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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8화 (8/185)

제8화.

빛 하나 없는 컴컴한 사이로 살랑이는 보랏빛.

그 보랏빛이 아래로 가라앉던 나를 구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내 앞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보라색 나비?"

이 겨울에 나비가 돌아다니나?

꽃 한 송이조차 피지 못하는 이 차가운 날씨에 나비라니.

갑작스럽게 현실과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다 흐릿해져 가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보라색 나비는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비는 내가 정신을 다 차리자마자 마치 길을 안내하려는 것처럼 어느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돌아오더니 내 주위를 다시 맴돈다.

재촉하는 듯한 모습에 나는 다시 발에 힘을 주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비는 내 다친 몸을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팔랑이는 날개를 살랑살랑 움직이면서 천천히 안내했다.

토끼를 따라가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알 수 없는 예감이 내게 물씬 차오르기 시작했다.

'…색이 친근해.'

들쑥날쑥한 내 보라색 머리보다는 조금 더 진한 색인가?

마치 엄마의 머리 색 같아.

엄마, 비참하게 첨탑에서 생을 마감한 우리 엄마.

'엄마는 좋은 곳에 갔을까?'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내가 발을 멈추니 나비가 내 쪽으로 날아와 다시 나를 재촉한다.

“알겠어. 얼른 따라갈게.”

좋은 곳에 갔을 거야.

갔기를 바라자.

*

나비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달이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은 나를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끌어내 주었다.

처음 보았던 것과 다르게 환한 달빛이 내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이 어둠에 둘러싸인 나를 구해 주는 것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나는 한참이고 달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밝다.”

이 어둠을 거두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어둠에 감기는 대신, 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찬 생각이 나를 맴돌았다.

나는 밝은 달빛 아래에서 꽃을 찾아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살짝 고개를 내리니 정말 우습게도.

“찾았어."

조금 높은 벽 위에 자리했지만, 있었다.

붉디붉은 꽃이 다가오는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 내고는, 활짝 피어서.

대략 건물의 2층 정도 되는 높이기는 했지만, 조심히 올라간다면 충분히 꺾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해 보자!”

답지 않은 의욕을 불태운 나는 꽃이 핀 벽의 아래쪽에 삐져나와 있는 바위를 하나하나 밟으며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밟을 때마다 바위에서 부스스하고 돌가루가 떨어져 심장이 철렁했다.

“휴”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도 내 무게를 버틸 만은 한 모양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겠다.' 올라가는 거야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려가는 게 걱정되었다.

나는 호흡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발걸음을 열심히 옮겼다.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 시야에 붉은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튀어나와 있는 돌을 잡고서 옆으로 발을 살살 옮기자 바로 앞에 활짝 피어난 붉은 꽃이 나타났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요동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내 이야기를 스스로 써 가는 첫 단계를 성공해 낸 이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 나 해냈어요. 꽃을 찾아냈어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어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꽃을 꺾었고, 손안에 잡히는 붉은 꽃잎을 바라보며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천천히 발을 내딛자.

혹시 모를 상황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발을 옆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빳빳이 세우고 있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친 발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삐끗하며 꺾여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당황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비명은 짧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는 빨랐다.

맞은 상처에, 이미 다 떨어진 체력, 그리고 피로가 가득 차 있는 몸은 당연히 떨어지는 나를 구해줄 수 없었다.

나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악!”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머리 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리 쪽으로 떨어져서인지 정신을 잃을 일은 없었다.

"흐으으.”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못 이겨 눈가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가득 고였다.

떨어질 때 먼저 바닥에 부딪혔는지 삐었던 발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손을 대 보니 상처가 난 발은 열을 품고 있었다.

"아, 아아.”

소리를 내면 안 돼.

혹시, 아까 그 야생 동물이 소리를 듣고 쫓아올지도 몰라.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혹시라도 소리가 나올까 입을 막았다.

야생 동물이 아니더라도 몬스터라든가, 혹 모를 위험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데 너무 아파, 아파, 아파….’

다 성공해 놓고서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왜 아파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 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아서.

끔찍한 고통에 지금껏 속에 담고 있던 서러움이 폭발했다.

아빠는 왜 날 모르는 척해?

왜 날 버린 거야?

엄마는 왜 날 봐주지 않았어?

왜 날 두고 먼저 떠나 버린 거야?

왜 아무도 날 봐주지 않는 거야.

적어도, 둘 중 하나만 나를 구해 주지.

'…엄마, 보고 싶어.'

비록 아무도 나를 아껴 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엄마는 나를 보살펴 주었잖아.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그렇게 떠났어야 했던 거야...

이 이야기에 왜 우리가 희생되어야 해, 엄마?

끔찍한 고통이 발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타고 올라왔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은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답답한 억울함에 나는 올라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까지 닥치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그 순간.

고통에 잠시 잊고 있던 꽃이 생각났다.

'…꽃은 어디 있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꽃은 내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와 다르게 상태가 무사한 꽃을 보니 막힌 숨을 조금이라도 내뱉을 수 있었다.

'우는 것은… 성공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까맣기만 하던 하늘에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거친 숨을 최대한 들이쉬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적어도, 어느 정도 심각한지는 확인해야 하니까.

생경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 뒤 게슴츠레 눈을 떴다.

부러졌는지 아니면 그것보다 심각하게 다쳤는지 무릎부터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다.

이 발이 내 발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뒤로한 채,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발에 슬며시 힘을 주어 보았다.

"아.”

너무 아파.

발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끔찍한 통증이 느껴져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억지로… 끌고서라도 가야 해."

겨우 꽃을 찾았는데, 이 상태로 포기하기에는 다친 것보다 더 억울한걸!

거칠게 나오는 숨이 하얀 입김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도와주러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날이 새고 나면 늦어…."

시간은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성공해 내고 말리라.

살아남아서, 기필코….

의지가 가득 찼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몰랐다.

애초에 성문 밖으로 나와 본 적도 없었던 데다 동물에게 쫓겨 길도 잃어버렸으니….

'조금 전에 봤던 나비는 사라진 것 같고….’

어떻게 찾아가야 하지?

온몸에서, 특히 다친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차가운 기온임에도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는 천천히라도 고개를 돌려 이곳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때,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보라색 나비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나를 데려다줄 거야?"

사람이 아니기에 답은 없었지만, 나비는 말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조금 전 나를 안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앞장서서 팔랑팔랑, 열심히 날갯짓하였으니까.

나는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서 나비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밝은 달빛을 가려 주는 어두운 나무 아래를 지나고, 수풀을 헤쳐서.

길이 길어져도 나를 꽃으로 안내해 준 이 나비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몸이 버텨 줄 때의 이야기다.

‘아파….’

다리에서 보내는 고통은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몸은 이젠 정말 한계라는 듯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앞이 점차 흐릿해지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갔다.

'나비….'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이 상황에서 내가 믿을 것은 눈앞의 나비하나뿐이었다.

보라색 나비의 팔랑이는 날갯짓이 점차 희미하게 보인다.

내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일까, 나비가 흐릿해지는 것일까.

다만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와 함께 그동안 버텨 왔던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끝… 일까?'

나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었나?

앞으로 넘어지는 그 순간이 마치 죽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바닥에 몸이 부딪히기 직전 고통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을 때, 정말 기적처럼 누군가가 나타나 내 몸을 받아 내었다.

“후우…. 다행이다.

아, 아는 목소리다.

“.…레녹스?”

맞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감기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어느새 나는 어두운 숲을 벗어나 밝은 달 아래에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녹스는 넘어지려는 나를 간신히 붙들었다.

열심히 뛰어다니기라도 했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이 보였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숨소리도 거칠어져 있었다.

"너….”

레녹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려다가 놀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그의 시선은 내 머리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고, 발끝에 도착하고 나니 눈에 띄게 미간을 구겼다.

"이런, 미친…!”

그리고 화난 목소리.

'왜 화가 난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면 내 부탁을 안 들어주려 할까?

나는 다시금 천천히 감겨 오는 눈을 억지로 버티며 꽃을 붙잡고 있는 손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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