악녀의 딸이니까, 그 여자처럼 독하겠지.

- 이 정도 굶는다고 죽겠어?

-차라리 죽으면 공작가에서도 좋아하지 않을까?

배에서 우렁차게 꼬르륵 소리가 울리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딱히 첨탑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어둡고, 칙칙하고, 삭막하고, 애정 하나 없는 그런 환경.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매일매일 우는 울보가 되었겠다.

전생의 기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눈물을 흘리면 분명 그 꼴을 보기 싫다고 나를 더 괴롭혔을 테니까.

이 악의에 서서히 적응되기 시작했다.

조금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하다.

* * *

여섯 살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육원의 직원들이 조금씩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불렀는데 못 들었어?”

갑자기 나타나 시비를 걸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기도 했다.

“나 노려보니? 제 엄마를 닮아서 독하기 짝이 없구나!"

무시와 냉대 또한 버티기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힘든 것은 날카로운 말들이었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버티지도 못할 만큼 현실은 가혹했다.

현실에 무감해질 즈음, 아무리 몰래 벌어진 일이라 한들 결국 보육원장에게 그 모습을 들키게 되었다.

당황하는 직원들을 한 번, 그리고 체념한 듯 울먹거리는 나를 한번 바라보던 보육원장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 그 누가 알겠나.”

보육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을 탓하겠다는 것이 아닌, 행동을 묵인하겠다는 나지막한 허락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일곱 살이 되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빌어먹을 스토리. 빌어먹을 운명.’

나는 악녀인 엄마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이렇게 만든 저 사람들을 원망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소설 속 주인공들을 원망해야 하는 걸까?

‘평화롭게 살고 싶다.'

그렇게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새로운 사람이 보육원에 들어왔다.

맑고 선한 표정을 가진 예쁜 여자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내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내가 다치면 데려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몰래 먹을 것도 챙겨 주고, 또 예쁘다고 토닥여 주며 마치 자신의 아이를 대하듯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맞이한 이 평화가 참 만족스러웠다.

'그래, 어떻게 보육원에 미친 사람들만 있겠어.'

이 평화가 부디 오래 지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그래, 악녀의 딸이 무슨 평화야.

나는 갑작스러운 보육원장의 호출에 기사들과 함께 첨탑으로 향했다.

궁금했다.

지금껏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듯 굴더니 이렇게 갑자기 데려가는 이유가.

그래서 기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래도 마지막이 되기 전 어미의 모습은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기사는 그리 대답하며 그게 그들이 내게 해 주는 배려라 덧붙였다.

마지막이란 아마도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굉장히 홀가분해 보였다.

'이건 내게 해 주는 배려일까, 엄마에게 해 주는 배려일까?'

아니, 이건 배려가 아니야.

우리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찝찝한 죄책감을 한 스푼 거두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나를 위하는 척하기는.

그 누구도 진심으로 날 위하지 않으면서.'

'이제 얼굴은 기억도 안 나는데.'

어릴 적 기억 속 엄마는 그저 울고 또 우는, 남편만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는걸.

그런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엄마가 곧 죽는다니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다.

어차피 아빠는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엄마는....

어린 시절 배고프다고 울면 나를 안아 젖을 물려 주기라도 했었으니까.

이상하게도 엄마의 품에 안겨 있으면 배고픔도 제 미래의 서글픔도 다 잊어버릴 만큼 따뜻했었다.

'…마지막이니까 혹시 그리워지면 떠올릴 수 있도록 눈에 담아 두자.'

하지만 그런 다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은 내 기억과 너무 달라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비쩍 마른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린 기억 속에서도 여윈 모습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 데….

누가 보아도 아프고,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숨소리마저 거칠게 뚝뚝 끊겨 가고 있었다.

“고… 이 작님.."

숨쉬기조차 힘들면서 끝까지 제 사랑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릿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맞아 왔던 상처도 지속적인 폭언도 버틸 만했다.

그런데 끝까지 엄마가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보고… 싶어요….”

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데리고 온 기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다.

계속해서 공작님을, 자신을 버린 전남편을 찾았나 보다.

공작을 부를 수는 없으니 딸이라도 불러온 것일까.

그래, 역시 우리를 위하는 척을 한 것이었다.

그놈의 공작, 공작, 공작.

그놈의 사랑, 사랑, 사랑.

‘어차피 그 사람은 우리를 잃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왜 그걸 모르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놓고 싶지 않은 거야?

엄마가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를 봐주지 않는 자에게 품은 서글픈 감정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이해가 되어 버렸으니까.

끝까지 내게 향하지 않는 시선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퍼석퍼석하고 거칠게 마른 손에 조심스럽게 내 손을 올렸다.

해골처럼 비쩍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성인 여자의 손과 어린 내 손의 차이는 꽤 컸다........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나는 엄마와 손을 잡고 싶어 작은 손을 억지로 펴 그녀의 손가락을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엄마의 손에 내 온기가 더해지니 그녀의 시선이 내 쪽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내 이름은 다프네예요.”

"......."

“아무도 지어 주지 않아서 내가지었어요. 예쁘죠?"

엄마의 시선이 내 눈동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금색 눈동자는 내 아빠인 공작의 눈 색과 같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나를 보고 자신의 전남편을 떠올리며 또 그리워하겠지.

그렇지만….

나는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욱여넣은 채, 빙긋 웃었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웃으면서 보내 주고 싶었으니까.

“난 엄마 이해해.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라 공작님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잊지 않을 테니까….”

"......."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고, 푹자.”

오지 않을 아빠는 기다리지 말고, 이제 제발 편해져요.

"ㄷ….”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힘겹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원망스러운 듯 엄마는 몇 번이고 더 색색 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눈물을 흘렸다.

참지 못하고 흘러내린 눈물은 그녀의 바싹 마른 얼굴을 따라 내려 갔다.

엄마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옆서 가 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조용히 하얀 천을 엄마의 얼굴 위에 덮었다.

“…안녕, 엄마.”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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