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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화 (11/185)

제11화.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느낌이 굉장히 낯설었다.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저 멀리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서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눈을 떴다.

“잘 잤다…."

보육원에서의 버릇 때문인지 몰라도, 모두가 늦게까지 편하게 자라고 하였으나 자연스럽게 여덟시에는 눈이 떠져 버렸다.

나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괜히 눈을 깜빡 깜박였다.

'어제 울고 자서 그런가….'

눈이 조금 뻑뻑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내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낡은 이불이 아닌 부드럽고 따스한 이불이 피부에 닿으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꿈이 아니네.”

응, 정말 꿈이 아니었다.

낯선 천장도, 부드러운 침구도, 그리고 창문에 들어오는 빛도.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된 뒤,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여기던 척박한 보육원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괜히 근질거리는 입가를 긁적이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는 그동안 거의 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기뻤고, 웃을 수 있는 내 상황이 참 좋았다.

새로운 환경을 느끼며, 기지개를 쭉 켜는데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 왔다.

지저귀는 새소리는 보육원에서 자주 들었던 시끄러운 소리와는 달라 나도 모르게 그 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 여기는 지하가 아닌가?'

상단의 본거지가 지하였던 것 같은데 새소리라니?

새를 향했던 호기심은, 내가 머무는 곳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뀌어 버렸다.

성인이었던 기억이 있다 한들 어린아이의 몸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내가 다쳤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내디딘 발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넘어지자마자 내가 다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으.”

넘어지면서 팔을 부딪쳤는지 팔꿈치가 욱신욱신했다.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주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야 만족할 생각인 거냐고, 다프네.

나는 스스로를 탓하며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기 전에 침대를 붙잡고기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뛰어오는 급박한 소리가 들리더니 빠른 노크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열렸다.

"다프네!"

내가 넘어질 때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레녹스가 녹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아?”

그러고선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보육원에서의 세월이 몸에 밴 탓일까, 나를 괴롭히려는 누군가의 손과 겹쳐 보여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고 몸을 움츠려 버렸다.

'아.'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내가 버릇처럼 몸을 움츠리고 겁을 먹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 자… 잘못했어요.…."

레녹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다정히 대해 주었으나 조금 전의 내 행동에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나는 버릇처럼 그의 눈치를 보며 잘못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 말을 들은 레녹스는 마치 나무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는걸.”

잠시 굳었던 표정은 나의 착각이라고 느낄 정도로 재빨리 표정을 정돈한 레녹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나를 안아 들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 놀라서 달려왔는데. 나 때문에 놀랐지? 미안해.”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이상하게도 사과하는 그의 모습이 싫지가 않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낯설고, 또 낯설어.’

익숙하지 않은 것은 바뀐 침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확 와 닿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이제야 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이 나오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심으로 놀랐었는지, 레녹스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에 또다시 기분이 묘해져 버렸다.

“갑자기 떨어져서 놀랐겠다.”

그러고서는 그럴 수 있다는 듯 부드럽게 웃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자다가 잠꼬대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어제와 다름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는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 다리 다친 것도 까먹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그랬어요.”

“잠에 취하면 그럴 수 있지."

고작 그런 거로 바보라 칭하지 말라며, 레녹스는 챙겨 온 물그릇에 보송보송한 수건을 담갔다.

그리고 촉촉해진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제, 제가 할 수 있는데!”

“넘어지면서 팔도 부딪힌 것 같던데. 이 정도는 나한테 맡겨 줘."

팔을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은 또 언제 본 걸까.

괜히 거짓말을 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끈따끈한 수건이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자 조금 전에 일어났음에도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잠이 쏟아져 왔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레녹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다.

“자느라 눈이 좀 부었나 봐. 찜질해 줄 테니까 잠시 쉬고 있어.

다시 일어나면 같이 아침을 먹자.”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내 귀를 타고 흘러내려갔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 고서는 천천히 잠에 빠져 들었다.

* * *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음에도 앞이 깜깜하여 이제 눈까지 먼 건가? 역시 꿈이었던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녹스가 눈을 찜질시켜 준다고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펑펑 울었었지.”

그렇게 울고불고, 눈물을 쭉쭉뽑아냈는데 눈이 안 붓는 게 더 어렵겠다.

‘얼마나 웃긴 모습이었을까..'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덮은 수건을 치웠다.

그제야 다시 들어오는 밝은 빛과 그 너머의 시계가 보였다.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이 보이자 나는 딸꾹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딸꾹.

‘맘 편히 다시 잠든 것도 모자라서, 세 시간 가까이 자다니!'

내가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었던가?

놀란 마음에 딸꾹, 딸꾹 하며 입을 틀어막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왁~!"

“꺅!”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났고, 그의 기대에 맞게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르자리카르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다프네.”

“…하아."

“.….”

그리고 그 뒤로 클로에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조금 움직여 뒤에 있는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빙긋 웃었다.

"아가, 잠은 잘 잤니?”

형식적인 아침 인사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러니까….”

클로에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내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니 앞에 있는 리카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귀여운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웃음이라 나도 모르게 그를 노려볼 뻔했으나 클로에가 나서서 머리를 한 대 때리는 것이 더 빨랐다.

“동생을 놀래켜 놓고 비웃기까지 하다니 아주 잘하는구나?"

"아니, 딸꾹질 좀 멈추게 해 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귀여워서 웃은 건데 어머니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리카르다는 속상해!"

다 큰 소년이 훌쩍이는 연기를 하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징그러워 보였다.

그것은 클로에도 마찬가지였는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버린다.

“보기 흉해, 리카.”

언제 나타난 것인지 갑자기 등장한 레녹스가 이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리카르다는 지지 않고 삐진 척하며 훌쩍였다.

“우리 막내도, 오빠가 흉해? 오빠는 그저 막내 딸꾹질도 멈추게 해 주고 싶었고,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 건데."

"......"

어떤 답을 해 주는 게 맞는 걸까?

솔직하게 말하자니 밉보일 것 같고, 거짓말을 하자니 남아 있는 양심이 안 된다고 말린다.

나는 도움을 청하 레녹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레녹스가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는 클로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클로에도 시선을 피했다.

내가 당황해하는 것이 뻔히 보임에도 클로에도 레녹스도 재미있다.

는 듯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다시 나서서 리카르다를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훌쩍, 훌쩍. 오빠는 너무너무 슬퍼우리 막내도, 오빠가 흉해?

보기 싫어?”

"그… 솔직한 답을 원해요, 아니면 거짓말이라도 예쁜 말을 원해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을 던져 선택지를 주는 것이었고.

내 말을 듣던 모두가 깜짝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모두가 갑작스럽게 똑같은 표정을 짓자 나는 영문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클로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내 딸 아니랄까 봐. 곤란한 상황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똑같구나.”

마음에 들었다는 듯한 웃음을 보아하니 다행히 분위기가 망쳐진 것 같지는 않았다.

클로에가 만족스럽게 웃자 리카르다도 정말 어머니와 똑같다며 웃기 시작했고, 레녹스도 재미있다는 듯 우리를 지켜보았다.

“앞으로 편하게 어머니라고 부르렴. 그럼 이제 아가도 깨어났으니 밥을 먹으러 가 볼까?"

식당에 준비가 되어 있다며 가자는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저는 어떻게 가요?"

휠체어도 안 보이는 것 같고, 목발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발이 나을 때까지는 우선 우리가 도와줄까 하는데. 괜찮을까?”

“휠체어는 네게 맞게 만드는데 좀 오래 걸릴 것 같고, 목발은 네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안 돼.”

레녹스의 권유와 리카르다의 단호한 말에 클로에, 아니 어머니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 귀찮겠어요? 저 그래도 무거울 텐데.”

"에이, 형이 번쩍 안아 들 정도면 완전 가벼운 거야.”

우리 형이 얼마나 약골인데.

리카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레녹스의 차가운 시선이 향한 듯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녹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방긋 웃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괜찮다면, 안아도 될까?"

약골이라고 하기에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말이지.

나는 그의 넓은 품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팔을 벌렸다.

그렇게 레녹스의 품에 편안하게 안길 수 있었다.

내가 탈 수 있는 휠체어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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