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화 (5/185)

제5화.

“이것 좀 봐 봐. 이게 뭐지?”

'…끝이다.' 들켰다는 것을 직감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갑자기 털썩, 하고 누군가가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예쁨이 묻어 있네?"

“아이, 진짜."

능글맞은 원장의 목소리 뒤로 조금 전과 다르게 새침한 울리네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이게 뭐하는 수작이에요?"

“함께 있을 시간도 적은데 좀 맞춰 달라고.”

“내가 선배들한테 눈치 보여서 티 내지 말라고 한 것 때문에 그래요?”

"그래. 솔직히 섭섭하단 말이야.”

그리고 곧바로 쪽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란스럽게 뒤척이는 소리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둘이 이런 사이였어?'

원장은 벌써 40대를 훌쩍 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알기로 울리네는 고작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어쩐지, 이곳에 너무 갑자기 입사했다 했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온 거였구나.'

나름 황실에서 책임을 지는 보육원이니 이곳의 직원은 공무원이나다름없는 직군이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들킨 것은 아니라서.’

그런데 저 둘이 여기서 일을 벌이면 어떻게 하지?

‘얼른 빠져나가야 하는데….'

말로 표현하기도 싫은 소리에 빠져나갈 타이밍을 볼 수 없었다.

혹여 들킬까 몸을 조금 더 안으로 마는데 앞에 힐끗힐끗 보이는 다리들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다리가 실수로 소파 아래에 들어와도 문제고..

다리가 이 안으로 들어오면 금방 나를 눈치채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으.’

곧바로 내게 쏟아질 폭력을 떠올리다가 끔찍한 생각을 빠르게 지워 버렸다.

나쁜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여기서는 싫어요. 춥고, 너무 어둡고, 그리고 일단 일터잖아요?"

“언제부터 그런 것 따졌다고.”

“적어도 침대가 있는 따뜻한 방으로 가고 싶다고요! 여긴 너무 춥잖아요! 그러니까 집으로 가자니까.”

“집에서까지 일 얘기는 하기 싫다며.”

울리네의 짜증 난 목소리에 원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집으로 가자고.”

다행히도 울리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그에 원장이 졌다는 듯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울리네도 따라서 소파에서 일어났고 둘은 사이좋게 웃으며 이 방을 나섰다.

조용한 밤을 울리는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덜 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슬며시 소파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창가로 다가갔다.

'하아, 하아. 안 들킨 거겠지?'

창문 너머를 보니 보육원 정문을 향해 사이좋게 걸어가는 둘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 빨리 이 방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들키는 줄 알았어.'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되자 몸이 조금 전보다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식은땀을 한 번 닦고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방문 바로 앞에 있는 기름이 담긴 램프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 기름이 담긴 램프가 많았지.’

지나치면서 봤던 램프를 떠올리며 나는 이곳을 조용히 빠져나갈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 원장의 서랍에서 보았던 성냥갑을 찾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 * *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 위에 마치 내가 자고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 남은 옷을 펼쳐 놓았다.

'이걸로 속아 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앞에 낡은 신발을 올려놓았다.

가방을 제외하고서 생활용품을 모두 제자리로 옮기는 것까지 아주 완벽했다.

“제발 멍청하게 속아 주고, 숨기려고 하기를 바라야지.”

불을 지른 것도,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르게 해야 했다.

보육원생을 죽게 뒀다는 것이 알려질까 겁을 먹고 나의 흔적을 숨긴다면 내 계획은 완벽해질 것이다.

하지만 옷은 흔적도 없이 타 버릴 가능성이 크니까….

차라리 뼈까지 사라져 버릴 정도로 크게 타 버려라.

그러면 모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여기랑도 이제 안녕이야."

이건 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기필코 살아남아서, 이 이야기의 시작을 비틀어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거니까.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더는 얌전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방에서 피어나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창고로 나섰다.

창고를 뒤지니 이제껏 열심히 아껴 왔는지 꽤 많은 램프와 그것을 채울 기름이 보였다.

그것들을 보자니 이렇게 램프가 많은데 내 방에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게 치사하다는 생각까지들었다.

“아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주지 뭐.”

나는 램프를 찾아 모두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하고 경쾌하게 깨지는 램프들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내 방 안으로도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내 방이 보이지 않도록 작은 문을 잘 닫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예전에 보육원 직원들이 갖다 놓은 자물쇠까지 채워 놓았다.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이 건물이 모두 타오르고 불이 꺼졌을 때 모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기를.

'널리 퍼트려줘.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나야 편해지니까.'

나는 추위에 달달 떨리는 손을 움직여 성냥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 타오르는 작은 성냥 하나를 보며 바닥에 던졌다.

작은 불길이 기름을 머금으며 서서히 몸집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크게 올라오는 불꽃에서 조금 전과 다른 뜨거움이 느껴졌다.

곧이어 창고의 물건들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탄 냄새가 순식간에 퍼지는 것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불길이 치솟을 것 같았다.

'창고에 많은 물건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창고고, 음식만 제대로 있다면 애들이 굶을 리는 없겠지.'

적어도 나처럼 끼니를 거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화재로 보육원 원장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아이들은 피해를 입은 만큼 받을 혜택이 줄겠지.

'죄책감 같은 것 없어.'

마치 내 분노처럼 빠르게 피어오른 불꽃은 창고와 연결된 내 방으로도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 크게, 크게 번져 가는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우기를 바라며 나는 등을 돌려 재빠르게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창고의 문에도 불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살던 그 작은 창고 방을 눈에 담았다.

'정말 제대로 막아 놨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가 문 앞을 굳게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혹여 내가 몰래 빠져나올까 봐정말로 치우지 않은 장애물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차라리 죄책감을 가져. 내가 너희 때문에 죽었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비참하게 죽은 애라고 동정해. 그리고 너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갈 때 아주 멀쩡하게 나타나서….'

그 죄책감 따위가 무색하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처럼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기름을 머금고 피어나는 붉디붉은 불꽃은 어느새 내 방을 꿀꺽 삼켜 버리더니, 창고를 제 속에 품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뒷문을 통해 보육원을 빠져나갔다.

그 길을 돌아보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는 하얗게 나오는 입김을 내뱉으며 어둠을 타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얇은 옷 속에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추위를 느낄 새는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베네디토 상단의 사무실이 수도에 있다고 했어. 우선 수도 중심가의 분수대 앞으로 가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나는 언젠가 몰래 빠져나와 보았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분수대 앞에 도착하였다.

그 앞에서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사잇길로 들어가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서 앞만 보고 쭉 직진한다.

그러면 막다른 길이 나오고, 그곳에 넝쿨에 둘러싸인 벽이 있다.

나는 높은 벽을 감싼 넝쿨을 바라보면서 긴장감에 등을 꼿꼿이 세웠다.

'이제 시작이야.'

나는 소설을 읽었던 기억대로 벽의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똑.

그리고 3초 뒤, 다시 똑, 똑, 똑.

또 3초 뒤, 다시 똑, 똑, 똑.

세 번의 텀을 두고서 총 아홉 번의 노크를 하였다.

이곳은 상단의 숨겨진 비밀 문이었다.

지금처럼 아홉 번의 노크는 상단에 비밀스러운 의뢰를 한다는 암호였다.

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면 문은 열릴 것이다.

드르르륵.

긴장감을 가지고서 벽을 바라본지 5초 정도 지났을까, 벽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열렸다.”

진짜, 열렸어.

나는 조금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들어오자 다시 뒤의 벽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발짝 내디디자 복도의 양옆에 촛불들이 동시에 켜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밝아진 복도는 갈림길 하나 없이 오직 한곳으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니 곧바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차갑게 굳은 팔을 슬슬 쓰다듬으며 억지로 몸을 덥히려 했다.

"얼어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두근두근 뛰는 나의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계획의 성공을 앞두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뻐져 버렸다.

나는 고작 촛불 몇 개로 훈훈해지는 공기를 느끼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밝은 빛을 따라 벽을 걸어가다 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마치 내려오라는 듯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기에,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내려가자마자 환한 빛이 나와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꼬마?”

지금껏 들어왔던 목소리 중 가장 곱다 여겨질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내가 움찔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열일곱, 열여덟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연녹색 눈에 담긴 놀라움을 보며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도 나처럼 놀란 듯 뒷걸음질을 쳤다.

“꼬마가 왜? 아니, 그보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사, 상단주님을 만나러 왔어요.”

“상단주를?”

마치 들으면 안 될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의 미간이 곱게 구겨졌다.

나를 보고 놀란 감정은 이미 정리를 끝마쳤나 보다.

소년은 그것이 원래의 자기 표정이라는 듯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만날 수 없다.”

“거래하고 싶어서 왔어요. 만나게 해 주세요!”

“여기를 어떻게 알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만 나가거라.”

안 그러면 내쫓겠다는 말은 일부러 숨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살벌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나를 쫓아낼 듯했다.

괜히 욱하는 마음에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거래하고! 싶어요!! 상단주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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