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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화 (6/185)

제6화.

살면서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인생 처음으로 목청을 높여 보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헉헉거리며 숨이나 고르라는 벌을 받았다.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소년은 제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고 있었다.

어째 조금 전 위협적인 모습과다르게 연약한 초식동물이 놀란 모습 같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보는 이가 분명 한데도 무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헉헉거리는 내가 더 초식동물 같아 보이겠지만.

“만나게 해 주세요!"

다시 목소리를 높였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녀는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뒤에서 나타났다.

얇은 숄을 걸친 채 입에 파이프담배를 물고서 짜증이 난 얼굴로 이 소란의 주범을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구나 했더니, 왜 아무도 안 보이지?”

"아래예요!”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못 본 건지 모르겠지만 욱하는 마음에 다시 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자인지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후, 하고 뿜어져 나왔다.

“그래, 낡아 빠진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꼬마야. 나와 뭘 거래하고 싶은 거지?"

“저를 상단에서 거두어 주세요.

그렇다면 상단주님이 필요한 것을 드릴게요!”

“…자선 사업을 하는 취미는 없는데.”

다시 그녀의 입에서 후, 하고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얗게 번지는 연기가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어 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 괜히 애가 탔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몽땅 꺼내 들며 보여 주었다.

“원장이 이 서류가 상단주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져왔어요. 이 서류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필요하다면 나를 거둬요.

내가 살아갈 곳을 제공해 주고, 내가 이 이야기를 비틀 수 있는 다음 단계의 발판이 되어 줘요.

간절함을 담아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묘한 안개에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내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바로 건네주지 않고 확답을 얻고서 결정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 따위가 없었다.

나는 괜한 긴장감에 손에 차오른 땀을 옷에 닦으며, 그녀의 손에 억지로 서류를 쥐여 주었다.

옆에 있던 소년의 작은 탄식 소리를 들으며 긴장한 채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고, 나를 관찰하던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류를 넘겨 보았다.

드디어 마지막 장이 넘어갔을 때, 조용히 다물려 있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어디서 몰래 주워듣고서 훔쳐 온 건지 모르겠다만, 고작 이런 일로 나를 찾아온 거라고?"

기가 막힌 목소리 뒤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짓은 빈민가의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 오히려 빈민가 애들이 너보다 손과 발을 더 빨리 움직이겠구나.”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저 서류가 필요해서 주인공들이 난리를 피워 몰래 가져오는 데…?

'왜, 왜 서류를 보고서 기뻐하지 않는 거야?'

그녀가 서류들을 보고서도 저런 태도를 보이니 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열심히 달리는 중에 갑작스럽게 장애물이 나타나 나를 억지로 넘어트린 것 같았다.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저 입술을 억세게 깨물며, 동공을 이리저리 흔들 뿐 무기력하게 서 있던 나를 향해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머리색이 특이하구나."

"........"

보라색 머리카락,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나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연기 아래에 보이는 눈빛이 샐쭉하고 웃는 것이 어째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누군가의 딸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네 머리색은 이곳에서 흔한 색이 아니지. 옆 제국이라면 모를까, 이런 옅은 보라색이라니. 누가 보아도 네가 그녀의 딸이라는 것을 알겠어.”

"내가….”

무언가 목을 꽉 조르는 기분이었다.

살고자 도망쳐 온 곳이 다른 곳과 다름없는 장소라는 것을 아니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분노가 올라왔다.

내가, 내가 무얼 잘못했는데?

엄마가 무얼 잘못했는데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꽉 쥔 주먹 안으로 자르지 못한 손톱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 분노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저, 그저 너무 서러웠다.

애써 참아 온 눈물이 난생처음 본 사람 앞에서 '펑' 하고 터질 것 같아 필사적으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으로 올라오는 서러움을 꾹 누르고,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연기는 마치 베일처럼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가렸다.

"내가, 내가 악녀의 딸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나를 쫓아내려는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은 다시 말해 긍정이겠지.

"괜히 너를 들였다가… 사업에 손실이 가면 곤란하니까. 거래하러 왔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손해 보는 장사가 될 뿐이지. 그러니 좋게 말할 때 돌아가렴.”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란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처음 나타난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다.

“그럼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데요?”

하지만 이어져 나온 내 말이 그녀의 떠나는 발을 붙잡았다.

"나를 따돌리고 학대하는 보육원? 아니면, 제 딸인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내 존재를 부정하는옆?

매정한 아버지의 옆? 그것도 아니면 죽어 버린 엄마의 옆인가요?"

"......."

“당신도 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죽었을 때처럼 그 누구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죽어서 꼴좋다고 비웃고, 그렇게 꽉죽어 버렸으면 좋겠나요? 왜요?

내가 악녀의 딸이라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 번 터진 입은 멈출줄 몰랐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죽기 싫어요. 나는 살고 싶어요.”

그냥 누군가가 들어 줬으면 했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말을 내뱉고 나니 이토록 허탈할 수가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걸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조용해진 이 적막 속에서 갑자기 허공에 작은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조

-아, 아. 들리세요, 어머니? 조금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났는데요.

발랄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제껏이어 가던 그녀의 침묵이 깨졌다.

“무슨 일이지?”

이상하게도 남자의 목소리는 그녀에게서 들리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 보니 정말로 그녀를 감싼 하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하다간 보육원 뒤의 작은 산까지.

-보육원 쪽에 불이 났나 봐요.

그것도 꽤 크게 일어났는지 자칫 뒤산불이 붙을 것 같아 경비대가 난리가 났어요. 보아하니 성문 쪽 경비원들도 허겁지겁 달려가네요?

“보육원에 불이라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연기가 눈 녹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흥미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흥미로운 시선도, 소년의 놀란 시선도 내게로 향했다.

그 시선이 마치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내가 지르고 나왔어요. 내가 빠져나온 거 모르게 하려고."

“…네가?”

“갇혀 죽은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방문도 잠긴 채로 두고 나왔어요. 돌아가면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들키겠고, 결국 난 맞아 죽겠네요.”

담담히 이어지는 말에 옆에 있는 소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유약한 반응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맞아 죽는다니?”

그리고 그 반응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처음으로 돌아오는 질문이었지만 그다지 기쁜 질문은 아니었다.

“내가 건방지다고 내일 어디론가 끌고 갈 거래요. 거기 가서 혼 좀 나면 다시는 이렇게 건방지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원장 말로는 거기에 내 엄마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대요.”

“빈민가를 얘기하나 보군."

“우리 엄마랑 빈민가가 관계가 있어요?”

또다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혹 어린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봐말을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처럼 굳이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인지 몰라도….

조금은 기대했기에, 아니 많이 기대했었기에 희망이 꺾이는 소리는 더욱 컸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아.'

어째 눈가가 시큰시큰했지만, 여기서 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없으니 울어 봤자… 기력만 빠지겠지.

나는 괜히 내 뺨을 한 번 때리고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 발로 찾아왔고, 내 발로 나가는 거야.

쫓겨나는 게 아니라고.

두려움 따위 잠시 접어 두고서 당돌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를 찾아온 건 그냥 원장이 당신을 싫어하니까 나를 도와줄 것이라 생각해서였어요.”

나는 설움을 꾹 참고 말을 했다.

“그래서 열심히 원장이 말하는 걸 주워들어서 겨우 찾아온 거였고. 결국, 당신은 날 도와줄 수 없다는 거죠?"

당신도 내가 죽기를 바란다는 거 죠?

모두가 내가 죽기를 바란다는 거잖아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부릅뜨고 있는 눈이 뜨거웠다.

눈물만 흐르지 않았지, 눈은 이미 울고 있는 것과 같았지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잡아 주기를 바랐다.

이곳에서 나가면 난 더는 갈 곳이 없는걸, 맞아 죽기 전에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죽어 버릴지도 모르는걸.

난 진짜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흠.”

내 속마음이 그녀에게 닿기라도 했는지, 잠시 고민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은 흥미롭게 빛나고 있었고, 입가에도 조금 전과 다르게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 볼까? 내 이름은 클로에 베네디토란다. 네 이름이 뭐지?”

"다프네예요.”

“그래, 다프네. 네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뭐지?”

“…살고 싶어요.”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하염없이 떨리며 나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 답안이 이 클로에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클로에가 여우처럼 눈을 휘며 싱긋 웃었다.

"아무리 급해도 처음 만나자마자 이렇게 본론으로 들어가면 곤란하지. 사람이 만나는 것에는 절차가 있단다.”

클로에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짧은 생각을 마친 그녀가 빙긋 웃었다.

“본론을 이미 들어 버렸지만, 나는 그래도 예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게 하는 인사 겸해서 네게 꽃이라도 받고 싶구나.”

"꽃이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서류로는 충분하지 못했다는 소리인 거죠?”

내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충분하지만 만족하지를 못했다는 소리지. 상인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무엇 하나라도 더 받아야겠다는 소리인 걸까?

아니면 이렇게 돌려서 거절하는 걸까?

“…이 날씨에 피어 있는 꽃은 없어요.”

그 말에 클로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구해 와야지.

내가 쉽게 구해지는 물건 따위를 인사로 받을 것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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