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4화 (4/185)

제4화.

푸석푸석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가지고 있는 짐들을 모두 꺼내 보았다.

다 쓸모없는 것들뿐이었다.

“…정말 내 건 아무것도 없네.”

나라에서 보육원에 지급해 준 가방, 몇 벌의 옷가지, 낡은 신발, 그리고 머리끈 한두 개 정도.

"내가 이렇게 살 이유는 없었는데. 왜 그동안 무조건 받아들이려고 했던 걸까.”

진작 도망가야 했었는데.

아니야, 도망갔다면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을 거야.

괜히 앞에 있는 낡은 옷을 구기며 불타오르려는 분노를 차갑게 식혔다.

악녀인 엄마가 죽었고, 그녀의 딸인 나도 내일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1부 주인공들의 귀여운 딸이 행복하게 성장하는 아기자기한 이야기.

갑자기 이웃 제국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가출 겸 모험을 하고, 또 소중한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들어 행복하게 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해피 엔딩으로 이야기를 끝내게 되겠지.”

그렇게 끝나면 마치 엄마와 나의 비참한 죽음이 당연한 징벌인 것 같아 속이 좋지 않았다.

그 행복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이야기를 조금, 아니 많이 비틀어도 과연 그 이야기가 그대로 흘러갈까?

문득 드는 궁금함에 피식 웃었다.

그대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운명이고, 바뀐다면 내가 성공한 것이겠지.

해 보지도 않고서 결과를 생각하지는 말자.

나는 시끌벅적한 밖의 소리를 흘려들으며 세 벌뿐인 옷 중 하나를 꺼내 물을 묻혀 상처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넘어지면서 삐었는지 욱신거리는 오른쪽 발목을 옷으로 고정한 뒤 침대를 살짝 밀어내어 작은 문을 찾아냈다.

“창고로 쓰이던 방이라 다행이지."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여러 명이 함께하는 방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같이 있으면 괜히 소란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유였으나….

솔직한 이유로는 조용히 학대하며 방치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래서 창고로 쓰던 방에 혼자 머물게 되었는데.

"벽과 비슷해 아무도 못 알아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 문은 바로 옆의 커다란 창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무모하지는 않을까…. 아니야, 더는 물러날 곳도 없잖아.”

나는 2부의 내용을 되짚어 보며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떠올렸다.

악녀와 그녀의 딸이 죽은 뒤, 2부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한 상단의 상단주를 찾아가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실패해 바로 붙잡혀 버린다.

그 패기 어린 모습에 상단주가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된다.

그리고 후에 상단주가 된 남주와 여주가 만나서 모험과 역경, 고난 속에서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그러면 나중에 그들의 딸을 만나서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될 테니 될 수 있는 한 만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기 위해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다른 곳이 필요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아무리 내가 악녀의 딸이어도 내 가치가 입증된다면 잠시라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남주인공의 양어머니가 될

'베네디토 상단의 상단주, 클로에 베네디토.'

그녀가 남주인공을 양아들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복수에 남주인공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거리낌 없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클로에 베네디토.

과거 이 보육원 출신으로 성인이 되자 친구였던 보육원장에 의해 뒷세계로 팔려 나간 여자.

그녀는 갖은 고생을 이겨 내며 베네디토 상단주의 자리까지 앉게 되었고, 보육원과 그들의 뒷배에 있는 자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불태우는 여자였다.

'소설에 의하면 보육원장은 자신의 사무실에 뒷세계와 관련된 서류들을 보관한다고 했어.

조심성이 없어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고 했었고, 나중에 그것을 찾기 위해 주인공들이 보육원에 몰래 침입하는 내용으로 이어졌었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나한테 항상 말하던 사람들이니, 이 정도는 감수했겠지.

오늘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서류를 훔치고, 이곳을 빠져나가 상단주와 거래를 해야 했다.

'적어도 내일이 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해.'

나는 욱신거리는 몸의 통증을 참아 내고 숨을 죽이며,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피곤함이 몰려와 몸은 휴식을 요구하였지만, 그에 반해 정신만큼은 유독 또렷했다.

오로지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으니 당연한가?

보육원을 채우던 소리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육원장도 다른 직원들도 모두 자정이 되기 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보육원을 위해 야간에 당직을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기를.'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고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곧 수도의 높은 시계탑에서 종이 치는 소리가 울렸다.

자정을 알려 주는 종소리였다.

그 소리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뒤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신발 대신 찢어 놓은 옷을 발에 감아 밖으로 나왔다.

낡은 신발을 신은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나는 어둠을 따라서 천천히 보육원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자정이 지난 보육원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였다.

마치 이곳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나뿐인 것처럼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가 앞으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평소보다 더욱 싸늘하게 느껴지는 추위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하얀 입김을 최대한 삼키며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창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원장의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과 마찬가지로 낡은 옷으로 감싼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평소 안전 불감증이 있는 보육원장답게 잠그지 않았는지 문은 열려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다는 듯 방안은 깜깜했다.

귀를 기울여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뱉고서 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보육원답지 않게 화려한 물건들이 꽤 많다.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돈 외에, 도 뒷배에 후원이라도 받는 건가?’

참, 사치스러운 사람이야.

다시 속으로 보육원장을 욕하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빠르게 그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서랍은 별것 없었고, 두번째 서랍도 별것 없었다.

남은 것은 열쇠로 잠겨 있는 조금 커다란 세 번째 서랍이었다.

하지만 열려고 해 보아도 잠겨 있어 덜컹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열쇠가 필요하잖아.”

설마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하긴, 남자 주인공은 굉장히 강하다고 했었으니 이 정도는 그냥 부숴서 열어 버렸겠지.

나는 조급한 마음에 몇 번 서랍을 더 열어 보려다가 무리라는 생각과 함께 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원장은 보기보다 덤벙대는 사람이니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이곳에 열쇠를 숨겨 둘 수도 있잖아.'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워서 방의 중앙으로 향했다.

값비싸 보이는 책들로 채워진 벽.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과 그 옆의 커다란 화분 두 개.

바닥에 깔린 두꺼운 카펫과 그 위의 큰 소파.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니까 동선을 최소화한다고 생각한다면 근처에 있는 화분일 테고, 원장이 왼손잡이인 걸 생각해 보면….’

나는 책상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화분으로 걸어가 그 안을 뒤져 보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 안에는 작은 열쇠가 반짝이고 있었다.

'찾았다!’

찾은 열쇠는 정말 다행히도 서랍의 열쇠였다.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달칵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서 랍이 열렸다.

불행하게도 이 세계의 글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서류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됐어. 거래할 자료만 있다면 충분하니까.’

나는 서랍에 있는 모든 자료를 빼내어 챙겨 온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서류 외에도 특이하게 생긴 도장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런 곳에 보관해 놓는 것이라면 중요한 물건이겠지. 이것도 가져가야겠어.’

보는 사람도 없건만, 혹시 모르니 도장은 가방의 옆 주머니에 몰래 숨겨 놓고서 챙길 것을 모두 다 챙겼다.

달칵.

서랍을 닫고, 열쇠로 다시 잠그고서 화분에 돌려놓는 것까지 끝이 났다.

이제 가방을 제대로 메고 나가기만 하면 됐는데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어째, 한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이 방은 건물의 복도 끝에 있었다.

그러니 저 발걸음 소리는 이곳으로 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 나가면 들키고 말 것이다.

여기서 맞아 죽을지도 몰라.'

원장은 다른 직원들보다 훨씬 더 심한 다혈질이었고, 가끔 잘못한 아이들에게 호되게 폭력을 가할 때가 있었다.

분명 이것을 가지고 도망가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지도 몰랐다.

'죽지 않기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 정신 차려야 해, 다프네!’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나는 황급히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이 몸으로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는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장롱마저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숨을 곳은 단 한 곳이었고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서 가방을 소중하게 안은 채, 소파 아래로 몸을 구겨 넣었다.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서 작고 여린 몸은 다행히도 조금 힘을 가하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려오는 천으로 앞을 가려 완벽하게 숨자마자 문이 열렸다.

나는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입김이 나오지 않도록, 또 숨소리를 최대한 삼키기 위해 가방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곧바로 이 방의 주인인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일 다프네를 거기에 데려가겠다고?”

"네. 애가 좀 잘해 주니 건방진 게 혼 좀 나야겠더라고요.”

울리네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가 .

“얼씨구. 자기 계획 틀어졌다고 이러는 것 봐라, 걔 엄마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거기에 갔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몰라. 보라색 머리가 흔한 줄 아냐?”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그저 겁을 먹고 얌전해지기만 하면 돼요.”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공작님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 같고, 걔네 외가 쪽에서도 딱히 연락 없는 것을 보니 완전히 버려졌으니까. 걔도 참 불쌍하지.”

“정말로 불쌍히 여기기는 하고요?"

장난스러운 목소리 뒤에 피식 웃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겨 버렸다.

“…잠시만 이리 와 봐.”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는 것이 소파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들킨 건가?’

나는 최대한 숨을 들이켜고서 입을 꼭 틀어막고는 몸을 더 안쪽으로 말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내가 숨어 있는 소파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안 돼, 제발, 제발….'

나는 제발 그 둘이 모르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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