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화 (10/185)

제10화.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하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조금 후회가 됐다.

'어린애처럼… 말했어야 했나?'

어린애가 마치 어른처럼 조숙한 말을 해 대니 징그럽다고 생각할 수도….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살아온 몸이다 보니 행동 하나 하나가 신경이 쓰였다.

나는 작은 주먹으로 이불을 꽉쥐고서 내게 향할 말을 기다렸다.

징그럽다고 혐오하는 것 정도는 익숙하니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어차피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면 내 본래 모습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등이 빳빳하게 굳어 괜히 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

그때, 클로에는 갑작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단다.”

나는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소설에서 이 부분은….

“그래서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직원들의 수작 때문에 뒷세계로 팔려 이 고생, 저 고생 다 했었지. 정말 끔찍했어.”

클로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도 함께 팔려 나갔어. 죽은 애들도 있었고,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녀석들도 있을 거야.”

아마도 저게 내 미래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보육원에서 만난 친구이자, 현재 그곳의원장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나는 복수를 결심했단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클로에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관련된 모두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단다. 내 인생을 그딴 식으로 만들어 줬는데 발 편히 뻗고 잔다?"

그녀의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지어졌다.

“절대로 안 될 일이지.”

단호한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가지고 온 서류는 아이들을 팔아넘겼다는 거래가 담긴 증서였다. 알고는 있니?”

"아니요.”

그 말에 클로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넘겨주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그 서류로 보육원장을 끌어내릴 수 있는 건가요?”

그 물음에 클로에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 지금 공개한다면 그들을 봐주는 뒷배에 의해 조용히 묵살될 것이 안 봐도 뻔하구나.”

클로에는 담배를 피우려는 듯 파이프를 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소매 속으로 파이프를 집어넣었다.

“서류뿐이겠어. 나도, 이 상단도 와장창 나는 거지. 어떤 상황에든 적당한 때가 있으니 참고 기다릴 거야.”

그 말 뒤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복수를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야.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주고 싶은 거지.”

"......"

"합당한 벌을 받게 하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아.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자료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중이란다.”

클로에는 피식하고 웃음을 짓더니 내게 충고했다.

"너는 헤로니스 공작가, 나는 보육원. 보니까 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은데….”

클로에는 꺼내는 말과 분위기와 맞지 않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 밑에 있으려면 물건의 가치를 알고서 거래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구나.”

클로에는 내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나를 후계자로 선정했다.

원래라면 원작 소설 2부의 남자 주인공에게 해야 할 말이었는데 그 말이 내게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 그 뜻은!

“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후계자가 되는 것도?”

“여자가 상단을 거느리려면 생각보다 힘든 점이 많단다. 무시와 비난이 끊이지를 않겠지.”

클로에가 마치 겁을 주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일을 잘하면 독하다고 욕할 테고, 못하면 여자라서 못한다고 욕할 거야. 네가 살아왔던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단다. 그럼에도 하겠니?”

“물론이죠.”

내 대답에 클로에는 빙긋 웃었다.

“좋아. 이제부터 네가 이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이고, 앞으로 너는 다프네 베네디토가 될 거란다.

아가.”

“아… 가….”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흠칫하는데 클로에는 딱히 그 호칭을 바꿀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내가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가 방긋 올라가 있었다.

“처음에는 네 당찬 모습에 후원정도만 해 줄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에 확실하게 마음이 바뀌었거든.”

“…정말요?"

“이 정도의 서류를 받아 놓고 그냥 후원이라니. 몹쓸 짓이지.”

클로에가 후후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패기도, 독기도, 그리고 의지도 아주 마음에 들었단다. 이 정도면 내 딸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그 뒤에 흘러나오는 말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제가 딸이 되어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되나요?"

불안한 말에 클로에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충분해.”

됐다.

그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클로에의 입에서 완벽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몸을 타고 흐르는 긴장이 떨어지며 몸이 흐물흐물 내려앉았다.

'정말로 입적시켜 주다니. 상상도 못 했지만… 차라리 잘됐어..'

한결 가벼워진 어깨를 축 늘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야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레녹스가 물어 왔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괜찮아요. 생각보다 심하게 다치진 않은 것 같고….”

내 자리가 보장되고 나니 지난번과 같이 날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 친절하게 답했고, 그 말을 듣던 클로 에가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모르나 보구나. 3일을 꼬박 았단다. 급하게 치료를 하고 약을 먹였는데도 열은 내릴 생각을 안했지. 그중 제일 심각한 것은 다리지만.”

클로에의 시선이 잠시 다리로 향했다가 내 머리로 향했다.

“그래, 다리야 고칠 수 있다지만….”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는 것이 아무래도 머리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나 보다.

그러고 보니 레녹스도 숲속에서 내 머리를 보고 놀랐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착잡해 보이는 클로에의 시선에 머리를 만져 보았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치료가 잘되었는지 이제는 안 아프다는 정도?

'그럼 뭐가 문제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클로에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가볍게 튕겼다.

“… 다프네, 거울을 좀 봐 볼래?"

미리 준비해 왔던 것인지, 레녹스가 내 얼굴만 한 손거울을 꺼내어 내 앞에 놓았다.

“아."

거울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둥그런 눈매에 끝이 조금 올라간 눈꼬리, 그리고 그 안에 비치는 금색 눈동자.

뺨에 붙은 밴드는 불편해도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었는데….

“머리가 하얘졌네요."

“보통… 큰 충격이나 고통을 받으면 머리가 하얗게 센다는 말이 있는데…."

내 말에 리카르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하얘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만큼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며, 리카르다가 침울해 했다.

침울해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 모든 여정의 결과물은 보라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내 머리였으니.

“속눈썹까지 하얘졌나 봐요. 마치 원래 이랬던 것처럼. 엄마가 준 색을 잃어버렸네요."

보라색은 엄마가 유일하게 내게 준 것이었는데.

조금 침울해지는 기분을 느끼는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뭐지…. 내 눈치를 보는 걸까?'

클로에는 보란 듯이 얼굴을 구기고 있었고, 레녹스도 티만 안 낼뿐이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이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리카르다는 머리 색을 원래대로 못 고쳐줘서 미안하다며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이고,

“괜찮아요. 안 죽었으니까. 다리도 머리도, 목숨 값으로 싸게 먹힌 거잖아요?”

나름 계산적으로 말해 보았는데 분위기가 더 가라앉은 것 같았다.

왠지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아 분위기를 전환할 겸 말을 돌렸다.

“엄마가 내게 새로운 인생을 주고 싶었나 봐요. 보라색을 가져가고 하얀색을 선물해 줬네요.”

나는 클로에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똑같은 하얀색이에요. 보라색만큼 잘 어울리죠?"

클로에의 머리는 나와 같은 새하얀색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라…..'

'…’

분위기가 풀릴 것으로 생각해서 꺼낸 말인데 어째 다들 표정을 더 구기고 있었다.

“…그래, 아가. 누가 봐도 내 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같구나.”

클로에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그럴리는 없겠지만 어째 애정이 담긴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좋았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뭘 해야 하죠? 무엇이든 시켜 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요!”

그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는데 조금씩 부드러워져 가던 분위기가 다시 경직되었다.

최대한 가치를 증명해서 자리를 확고히 해야 하는데….

클로에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래보다 정신이 성숙하고, 눈치가 빠른 것은 좋다만. 나는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클로에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몸이 회복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편하게 쉬는 거야.”

“그렇지만….”

“아직 나는 창창하지. 그 뜻은 네가 천천히 배워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란다.”

클로에는 씁쓸히 웃으며 내게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너는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가혹한 시험을 줘 놓고 갑자기 딸로 여기겠다니 놀리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할 것같이 마음이 급할 것도 이해한다.”

“절 놀리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 잔인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결국, 내가 해냈으니까 상관없다.

클로에가 내게 후계자 자리를 허락한 것이 죄책감 때문이라 해도, 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괜찮아.

내 굳센 눈빛에 클로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눈빛은 미안함을, 미소는 안도를 담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만 읽어 왔기에 나를 향한 클로에의 감정은 오히려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형식적인 딸로만 받아들일 생각은 없단다. 시작이 다른 모녀들보다 특이하지만 우리는 분명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야."

희망찬 말이었다.

나는 그저 눈을 깜빡거리며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만 나가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렴. 곧 밤이 될테니까 피로할 거란다.”

클로에가 이불을 끌어 올려 포근하게 덮어 주었다.

“모든 일은 몸을 회복해 나가면서 차차 해도 늦지 않아.”

“…알겠어요.”

클로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녹스에게 말했다.

“아가가 배가 고플 테니까 간단히 먹을 것을 준비해 주고, 쉬게 해 주렴.”

“네.”

“그럼 내일 봐, 내 동생.”

리카르다의 짤막한 인사와 함께 세 명이 함께 방을 나갔다.

나는 조용해진 방을, 그리고 나를 감싼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잠옷도, 창고가 아닌 아늑한 방도, 추위를 막아 주는 따뜻하고 두툼한 이불도 모두 보육원과 비교가 되었다.

나는 한 번 숨을 내쉬고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클로에가 준 기회가, 레녹스의 작은 친절이, 보라색 나비의 안내가, 그리고 리카르다의 치료가 나를 살렸다.

내가 죽어야 했을 날은 이미 지나 버렸다.

나는 벅차오름을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를 내며 엉엉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살아난 것이다.

나는 살아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벅차오르는 감정에 나는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외전 · 프레이르.

프레이르 헤로니스, 그녀는 일평생 불행이라고는 겪어 본 적 없는 평범한 귀족 아니, 그 이상의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출생, 가족들의 아낌없는 사랑까지.

프레이르는 많은 것을 가진 여자였고, 부족한 것을 모르는 여인이었다.

정략결혼이지만 제게 다정한 남편, 친절한 저택의 사용인들.

그에 맞게 대접해 주는 사교계까지.

그렇기에 프레이르는 헤로니스의 공작 부인으로서 언제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정한 남편은 언제나 제게 친절하였고, 의무를 버리지 않는 충실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프레이르는 그에게 연모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부부로서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안녕하세요. 유니스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공작가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유니스라고 칭하는 여인 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가 나타난 이후로 그녀의 주변이 이상해졌다.

유니스는 자신의 주변까지 기분좋게 만들어 줄 정도로 정말 맑은 기운을 가진 여인이었다.

프레이르도 처음에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이라고 생각했다.

제 남편이 그녀에게 분홍빛 감정을 띠는 눈빛을 보이기 전까지는.

* * *

침실은 언젠가부터 옆자리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그를 기다리다, 이른 아침이 되어 눈을 떠 썰렁한 옆자리를 보았을 때.

늦은 아침 유니스의 방에서 나오는 그를 보았을 때.

프레이르는 평화로운 제 인생에 처음으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프레이르는 별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착하고 친절하여 주변을 환하게 밝혀 주는 유니스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끌리는 사람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보, 주변의 눈도 있고, 유니스를 너무 가까이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프레이르는 이 말이 아내로서 행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다.

“성인 남녀 둘이서 밀실에 있다.

든가… 그런 일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하지만….”

“부인, 유니스는 저를 도와주고 있는 겁니다. 알다시피 수도가 조금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공작이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이 걱정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의 조언은 공작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프레이르의 조언에 돌아온 공작의 답은 차가웠지만 그 후로 공작과 유니스의 사이는 점차 어색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프레이르는 남몰래 사람을 고용해서 유니스의 뒤를 쫓게 했다.

프레이르는 바랐을 뿐이었다.

제발 둘의 사이를 자신이 오해한 것이기를.

창피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차라리 조금의 이성이라도 붙잡고 남편이 제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분명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을 뿐인데.

프레이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머물러 본 적 없는 삭막하고 좁은 공간.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더라.'

프레이르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늘 저에게 친절했던 이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이었고, 그것은 남편이었던 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질투와 탐욕으로 가득 차 죄 없는 사람과 그의 연인을 해치려 했다는 누명과 함께 그녀는 첨탑에 갇히게 되었다.

"프레이르 헤로니스, 빈민가의 제국민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그들의 피로 황실을 향해 저주하여 제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죄!"

형을 읊는 목소리가 차가웠다.

“죄 없는 이들을 납치하고, 위협하여,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죄.

그로 인해 헤로니스의 성을 거두고, 종신형을 선고하겠다."

전남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녀에게 다정함을 띠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의 목소리가 제게 이렇게 차가웠을까.

비록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행복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

저는 그들 사이의 묘한 기운이 제 착각이라고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유니스를 공격하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사람들을 납치해 오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다.

단지, 단지 둘 사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애원하고, 외치고, 억울해 하며 오열을 하여도 그녀의 남편도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저택의 지하실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니? 피에 미친 마녀라니.

그런 헛소리를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죠? 아니잖아요.

시체는커녕, 내가 피를 보는 것도 무서워한다는 것 알잖아요.

제발,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그가 저를 빼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1주일,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그를 기다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게 프레이르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첨탑 생활 중 제게 선물이 하나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레이르는 제 배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아이가 생긴 것을 알면 그가 다시 저를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간수에게 전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남편은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

헤로니스 공작이 결혼했다는 소식, 제국민이 기뻐한다는 소식.

유니스 공작 부인은 다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아껴준다며 누구와는 다르다는 비꼬는 말.

헤로니스 공작가에서 공녀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모두들 축하의 말을 떠들고 다닌다.

제 품에 있는 아이는… 축하조차 받지 못한 채 죄수가 된 어미와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남편을 불러 달라는 말에도, 친정에 연락해 달라는 말에도 모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마치 여기서 어서 죽어 버리라고 하는 그 행동이, 그 말이, 그 시선이 프레이르를 몇 번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모욕, 수치, 그리고 괴로움과 외로움은 프레이 르를 잠식해 갔다.

그녀는 결국 저를 꺼내 줄 수 있는 것은 공작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애타게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정말로 저를 잊으신 건가요….”

모두들 프레이르가 사랑에 미쳐버린 악녀라고 욕했다.

이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사랑을 찾는다니 정말 멍청한 여자, 한심한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들에게 욕을 지껄이고 싶어도, 저주를 퍼붓고 싶어도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말뿐이었다.

마치, 그 외의 말은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듯.

그렇기에 프레이르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기다리다 보면 자신을 찾아 줄것이란 희미한 기대가 그녀가 생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정신을 아무리 붙잡아도 육체가 불안정하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레이르는 어느 순간 병이 제 몸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홀로 죽어가는구나.'

공작은 왜 자신을 버린 걸까?

자신은 왜 누명을 쓰고,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했다.

재판 하나 제대로 치러지지 않고 정해진 형벌이라니, 친정에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화려했던 제 인생은 이제 정말로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저를 버린 것이 맞았다.

마녀라고 욕하고, 악녀라고 욕하며 결국, 죽기를 바라고 있다.

화려한 것은 한순간, 결국 생의 끝에서 진득한 어둠이 저를 맞이 하고 있었다.

좌절과 절망, 그리고 극심한 외로움에 죽음에서 몸부림칠 때, 그 누구도 아닌 제 딸아이가 나타났다.

딸아이는 저를 이해한다고 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 아이를 잊고 있었을까?

일곱 살이라고 하기에 아이는 너무나도 작고, 여렸다.

자신의 엄마가 아니라 공작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것을 이해하겠다며, 담담히 말을 건네는 아이의 손은 달달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자신의 딸이라고 아이를 욕하고, 학대하였을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흐린 눈으로 바라보아도 고작 대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체구였다.

그래, 단지 자신의 아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또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손을 잡은 아이의 손은 참 따뜻했다.

작고 따스한, 그럼에도 달달 떨리고 있는 그 손을 꼭 감싸고,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제 입에서는 공작을 간절히 찾는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프레이르는 그제야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공작을 원망하면서 그리워하는 말을 내뱉고, 다른 말은 꺼낼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떠오른 기시감을 깊이 생각해 볼 만큼 힘이 남지 않았다.

단지, 프레이르는 죽어가는 그 순간, 제 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떼고 싶었다.

공작을 찾을 때는 그렇게 쉽게 열리던 입이 제 의지를 가지자 열리지 않는 것이 원통하고 분했다.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이름 하나 제대로 못 지어준 내 가여운 딸아.

고작 품에 몇 번 밖에 못 안아본 딸이 어째서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일까.

너를 가졌을 때 그리 기뻤었는데.

마치 기억이 지워졌다가 다시 써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입을 막기라도 하는 듯 굳게 다물린 입이 원망스러웠고, 프레이르는 억울함을 참으며 눈을 꼭 감았다.

또르르 흘러가는 눈물과 함께 의식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이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만약, 신께서 제 말을 듣고 계신다면….’

신께서 저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겨 주신다면, 부디, 부다.

제 딸이 저와 같은 운명을 걸어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제 딸이 이러한 운명을 타고 났다면, 부디 그 운명을 끊어 낼 수 있도록.….

저를 찾는 딸아이의, 아니 다프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끝끝내 불러 줄수 없었다.

끝, 이었다.

*

지금껏 무겁게 저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사라졌다.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몸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은 정말로 보라색 나비가 되어 있었다.

팔랑이는 날개 아래로 무언가가 보였다.

다가가니 그 앞에 주저앉아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보였다.

프레이르의 딸, 다프네였다.

분명히 끝이라 생각하였는데, 그녀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이를 보듬어 줄 수도, 쓰다듬어 줄 수도, 그렇다고 꼭 껴안아 주는 일도.

이름을 불러 주는 일도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아이를 위해 살다 가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기 위해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낯선 소년이 아이를 보면서 슬퍼했다. 어쩐지 저 아이의 가족이 된다면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끝이었다.

열심히 날갯짓하던 날개가 서서히 빛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때, 저 멀리 떠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나비야.”

아이의 입에서 나온 고맙다는 말에도 프레이르는 울 수 없었다.

우는 것은 그녀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다만 슬펐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 테니.

조금 더 오래 품에 안아 볼 것을.

직접 이름을 지어 줄걸.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말해 줄걸.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너무나 자격 없는 어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행복하게 살아 달라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보라색 나비가 이곳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빛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 프레이르는 제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신께 간절히 빌었다.

'부디, 다음 생에 이 못난 어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세요.'

정말로, 다음 생에는 아낌없이 사랑을 줄 테니까.

부디, 다시 한번 제 곁에 저 아이를 내려 주세요.

아이가 지겨워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다프네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다프네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요.

만약, 신께서 듣고 계신다면….

작은 소망, 그 소망과 함께 보라 색 나비는 작은 빛무리를 남기고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소망이 신께 닿았을지, 안 닿을지는 오로지 신만이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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