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꽃을 전해 주어야 해요."
"너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이러면 안 되지만… 도와주세요. 더는 걸을 힘이….”
거친 숨소리에 끝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레녹스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언가 울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와, 도와줄게. 그러니까 정신을 잃지 말고… 아니, 차라리 조금 자고 있어. 자고 일어나면 안아플 테니까….”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발쪽으로 향해 있었다.
레녹스는 재빠르게 나를 안아 들었고, 품에 꼭 기대게 한 채 힘을 주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꼭 안겨 보는 것은 엄마 이후로 처음이네.
그가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몸이 힘들어 서일까?
이상하게 그의 품이 참 편했다.
나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고통을 잊기 위해 다시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감기는 눈 너머로 보라색 나비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
“…안녕, 나비야.”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몸이 뜨거웠다.
마치 감기, 아니 독감이라도 앓는 듯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게다가 숨은 거칠어지고, 계속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운데 상처에서 오는 통증에 헛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들뜬 열과 함께 며칠 동안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나서야 희뿌연안개가 머리에서 거둬지는 느낌이었다.
겨우 돌아오는 정신을 붙잡고 눈을 떴을 때.
"아, 아.”
목이 갈라질 듯한 통증과 함께 잠긴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몇 번 캑캑거리는데 옆에서 갑자기 물 잔이 나타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주어진 잔을 받아 물을 마셨다.
따뜻한 물이 목을 흘러 넘어가니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때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시 획,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레녹스보다 몇 살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연한 분홍색 머리 아래 동그란 안경 속 붉은 눈동자에는 호감이 담겨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의 눈매가 둥그렇게 휘었다.
'…붉은 눈동자.'
클로에와 같은 색이다.
인제 보니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누구세요?”
“아, 자기소개부터 할까?"
나는 경계를 풀 수 없어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소년은 방긋 방긋 잘만 웃었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더니 마치 어린애에게 말하듯 천천히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리카르다 베네디토라고 해. 지금까지 널 보살펴 준 사람이야.”
“의사 선생님이에요?”
"의사까지는 아니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사람?"
그건 뭐야?
의사면 의사지.
내 눈빛에 불신이 어리자 리카르다가 당황하며 억울해하기 시작했다.
"나, 나 마법사거든! 보통 의사들은 치유 마법사들이 선택하는 직업인데, 나는 치유가 주전공이 아니라서 그런 거야."
"마법사….”
“응, 응.”
리카르다의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팔에 잔뜩 감겨 있는 붕대가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을 거두어 보니 다친 오른쪽 발이 무릎부터 그 아래까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전생에서 보았던 깁스와도 같은 모양새라 한참이고 바라보는데 옆에서 한시름 놓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동안 열이 올라서 공공 않았는데 다행이다. 이제 열이 더 오를 것 같지는 않고….”
"다리는 어떻게 됐어요?"
“어?”
내 말에 리카르다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고 했다.
티가 나는 그 행동에 나는 다시 물었다.
"다리 이제 못 써요?"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
“그럼 어떻게 된 건데요? 불구가 되기라도 했나요?
내 물음에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리카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면… 너는 어떨 것 같은데?"
"…목숨 값으로 싸게 먹혔다고 생각해야죠.”
안타깝지만.
덧붙여진 말에 리카르다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 표정에 나는 내가 무얼 잘못했나 고개를 갸웃했다.
리카르다는 입을 벌린 채, 어버버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
리카르다는 붉어진 눈가를 거칠게 쓸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치료해 줄게! 비록, 말로 차마 읊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지만! 내가 다 낫게 해 줄게!”
리카르다는 내 상태에 대해선 끝까지 말을 돌렸다.
아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부상이 굉장히 심했나 보다.
진짜 다리가 불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아니지,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말한 대로 목숨 값에 비교하면 다리를 조금 못 쓰는 것 정도는 싸게 먹히는 것 아닌가?
내가 딴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지 리카르다는 한참 동안 내가 3일을 꼬박 앓았다고 얘기해 주었다.
상처 때문에 흉터가 생길 수도 있지만, 모두 자기가 책임지고 치료해 주겠다는 말은 그닥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심드렁한 내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한참이고 연설하던 그가 할말을 마치고는 헉헉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선 내 손을 꼭 부여잡고서 말했다.
"응, 응. 이제부터 내가 네 오빠니까 꼭 고쳐 줄게! 그러니까 이 오빠만 믿어.”
무슨 소리지?
난 오빠가 없는데.
“난 당신 같은 오빠 없어.”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왔다.
내 반응에 리카르다는 아, 하며 머뭇거리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부터 모셔 왔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응.”
내가 여기에서 무사히 치료받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레녹스가 나를 잘 데리고 온 것 같다.
'꽃도 대신 잘 전해 줬나 봐.'
직접 못 줘서 찝찝하기는 하지만, 구해 오는 것이 조건이었으니 이걸로 책잡히지는 않겠지?
'제발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리카르다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뒤 조용해진 방을 바라보며 참아 왔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짜 거기서 죽을까 봐 많이 무서웠는데 다행히도 도움을 받아 살아난 것 같다.
상단주 클로에는 내 예상보다 깐깐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
똑똑.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꽤나 상태가 좋아 보이는구나.
3일 전에는 아주 못 봐줄 꼴이었는데 말이지.”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는 짜증이 담긴 것 같았지만 레녹스가 클로에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모른 척 내게 다가왔다.
"나는 꽃을 가져오라고 했지, 그 딴 꼴로 돌아오라고 말한 게 아니었는데. 누구 덕분에 오랜만에 당황했지 뭐야.”
“…당황이요?”
"아무리 나라도 어린애가 다 죽어 가는데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않겠니?”
“어머니. 말씀을 왜 그리 못되게 하세요.”
옆에 있는 레녹스가 한마디 꺼내자 클로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것 신경 안 쓰는 사람이지 않던가?'
분명 소설 속에서는 엄청 냉혈하고, 무섭고, 아무도 모르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이었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자 눈이 딱 마주쳤다.
클로에의 붉은색 눈에 내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눈이 마주쳐도 딱히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째 나를 향하는 시선이 그리 나쁘게만은 느껴지지 않아 다행인 거겠지?
“우선 네게 사과를 해야겠구나."
“사과요?"
갑작스럽게 나온 사과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옆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문을 나서고 나서 무섭다고 포기할 줄 알았다.
숲은 어둡고, 너는… 상태가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까.”
"......."
“그런데 숲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이 꽃을 찾아냈다고."
레녹스가 유리병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왔다.
물병같이 보이는 유리병 안에는 꽃과 찰랑거리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네가 찾아온 스테이시아라는 꽃이란다. 통증을 줄여 주는 데 중요한 약재로 쓰이는 꽤 희귀한 꽃이지."
클로에는 미간을 찌푸린 뒤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돌 틈새에서 자라는 데다가 날씨 영향도 심하게 받아서 양식도 힘든 아이지. 그걸 네가 찾았고.”
“비싼 건가요? 당신에게 선물할 가치가 있을 만큼?"
"그럼. 아주 충분했단다. 100골드는 우습겠어.”
묘하게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니 아주 깊숙히 가라앉아 있던 희망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었구나. 네가 이겼다.”
슬며시 지어진 입가의 미소와 만족스러운 눈빛.
나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짓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클로에의 대답은 내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래. 서류와 꽃도 받았으니까 미안한 것과 별개로 네가 원하는 거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들어 봐야겠지?”
“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저에게 상단 후계자의 자리를 주세요.”
내 말에 클로에가 멈칫하더니 눈을 깜빡인다.
당연하겠지만 내가 이 정도까지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나 보다.
“상단 후계자의 자리가 많은 것이 아니라고?"
“자격만 줘도 괜찮아요. 진짜 후 계자가 되지 않아도 좋고요."
상단주가 아니더라도 후계자, 그 자리면 이 이야기를 바꾸기에는 적합한 위치가 되지 않을까?
우선 남자 주인공이 언제 나타나 든 그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면 될 테니까.
내 눈빛에 장난기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모두가 조용해졌다.
클로에는 내 머리 위에 올린 손을 거두고서는 빤히 나를 내려다보다, 내게 물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상단의 후원을 받고서 생활하는 것이 편할 텐데.”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고 싶어서요.”
"이야기?”
갑자기 나오는 뜬금없는 단어에 클로에가 의문 어린 눈빛을 한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악녀는 죽었고, 모두가 그 딸까지 죽기를 바라요. 그게 정해진 이야기래요.”
올라오는 설움을 꾹 참고서 말을 이어갔다.
“멍청하게 그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살고 싶으니까요.”
나는 이야기의 엔딩을 바꿀 거예요.
그들이 아닌 내가 행복해지도록.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서, 그들보다 더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정해진 이야기를 비틀어서라도."
그들로서는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이겠지만, 나는 나를 거두어 줄그녀를 위해 되도록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괜찮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